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위성신 '오감도'

clint 2023. 9. 13. 10:22

 

 

연극 ‘오감도’는 소설 ‘날개’와 시 ‘오감도’, 그리고 2010년의 현실을 교차시키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백수이자 사회부적응자이며 고뇌하는 예술가인 이상을 1930년대가 아닌 오늘의 현실에 옮겨내는 것이다. 공연 중간마다 시 ’오감도‘가 슬라이드 형식으로 관객들에게 보이는데, 다소 난해하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극의 내용과 어색하지 않게 조화 된다.
시인 이상의 난해하고 복잡한 언어 세계를 탱고음악의 선율 속에서 배우들의 움직임을 통해 마치 활자체로 고정되어 있는 한편의 시가 살아있는 그림 같은 풍경으로 다가온다. 연극 ‘오감도’는 그 동안 몇몇 소수에 의해 평가되어 오던 어둡고 복잡한 이상의 세계를 문 밖으로 끌어내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무대의 가장 큰 특징은 '오감도' 등 이상이 남긴 텍스트들을 근거로 한 무대 속 현실이 21세기와 강력히 유착돼 있다는 점이다. 끈적끈적한 블루스 하모니카 등 음악적 도구뿐 아니라, 무대에 흡수된 현재의 풍경은 이 연극이 결국 지배적 구조에 편입되지 못한 인간들에게 바쳐져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좋은 예가 이 시대 명동 거리로 나온 이상의 행색이다. 금홍과 정사를 펼치려는 고객들의 출몰에 늘 뒷전 신세여야 했던 이상에게는 이 거리 또한 적대적이다. 붉은악마가 장악한 거리는 '핸드폰 공짜, 초특가 세일'의 현장이다. 지극히 사실적으로 재현되는 이 시대 명동 풍경은 이상이란 인간형을 현재적 실체로 현현시킨다. 최신 휴대폰 판매원에 붙잡혀 얼떨결에 계약서도 쓰고, '안아드립니다(Free Hug)' 등 새 풍물에, 일본 여자 관광객들과 인솔자의 호들갑에, 넋이 반은 나가 있다. 긍정도 부정도 없는 이상에게서 이 시대의 디아스포라, 88만원 세대의 모습이 비친다. 이 연극의 또 다른 묘미는 4명의 코러스다. 이들은 경극처럼 새까만 옷 혹은 일상적인 의상을 걸치고 나와 극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자동차 소리에서 광고까지 일상의 소음을 입으로 내는가 하면, 집도 의로 돌변해 이상의 가슴을 절개하는 시늉으로 이상의 내면을 보여주거나 냉정한 분석을 시도한다. 때로 의사로 변해 이상의 입에 아스피린, 수면제, 진통제를 한 움큼씩 털어 넣거나, 거리를 헤매는 이상에게 목이 터져라 "자네는 병신일세."라고 외치기도 한다.

 

 

 

 

 

