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하기 작 이창복 각색 '완전한 만남'

clint 2023. 6. 1. 12:25

 

연극 <완전한 만남> 90년대를 대표하는 젊은 작가 중, 부산지역 소설가인 김하기씨의 단행본 소설 "완전한 만남"을 연출가 이창복씨가 의해 각색한 작품이다. 단편소설 '완전한 만남' 만을 연극으로 형상화한 것이 아니라 단행본 내의 8편 단편소설들을 하나의 틀거리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소설 "완전한 만남" 80, 90년대의 사회적 요청에 의해 쓰여진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자신의 과거사를 바탕으로 작가자신이 느낀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시대정신은 초역사적이기보다는 당장의 자기시대에 충실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기에 연극에서도 중심인물을 80년대를 대표하는 인물, 즉 청산주의적 사고에 빠져 있는 대학생 김원기로 설정하고 있다. 또 소설 속에서 원기, 두혁, 형우 등은 우리 사회에서 보편성과 일반성을 가진 인물들로 묘사되고 있다. 연극 속의 원기와는 출신성분, 성장배경이 다르지만 이 시대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장기수들의 성격과 생활을 단순화하지 않고 다면적이고 풍부하게 묘사하고자 소설 상의 특정인물을 도용하기 보다는 몇몇 인물이 가지는 공통분모를 종합하여 한 인물, 한 인물로 성격화 하였다. 그리고, 극구성과 감정조직을 논리적으로 풀어나가기 위해 이데올로기의 편향적인 모습보다는 균형성을 잃지 않는 즉, 한반도의 통일은 남과 북의 대립된 이데올로기의 표출이기보다는 민족주의 정신으로 동질성을 회복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79년 부마항쟁 당시 시위전력 등으로 인해 교도소 생활을 시작하게 된 김원기가 '특사' 특별사동, 미전향장 기수들이 수감되어 있는 사동로 이감되는 것에서부터 연극은 시작된다. 원기는 지난날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것을 후회하고 그 전적을 청산, 정리하고 싶은 심정 때문에, 특별사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장기수들의 통방교도소 내의 독방생활자 상호간의 연락을 거부한다. 계속되는 특사생활 속에서 원기는 맑고 깨끗한 미전향 장기수들의 진실한 삶의 태도를 대하면서, 특히 먹방(교도소내의 벌칙방)에 갇혔을 때 원기를 풀어내기 위해 노력한 장기수들의 인간에 대한 사랑, 조국통일에 대한 뜨거운 열망 그리고 진실에 대한 신념을 발견하게 된다. 그 사건 이후 원기는 장기수 노인들과 대화를 시작하므로서 비로소 건강한 감옥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여기서 원기는 미전향 장기수들이 사회정치적 생명에 대한 문제를 실제생활에서 풀어나가는데 있어, 그들의 신념을 체현함과 0.75평 독방생활이지만 그들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생활에 감동되고 있다.

특사의 수인들에겐 작은 소망이 있다. 언제나 일방적인 교도소 측에서 일반사동과 특별사동을 격리 시키기 위해 쌓아 놓은 벽을 철거하는 것이 바로 그 작은 소망이다. 이것은 '인간은 공히 모두가 자신의 문제로부터 출발하여 해명의 길을 찾아 간다'는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첫눈이 내려 온세상을 하얀 옷으로 장식할 때, 특사에선 원기를 비롯한 미전향 장기수들은 벽 철거문제와 소내 복지문제를 요구하며 교도소 측과 싸움이 시작된다. 그 결과, 수인들의 승리로 소내 복지요구와 ""을 철거하게 되나…….

"우리 민족을 갈라 놓은 저 커다란 분단의 벽을 허물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의 뜻과 의지, 그리고 아픔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의 벽을 허물고 뜻과 힘을 뭉치면 우린 반드시 저 분단의 벽을 허물어 버릴 수 있을 겁니다."라는 장기수의 마지막 대사로 이 연극은 막을 내린다.

 

 

원작가의 글/김하기

바쁘게 길을 걷다가 문득 난 왜 굳이 이 길을 가야 하나? 하는 의문에 사로잡혀 멍하니 멈춰 설 때가 있다. 순간 시간과 공간은 시커멓게 몰려와 나를 포위해 감옥속에 집어넣어버린다. 그때 마주친 하늘은 교도소의 천정처럼 늘 무거운 회색 빛이었다. 존재의 피구속성이 밝혀진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미시의 세계처럼 시간의 방향이 없어지고 무의미한 진동만 반복하는 요즘, 일상성의 감옥에서 탈옥을 꿈꾸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일부의 오해와는 달리 난 장기수들을 특별하고 특수한 존재로 그리지 않았으며 더욱이 미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통해 일상성의 감옥 속에 갇힌 우리들의 본질을 드러내고 싶었다. 안팍이 없는 클라인씨 병()처럼 감옥의 세계는 바깥으로 열려져 있으며 바깥의 일상성은 감옥 안으로 들어가 있다. 갇힌 자들은 끊임없이 자유와 해방을 꿈꾸고 있는 반면, 바깥의 우리는 분단신화와 허위의식에 감금당하고 있다. 우리의 분단의식은 빨갱이라는 집단 무의식에 사로잡혀 단군신화를 대체하는 국민신화로 발전했다. 반공이 국시가 되고 반북 이데올로기는 아프리오 리(Apriori : 선험적)한 경험으로 주어져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것의 형성은 미국산 코카콜라를 마신 시기와 거의 일치하며 때로는 그런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 어느 층에도 전혀 없는 환각임을 깨 닫고 놀랄 때가 있다. 이러한 환각과 허위의식이 영호남을 분리하고 남북을 갈라놓아 한민족의 아이덴티티를 분열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 최장기형을 복역하고 있는 장기수들의 삶은 분단신화의 직접적인 산물인 셈이다. 그들은 이승만을 비롯한 역대 5대 정권의 흥망을 0.75평의 감옥에서 보았고 정권의 교체기마다 사면과 가석방의 기대는 커녕 오히려 인간 인내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그들은 우리 의식의 가장 부끄러운 곳에서 오늘도 복역을 치르고 있다. 난 길을 가다가 문득 멈추어 일상성의 감옥에서 탈출하고 싶다. 낮게 내려온 하늘과 무거운 의식의 뇌옥인 분단신화를 허물 때 비로소 남북의 민중을 감금하고 있는 분단의 장벽도 헐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