한국희곡

김은성 '뺑뺑뺑'

clint 2023. 9. 12. 08:55

 

뺑뺑이 되풀이 되는 한국사
그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영수와 영희의 윤회.
영수와 영희는 그 질기고 질긴 악연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 것인가?
바로 오늘 아침 서울의 지하철,
영수와 영희는 여전히 어두운 얼굴로 마주 서있다.
영수와 영희는 바로 나와 당신이다. 

 



<뺑뺑뺑>은 총 16개의 이야기가 삽화식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옛날 옛적부터 지금 이 시대까지 이 땅에서 살아왔던 많고 많은 영수와 영희들을 호출한다. 한 번도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 본 적이 없는 이들은 떠밀리고 쫓겨나고, 자의를 가장한 타의로 생이별을 한 사람들이다. 기러기아빠와 조기유학생으로, 상경처녀와 동생으로, 제주도 4.3피해자들로, 파월장병과 그의 어머니로, 위안부 소녀와 그녀를 팔았던 그의 아버지로, 윤락객과 윤락녀로, 고공농성자와 사복경찰로, 소대장과 이등병으로, 국방군 장교와 인민군 부역자로, 상이용사와 독립군으로, 전쟁고아와 기자로 분하면서 관객들에게 페이소스를 제공한다. 12명의 배우는 영수가 되었다가, 영희도 되었다가, 그 주변의 가해자가 되는가 하면 어느새 피해자가 되어 한국사의 비극을 되풀이한다. 돌고 도는 한국 사회... 어떤 이야기는 역사책에서, 또 다른 이야기는 신문지상에서 보고 들었던 것임에 분명하다. 극적 상상력이 더해지긴 했어도 진짜로 진짜인 얘기들이다. 하지만 이곳은 극장이므로, 이 진짜로 진짜인 얘기들은 연극의 옷을 입는다. 거의 완전하게 빈 무대 위에는 배우들과 그들이 자신의 그림자처럼 옮겨 다닐 의자만이 등장한다. 자기 자리를 잃은 사람들의 의자는 때로 고공농성 현장으로, 강제 철거촌의 폐허더미로, 전쟁 직후 환도 열차의 좌석으로 끊임없이 그 몸을 바꾸어 현실을 은유한다. 배우들은 퇴장 없이 무대 양옆에 나란히 앉아 관객과 함께 비극의 현장을 목도하고, 때론 관객들에게 말을 걸면서 우리 모두가 뺑뺑뺑 돌고 도는 한국 사회의 공범자라는 사실을 각인시킨다. 고통스러워서 혹은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 그간 외면하거나 침묵했던 사건들이 이제 극장에서 유희하는 것이다. 짧은 순간을 분주하게 오가는 진행 속에서 일부 상황과 대사는 다소 추상적이거나 상투적이기도 했지만, 대부분 장면은 관객들 안에 내재된 냉소적 유머와 시대정신을 자극할 수 있을 만한 힘을 담고 있었다. 마지막 장면의 파국은, 영화적 상상으로 많이 접해 봤음직한 메시지임에도 불구하고 도발적이고 선동적이었다. 비인간 자본주의의 총체적 난국을 꼬집는 속 시원한 상상력의 발현이다

 



작가의 글 - 김은성
“ 이 작품은 디테일하게 사실주의적인 장면을 그리기보다 배우들이 무대를 뛰노는 템포를 떠올리면서 썼다. 
이야기는 무겁지만 속도감 있는 전개가 필요한 작품이다. 구체적으로 대본을 쓰면서는 
역사를 어떻게 연극과 만나게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때 떠올린 것이 바로 신문 만평이다. 
한 컷 만화에 담겨 있는 아주 사실적이고 직접적인 사건과 

그에 대한 날카로운 해석, 유머 같은 것들이 주는 미학적 구조들을 많이 생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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