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정지현 '세븐 씬'

clint 2023. 2. 14. 11:01

 

 

여자는 이혼을 했다. 남자도 이혼을 했다. 이별은 관계의 맺음인 알았다.
하지만 얽히고설킨 관계들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데...!

극은 남녀의 이혼 직후로부터 시작된다. 남자는 회사 탕비실에 있다. 동료가 들어와 남자의 고장 시계를 지적한다. 남자는 고장 시계를 버리지 않고, 동료는 시간이 틀리는 시계는 쓸모가 없다고 말한다. 여자는 예물 시계를 잃어버렸다. 집안을 뒤지다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평생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는 엄마의 이야기에 여자는 소리친다.
내가 잃어버린 얼마나 많은데!”
여자는 시계 수리 접수증을 찾고 궁금해한다.찾아가지 않는 시계는 어떻게 되는지. 결국 버려지는지.

채원이 4살 때 이혼해 어느덧 30년이 흘러 그 딸이 4살된 딸을 홀로 키우며 막이 내린다.

 

 

이 극은 이혼을 한 남자와 여자의 30년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자와 여자는 이혼 이후,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둘의 딸인 '채원'도 점차 성장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혼한지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았을 땐, 여자가 혼수 시계를 잃어버려서 찾는 장면이 나온다. 남자도 쓸모없는 시계라는 동료의 타박에도 불구하고 고장이 나서 맞지 않는 시계를 꿋꿋이 차고 다닌다. '시계'라는 오브제를 통해서 이혼을 경험한 남자와 여자의 정서를 드러내는 것이다. 다급하게 시계를 찾는 여자의 행동. 잃어버린 것이 많다고 이야기하는 짜증 섞인 여자의 목소리. 그리고 알 수 없는 공허함과 쓸쓸함이 묻어나는 얼굴로 고장 난 시계를 바라보는 남자의 표정. 이를 통해 이혼이라는 예측 불가능한 이벤트를 경험한 남자와 여자의 복잡한 심경을 드러낸다.

 

 

이후 시간이 흐르며 삶을 이루는 거대한 테마이기도 한 직업, 가정, 사랑과 결혼, 우정, 죽음, 고독 등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지점은, 이혼을 경험한 후 남자와 여자는 각자의 삶을 살아가지만 작품에서는 둘이 아예 분리된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묘사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둘은 29년이라는 시간 동안 직접 대면하는 사건이 없었다. (1년 뒤인 3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둘은 대면하고 공연은 막을 내린다) 그러나 작품은 시공간의 중첩을 통해, 이혼 이후에도 둘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연극적으로 무대 위에 그려낸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통화를 하는 장면이 있다. 일반적으로 연극에서 통화 장면을 표현할 때, 무대 위의 두 인물은 어느 정도 물리적인 거리를 가지며, 각자의 공간 안에서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마치 통화하는 것처럼 연기한다. 이를 통해 둘은 물리적으로 각자 다른 장소에 있으며 통화 중이라는 상황이 설명된다. 그러나 연극 <세븐 씬>에서 묘사하는 남자와 여자의 통화 장면에서는 서로 물리적 거리를 유지하지 않는다. 표현의 클리셰를 부수고, 과감히 서로의 곁을 스쳐 지나가기도, 딸 채원을 통해 물건을 주고받기도 한다. 다만 여기서 지어진 최소한의 '약속'은 서로 시선을 마주하지 않는 것. 이러한 시공간의 중첩을 활용한 장면은 연극 <세븐 씬>에서 다수 등장한다. 무엇보다도 딸 채원은 종종 남자와 여자의 삶에 등장하고, 이를 통해 그 둘의 쉽게 끊어지지 않는 관계를 이어주는 매개체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남자와 여자는 위에서 이야기한 시공간의 중첩을 통한 연출로 같으면서도, 반면에 아예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서로의 다른 삶이 장면마다 교차되면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작품은 인간의 삶을 통째로 무대 위에 올렸다기 보다는, 삶에 있어서의 주요 테마들(직업, 가정, 결혼, 죽음 등)에 나눠서 장면이 진행되고, 따라서 삶이라는 거대한 것의 중요한 파편적 사건들을 무대에 올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딸 채원은 이러한 남녀의 파편들마저도 연결 짓는 실과 바늘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둘의 시공간을 자유롭게 오가는 채원의 모습은 마치 시간여행자 같기도 했다. 순수하고 독특한 관점을 가진 캐릭터로, 극의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은 덤이다.

 

 

예측하지 못했던 삶의 문을 두드릴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이 극은 바로 그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결혼 혹은 출산, 투병, 죽음 같은 사건이 삶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혼을 쉽게 예상하지는 않습니다. 그리하여 이혼은 예측 불가능성을 상징하는 하나의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작품은 이혼 후 30년에 이르는 긴 시간을 다룬다. 그 시간 동안 한 여자와 남자의 삶이 흘러간다. 그들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순간 중 여와 남 각각의 일곱 장면이 무대 위에 펼쳐진다. 그 장면들을 통해 끝나도 끝나지 않은 것들과 초대하지 않았지만 우리의 삶에 도착해 버린 많은 것들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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