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사 나운규와 실과 바늘 같은 사이였던 연희전문 출신의 영화인 윤봉춘의 기억을 더듬어 윤봉춘과 나운규의 관계, 영화 아리랑을 만들게 된 경위, 자신들이 살아온 내력을 이야기하면서 윤봉춘은 새삼스럽게 춘사 나운규와 자신의 생애를 돌아본다. 친구로서 인간으로서 동료 영화인으로서 얽혀 있던 젊은 날들을 돌아보며 거침없는 창작의 세계로 비상하려는 예술인의 발목을 잡는 현실적 여건이 삼십여 년이 지난 70년대 중반 현재에도 변한 것이 없음을 깨닫는다.
운규와 마리아의 운명적인 사랑은 참혹하게 결말이 나버리고 절망한 나운규는 자살미수 이후 고향을 떠나 행방불명이 되어버린다. 이후 나운규는 서울로 가서 영화인이 된다. 살뜰하게 행복한 사랑을 누린 적도 없는 운규와 마리아는 각자 다른 삶의 궤적을 그리며 너무나도 비슷하게 파멸적인 생을 살아간다. 운규가 돈이 없어 병을 치료 못할 만큼 영락하여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면 마리아는 삼천에 몸을 파는 창녀가 되었다가 아편에 취해 대동강변에서 꽁꽁 얼어 죽는다.
운규 : 여자야 많았지. 셀 수도 없을 걸, 일본 기생 하고도 살았다...... 그래 봤자 모두 그림자지.. 모두 네 그림자밖에 아냐,
마리아 : 날 데려가 줘, 운규, 또 날 버리지 마.
생의 전반부에서 운명처럼 만나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을 끝까지 간직한 채 젊은 나이로 사라져버린 그들, 부인 있는 남자와의 가망 없는 사랑에 헌신하고 불행한 시대의 그늘에 짓눌려 침몰한 윤 마리아의 파란만장한 일생. 불행한 시대를 배경으로 가장 화사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피었다가 이내 져버린다. 그 사랑이 꽃잎처럼 화사한만큼 그 파멸의 여운은 공연이 끝난 후에도 관객의 눈에 밟혀 가슴을 아프게 한다.
연극 "나운규" (정복근 작, 한태숙)는 춘사 나운규의 예술혼을 형상화한 창작극이다.
극은 두가지 "의문"을 축으로 전개된다. "춘사에게 아리랑은 무엇이었을까"란
요즘 우리의 의문과 "아리랑은 우리 민족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란 춘사 자신의 물음이다.
춘사와는 실과 바늘 같은 사이였던 연희전문 출신의 영화인 윤봉춘의 기억을 더듬어 결국은 하나인 이 두가지 의문을 풀어간다. 춘사에 대한 윤봉춘의 기억은 시간순서대로 전개된다.
민족영화 1호인 "아리랑"(1926년)을 만들어 당대 영화계 중심에 우뚝 섰던 춘사의 모습. 이후 아리랑을 능가하는 작품을 내놓지 못해 좌절 끝에 36년간의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보여준다.
당시의 시대상은 물론 윤마리아와의 운명적인 사랑, 조강지처 조정옥과의 관계 등 춘사의 사생활까지 짚는다.
춘사가 아리랑에 대해 부여했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일제에 의해 빼앗겼던 우리민족의 얼을 일깨워줄 "암호"이며 "내면의 울림"이었음을 극은 보여준다.
작가의 글 – 정복근
요절한 천재의 생애는 늘 관심의 대상이 된다. 남다른 천부적 재능을 지니고 가장 화려하고 빛나 는 인생의 정점에서 사라지는 인물이 드러내는 운명은 그 자체가 이미 극적이기 때문이다. 1902년에 태어나서 1939년에 돌아간 운사 나운규 선생의 일생은 가장 척박했던 시기의 우리 초창기 영화계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영화인으로써 뿐 아니라 고뇌에 시달리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으로 시대를 뛰어넘어 아직도 생생하게 우리에게 기억된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장애가 되는 사회적 조건은 시대마다 표면적인 모습은 달라도 본질에는 다름이 없고 유난히 구속에 예민한 젊은 예술가들에게는 하나의 운명으로 귀결된다. 뛰어난 통찰력과 재능으로 영화예술의 본질을 간파하고 그 사업 성과 미래까지 예측할 수 있었던 춘사 나운규에게 영화 아리랑의 성공이 어떻게 운명적인 장애가 되었던가 들여다보면 너무 이르게 다가온 세속적인 성공이라는 것이 젊은 예술가의 길에 얼마나 모진 가시밭이 될 수 있는지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극적인 생애를 살아가는 친구의 곁에서 조용히 흘러가는 깊은 강처럼 드러나지 않는 평생을 보낸 금원 윤봉춘선생의 생애는 그 확연한 대비로 또 다른 감명을 느끼게 한다. 춘사 나은규에 대한 가장 신뢰할 만한 증언자로 자처하며 오늘 우리가 아는 나운규의 신화를 가꿔온 윤봉춘 선생의 영화예술에 대한 자세는 어린시절을 함께 보내고 임종까지 지켰던 우정과는 또 다른 상반된 입장을 보여주며 아직도 두 분의 첨예한 갈등이 끝나지 않았음을 느끼게 한다. 영화인 일뿐 아니라 무대에서 임신을 시작한 초창기 연극인으로 기억해온 두 분에게 느끼는 존중심이 오랫동안 곱씹은 민요 아리랑의 이미지와 함께 창단 공연 작이 되게 한 것 같다. 공연을 할 때마다 연극은 결국 일종의 제의라는 느낌을 갖게 되는데 창단공연의 경우는 매사 조심스러워서 그 느낌이 더해지는 것 같다.
