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안드로이드의 경계가 희미해진 가까운 미래.
인간인 신분을 속이려는 안드로이드를 색출하려는 집행자 쿠시와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용의자의 심리게임을 다룬 관객 참여형 SF스릴러다.
가까운 미래, 원인을 알 수 없는 감염병의 위협으로 인류는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인류의 노력은 대면과 접촉이 필요한 노동과 생산의 소모성 업무에
안드로이드를 투입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급속한 기술의 가속화로 고도의 지성이
발달한 안드로이드와 기계 몸으로 대체되어가는 인류의 경계는 점점 모호해져만 가는데….
그러던 어느 날, 안드로이드 아스핀이 사회 최 상류층인 얼로너 계급인 'K'를 살해한 혐의로
'멘다키움'에 소환된다. 그곳에서 그녀는 세퍼레이터 일족으로 이루어진 심판단과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감별하는 베테랑 집행관인 쿠시 앞에서 자신은 안드로이드 아스핀이 아닌
살해당한 얼로너 K라고 주장하는데...
과연 그녀는 사회 최상류층인 순수한 인간 얼로너 'k'일까?
아니면 소모품일 뿐인 안드로이드 '아스핀'일까?
공연리뷰 - 양근애(연극평론가)
기술의 발전이 낙관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미래는 종종 영화적 시선에 의해 디스토피아로 그려졌다. 폐허가 된 잿빛 도시 위를 날아다니는 기계, 첨단 문명의 가속화와 대비되는 굶주린 사람들의 이미지 등은 어느새 지금의 현실 속으로도 틈입해 들어와 있다. 최근 활발하게 만들어지는 SF 연극 역시 스페이스 오페라를 펼치기보다 디스토피아에서 길어 올린 ‘인간다움’에 관한 질문 쪽을 향하고 있다. 아마도 도래할 세상의 스펙터클에 대한 기대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미래형 질문이 더 절실한 문제로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프로젝트 밈의 <너를 만난다>가 그려낸 세계와 그 세계를 통한 질문 역시 낯선 것은 아니다. 멸망 직전의 폐허가 있고 인간을 대체하는 안드로이드가 존재하며 혼돈 속에서 길을 찾는 인간이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안드로이드가 인간과 구분되지 않는 공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어쩌면 익숙하다.
그런데 <너를 만난다>에는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감별하는 ‘세퍼레이터’라는 존재가 있다. ‘순수한’ 인간은 아니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다울 필요가 없다’고 믿고 있는 이 존재의 등장은 ‘인간다움’이라는 질문 자체를 파고들게 만든다.
미래 사회를 그려낼 때 필요한 세계관이나 시스템은 미지의 세계를 해독할 관객에게 주어지는 사전정보이자 감각적인 조망의 체계라는 점에서 풍경(landscape)에 빗대어 볼 수 있다. <너를 만난다>는 ‘멘다키움’이라는 시스템으로 그 풍경을 드러낸다. 라틴어로 ‘거짓말, 허위, 날조, 착각, 환상’ 등을 뜻하는 ‘멘다키움’은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감별하고 ‘인간다움’을 유지 순환시키는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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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 속으로 진입하기 위해 관객은 몇 가지 절차를 거쳐야 한다. 먼저 입구에서 온도 체크와 방역용 연무에 노출된다. 곧이어 이머시브 시스템 어플리케이션이 담긴 모바일폰을 받아 접속한다. 그리고 멘다키움 테스트를 통해 자격을 인증받아 지정된 좌석을 안내받는다. 이 절차는 장기화 되는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해 현실 효과를 불러일으키면서 가공된 세계 속으로 진입하는 의식(ritual)의 장벽을 최소화한다. 멘다키움 테스트를 통해 관객은 인간 또는 안드로이드 역할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이때의 인간은 ‘순수한’ 인간인 ‘얼로너’ 계급이 아니라 세퍼레이터다. 이머시브 앱에 안내된 프롤로그에 따르면, 세퍼레이터는 “감염으로 인해 결손된 신체로 태어나, 몸의 일부를 기계몸으로 대체해 나갈 수밖에 없는 대다수의 인간 계층”이다. 그렇다면 얼로너 K의 죽음과, K와 똑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 안드로이드 아스핀 때문에 벌어지는 이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극장 안에 ‘순수한’ 인간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다움이 무엇인지를 묻는 이 연극에 정작 진짜 인간(‘순수한’ 인간)은 등장할 수 없다는 사실은 미래 사회에 인간이 겪게 될 복잡한 문제를 드러내는 듯하다. 말하자면, <너를 만난다>는 인간다움의 자리를 오히려 공백으로 둠으로써 인간이 겪게 될 딜레마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너를 만난다>에 적용된 기술은 관객을 멘다키움이라는 시스템을 ‘바라보는’ 위치에 놓는다. 레이저 파사드는 관객석과 무대를 분리하고 프로젝션 매핑은 얼로너의 비전과 멘다키움의 작동 시스템을 구현함으로써 물리적인 공간의 구조적 한계를 상상적, 미학적으로 뛰어넘는다. 특히 연극의 후반부에 영사되는 ‘비전’은 인간의 눈으로 다 담을 수 없는 인류의 역사와 시간성을 감각적으로 횡단시키는 이미지로 나타났다. 안드로이드 또는 기계를 장착한 인간의 형상을 연기하는 배우의 모습은 관객과의 약속으로 인해 역할로서 인지되지만, 기술의 구현은 감각적으로 인지된다는 점에서 즉각적이다. 멘다키움에서 쿠시의 명령으로 인해 조작되는 시스템, 즉 아스핀/얼로너 K를 가두는 레이저 배리어와 스캐닝 행위, 결과가 뜨는 모니터 등은 관객이 연극 속 세계에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레이저로 분리된 영역에 앉아 있는 관객의 선택이 이미 만들어진 이야기 전개를 따르고 있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관객의 역할은 주어진 질문에 대한 답을 선택하고 쿠시와 아스핀 중 누가 더 인간다운지를 판별하는 일에 한정되어 있다. 즉 관객의 참여는 내러티브에 작동하되, 내러티브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와 같은 진행 방식은 이 연극에서 아스핀이 인간인지 안드로이드를 판단하기 위해 던져진 질문과도 같은 ‘딜레마’를 드러낸다. 필립 K 딕의 소설에서 인간다움을 판별하는 기준은 감정이입 능력의 여부였다. <너를 만난다>에서 관객에게 던져진 질문은 윤리와 책임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선택된 답으로 인간됨을 판별하기 어려운 질문들이었다. 딜레마 자체가 해결을 위한 질문이 아니듯, 연극은 해결이 아니라 또 다른 질문을 향한 사고 실험으로 이동한다. 관객의 선택에 따라 <너를 만난다>의 결말은 달라진다. 그러나 결국 판별 주체와 판별 당하는 자의 위계가 해체되고 멘다키움의 허위가 드러나 시스템이 교란되며, 다시 (비)인간은 ‘나’일지도 모를 ‘너’를 기다리는 상황 앞에 놓인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아직 인간다움의 자리는 공백으로 남아 있다.
단순해보이지만 복잡한 이 연극을 거대하고 심오한 SF의 서막처럼 보고 극장을 나섰다. 멘다키움 테스트에서 또 연극 속에서 열심히 풀었던, 결과가 분석되지 않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중요한 것은 질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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