작품은 현대를 배경으로 이상의 작품들을 절묘하게 교차시켰다. ‘나가요’가 된 금홍, 휴대폰을 구입하는 이상 등 과거의 예술가를 21세기 대한민국에 새롭게 환생시켰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를 떠나지 않는 네 명의 코러스는 이상의 분열적 자아를 나타낸다. 그들은 이상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괴롭힌다. ‘정말 그렇게 살았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상은 참을 수 없는 허무와 분열에 시달린다. 연극 ‘오감도’는 이런 시인의 정서가 극 전체를 아우른다. 짙고 무겁다. 이상을 연기하는 주연배우는 섬세하고 집중력 있는 심리묘사로 안정감을 준다. 평소 난해하고 ‘이상(異常)’한 시인으로 유명한 이상은 남들과 좀 달랐다. 이 때문에 그는 평생을 외로운 허무주의에 빠져 살았다. 시대가 바뀌고 원고지에서 워드프로그램으로 글쓰기의 ‘도구’가 바뀌는 사이, 예술가들이 느끼는 본질적인 고독과 외로움은 그다지 ‘개선’된 것 같지 않다. 연극 ‘오감도’는 현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모습을 이상을 통해 투영해낸다. 천부적인 재능을 부여받았지만 가혹한 운명은 늘 그들을 따라다닌다.
부제는 이상(李箱)의 이상(理想)과 이상(異常)이다. 과연 그렇다면 이상(李箱)의 이상(理想)은 무엇이었을까? 연극 속 주인공 이상이 생각하는 가장 완전한 상태는 자본주의의 지옥을 벗어나 예술을 하는 것이었다. 그럴 수 없음에 이상은 기이하고 별난(異常) 행동을 하게 된다. 연극 곳곳에선 시 '오감도'를 만나볼 수 있다. 우선, 시제 2호(나의 아버지가 나의 곁에서 ....)를 중얼거리는 이상에 이어 시제 3호(싸움하는 사람은..)가 연극 속에 펼쳐진다. 자신의 남자친구와 바람이 난 여자와 한바탕 싸움이 일어나고, 미용실 주인아줌마와 동네 아줌마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여기선 이상이 자신의 필명을 가지고 언어유희를 벌였듯 연극 속 언어유희도 만나볼 수 있다. '앞으로 내 고추 따먹지 마, 파마 보자기를 쓴 중화반점 철가방이 말하는 '중화해주세요'와 같은 대사가 그러하다.
이에 더해 연극 [오감도]에선 현금 오만원이 자주 등장한다. 싸우는 여자가 상대에게 건네는 오만원, 금홍이 이상에게 건네는 오만원등 이로인해 자꾸 '오감도'가 '오만원'으로 들리기도 한다. 더더욱 우스운 것은 시제 1호(13인의아해가거리로 질주하오...)가 이상의 입에서 불려지기 전, 자아들에 의해 먼저 열꼬마 인디언으로 불려진다는 점이다. 극 후반에 이르면 이상은 절망에 가득찬 채 우산을 들고 있는 행인들 사이를 지나 시제 1호를 읊조린다. 이 장면에서 관객들은 시대상황에 절망한 이상의 내면에 잠시 발을 담가보게 된다.
시제15호(나는거울없는실내에있다..)가 나왔다. 이 장면에선 자아들에게 두 몸을 맡기며 비판적 지성을 던져버리는 모습을 연극적으로 잘 형상화해서 보여준다. 이상은 시를 마치 의료 진단서처럼 썼다. 특히 시제 4호(환자의용태에관한문제..)가 그러하다. 실제 연극에선 숫자가 뒤집혀진 모습을 무대 뒷편에 그려놓고 있으며 수술 과정을 집도하듯이 장면 장면을 보여준다. 자아와 함께 있는 이상의 모습은 정신분열적인 모습이 다분하다. 자아가 등장하지 않는 월드컵 응원가가 들리는 길거리 외출씬, 예술가들이 모인 초상집 장면, 일그러진 부부의 모습이 등장하는 대합실 장면에서 이상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 존재한다. 길거리 프리허그에 순수하게 웃는 이상, 모두가 꺼려하며 슬금슬금 물러서는 간질 환자에게 동화를 들려주는 이상은 순수한 소년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심지어 더듬더듬 외출 시에 있었던 일을 아내 금홍에게 말하는 이상의 모습은 바보처럼 보이기도 한다.

 

 

 