나운규와 아리랑
한국영화 역사에서 나운규'라는 이름은 지워지지 않는 상징이자 전설이다. 살아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스타였고 죽어서는 신화가 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일생의 열정을 영화에 쏟은 예술가, 영화를 통한 민족운동의 선구자, 미숙한 한국영화의 수준을 예술적 경지로 끌어울린 개척자...
함경북도 회령에서 약재상 집 셋째아들로 태어난 나운규(1902-1937)는 <운영전>(1924)이란 영화에 단역 가마꾼으로 출연하면서 영화인생을 시작했다. 훗날 한국영화계를 풍미한 불세출의 영웅치고는 작고 초라한 출발이었지만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그의 감격은 남달랐다. 친구 김용국에게 보낸 편지는 그때의 감격과 흥분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아무튼 내가 찾던 길. 내 소지를 시험해볼 곳이라야 지금의 조선에서는 이곳뿐이기에 찾아온 것이며 또 내가 항상 동경하는 예술이 하루라도 일찍 우리 민중에게 표현되어 그들로 하여금 감상케 하고 그네들을 웃기고 그네들과 한가지로 울 수 있다면 그 뿐이 아니겠느냐. 어쨌든 나는 오랫동안 헤매던 미로에서 허탈하였다. 그리고 환경이란 서리에 시들었든 내 이상의 싹이 한잎 두잎 피게 될 봄 자연이 점점 가까워 오는 것 같다. 생각하면 얼마나 지루한 겨울이었느냐. 이 길이 이제야 내 앞에 전개된 것이 얼마나 늦었는가를 너도 잘 알 것이다. 나운규의 이상의 길은 지금부터 열리는 것이다.”
<아리랑>(1926)은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원작, 각색, 주연을 겸한 이 영화는 돌풍을 일으키며 전설을 만들었다. 그 스스로도 생각치 못했던 성공 덕분에 나운규는 한국영화의 중심에 우뚝 섰다. 그가 하는 일, 가는 곳마다 눈길과 관심이 따라다녔고 제작자는 어떻게든 그를 영화 속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었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 던 일이었다. 명실상부하게 그는 당대 영화계의 스타였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일 뿐 결코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리랑> 덕분에 영화계의 중심에 설 수 있었지만 그때부터 <아리랑>은 주체하기 어려운 짐으로 둔갑해서는 그를 짓눌렀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를 만들더라도 <아리랑>과 비교되었고 어느 영화도 <아리랑>의 성가를 넘지 못했다. 성공이 가져다 준 짧은 화려함과 그것을 지키기 위한 긴 고난의 콘트라스트는 강열하다. 나운규는 영화 속으로 달려가고 영화는 그를 현실로 돌려보내는 잔혹한 순환은 어떤 영화보다도 극적이다. 36세의 나이로 요절하기까지 모두 27편의 영화에서 원작, 각색, 주연, 감독. 제작을 넘나들며 자신의 꿈을 실었던 그는 <오몽녀>를 감독하는 것으로 영화인 생을 마무리했다. <오몽녀>를 찍을 때 그는 이미 폐결핵으로 생명이 무너지고 있었다. 몇 번이나 쓰러졌다가 의사의 긴급처방을 받고서 정신을 가다듬는 일을 반복할 정도로 그의 건강은 위급했지만 나운규는 ‘레디 고'를 외쳤다. 열정을 넘어 섬짓한 광기가 흐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이 그를 지탱해 주었을까. 목숨을 걸고 작업을 해야 할만큼 영화는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까. 나운규에게 영화는 꿈이자 도피처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살던 세상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식민지 시대의 세상은 답답했고 젊은 열정은 무엇인가를 향해 끓었지만 그것을 달래줄 수 있는 쉼터는 찾기 어려웠다. 자신의 뜻과는 다르게 치러진 혼인, 독립운동을 한다고 만주와 회령을 넘나들며 열정을 불태웠지만 그 때문에 닥친 신변의 위협과 도피 결국은 피하지 못한 2년간의 감옥생활... 암울한 시대의 현실을 달래줄 위안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보였을 때 다가온 영화는 새 세상이자 꿈이며 희망이었다. 영화사에 들어간 직후 친구에게 보낸 편지는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자의 감격을 담은 것이고 <아리랑>은 그를 다른 세상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었다. 배우적인 조건을 갖추지 못했던 신체와 부족했던 학교공부, 배우를 천박한 구경거리로 인식하던 세상의 편견에 대한 콤플렉스와 불만까지도 영화속에서는 더 이상 문제거리가 아니었다. 나운규의 일생은 짧았지만 들여다볼수록 그는 예술가요 광대며 방랑자라는 생각이 든다. 피를 토해가며 ‘레디고'를 외쳤던 것은 영화가 가져다줄 수 있는 꿈과 희망, 위안과 평화, 도피와 자유를 그리워한 자의 절규라고 믿는다.
그런 나운규를 죽어서도 지켜준 인물은 평생친구 윤봉춘이었다. 나운규의 열정과 집념, 불안과 흔들림까지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그는 비범했던 친구의 그림자를 세상에 남겨주었다. ‘나운규 신화'는 윤봉춘의 증언과 기록이 만든 또 다른 나운규이기도 하다. 어쩌면 윤봉춘이 꿈꾸었던 자신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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