관객들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 초상집 씬에서 이상은 '예술 하는 새끼'로 나온다. 연극은 실제 이상에게 사람들이 한번쯤 품었을 의구심을 그대로 무대로 가져온다. 문인들의 발에 바보같이 웃음으로 일관하던 이상은 예술 한다고 깝쭉거리는 새끼들이라고 치부하는 사람들에게 '원래 예술 하는 놈들은 다 이기적인 거야'라는 말로 한방 먹인다. 이 장면은 보다 현실적이고 친절하게 이상의 내면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작, 연출 위성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장면이라고도 하겠다. 연극 속에선 백수 이상과 자아의 갈등뿐 아니라 현 시대를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과의 갈등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금홍과의 갈등도 한 축을 담당한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통로(이상과 금홍 사이에 넘을 수 없는 현실을 상징하는 듯하다)를 사이에 두고 이상과 금홍의 방이 각각 자리한다. 실제 금홍과 이상은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 돈을 벌기 위해 오늘 밤도 나가야 하는 금홍은 화장에만 열중하고 있어 이상이 말을 던지자 '뭐라고 중얼대는 거야?'라고 답을 한다.
이상은 금홍을 벗어나고 싶다. 금홍은 이상을 절대 못 버린다고 악다구니를 쓴다. 연극 속에선 일그러진 부부, 즉 대합실 씬에서 시골남자와 시골여자의 상황으로 이야기한다. 극단적인 무기를 꺼내든 시골 여자 앞에서 망설이는 시골남자의 모습은 이상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자아를 버리고 나간 외출로 인해 이상은 감기를 얻게 된다. 아니 절망의 병을 얻게 된다.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 옥상으로 올라간 이상은 그 곳에서 역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만나게 된다. 스타킹 속에 든 동전을 들어 보이며 이상이 중얼거린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내에게서 '100원짜리가 딸랑하고 떨어질 때의 가장 숭엄한 감각'에 대해 말하면서 그는 스타킹도 던져버리고 자신의 몸도 던져버리려 한다. 이상이 아내를 거미로 비유하는 장면에선 이상의 소설<지주회시>가 오버랩 된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게 탱고음이 들린다. 생활과 예술,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던 이상은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라는 말을 내뱉으며 바상을 꿈꾼다. 이때 들리는 싸이렌 소리에 자아들이 민방위 훈련인지 비행기 놀이인지 아무튼 대수롭지 않게 여기듯이 2010년 이상은 현실의 관심에서 그렇게 사라지고 있었다.

 

 

 

 

작가의 글
내년이 이상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중 고등학교 시절 막연하게 동경하고 좋아했던 이상이란 인물의 이야기를 담아보고 싶었다. 특히나 백수이자 사회부적응자로서의 모습을 통해 고뇌하는 예술가의 모습을 1930년대가 아닌 오늘의 현실에 옮겨내는 작업을 하고 싶다. 내년에는 이 작품을 반드시 올려야겠다고 다짐한다. 이상의 시집 '오감도'를 어떻게 이미지화해야 할까가 벌써부터 고민이다. 오감도 - 李箱의 理想과 異常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위트와 패러독스의 세계에 살았던 불우한 천재작가 李箱! 그의 자유에 대한 理想과 현실의 異常에 대한 이야기이다. 오감도 그 연극적 발악 작업은 오감도를 연극적으로 형상화함에 있어서, 오감도의 국문학사적인 해석을 염두 해두지 않았다. 단지 처음 받았던 인상이 중요했다. 오감도는 연극적으로 다양하게 열릴 수 있는 작품이다. 李箱의 초현실주의 세계를 좀 더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번 작업에서 단순히 1930년대의 李箱의 생애를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1996년도의 허구적인 이상을 창조하여, 우리 시대의 또 하나의 지식인 인 추箱의 삶의 모습과 질곡을 엿보고자 한다. 지식인의 한 단편적인 모습으로서의 李箱은 실천력이 부족한 우유부단하고 나약한 지식인의 한 전형이다. 이것은 1990년대 들어서면서 나타 난 새로운 한 유형, 즉 백수로서의 삶이다. 李箱을 생각하면 1980년대의 지식인이 생각난다. 그들은 먼 시기를 지나서 1990년대에는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또 하나는 기형도의 詩 '오후 네 시의 희망'이다. 겹겹이 먼지가 쌓인 오래된 화석 위에 오후 네 시의 게으르고 나른한 햇빛이 비추인다. 세밀한 먼지의 알갱이들을 통해 우리에게 정상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작품은 세 가지의 관계에 대해 주목한다. 李箱과 자아들과의 관계, 李箱과 아내와의 관계, 李箱과 세상과의 관계. 李箱이 추구했던 모든 관계는 우리에게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처음 '오감도' 작업을 했던 이대 국문극회 친구들과 두 번째 작업의 성좌 식구들, 그리고 우리 오늘 식구들 모두에게 깊은 애정을 전한다. 반복되는 연출 작업 속에서 새로운 탈출구에 대한 열망이 커져만 간다. 아! 새로워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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