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이철희 재창작 '닭쿠우스'

clint 2022. 10. 19. 08:58

 

충남 홍성의 낡은 상가에 있는 무료한 정신병원. 그곳에 손가락으로 닭 6마리의 눈을 찌른 소년이 온다. 의사인 다이다이 박사는 소년이 저지른 잔혹한 행위의 원인을 찾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추적한다. 다이다이는 소년의 치료를 위해, 그의 엄마, 아빠, 동네 사람 등 주위를 추적하지만 원인이 밝혀지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자신이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뭔가 잘못되어버린 이 상황, 일상의 파괴를 막기 위해 다이다이는 이 연극을 망쳐버리기로 한다. 그러나 소년 알란은 다이다이의 저항을 무력화한다. 정상을 향한 저항Crazy, A급에 대한 저항은 B, 그리고 에쿠우스로부터의 저항은 닭쿠우스. 모든 것의 모든 것을 향한 저항을 통해 <닭쿠우스>는 세상을 비튼다. ‘미친 삐끕 킷치’(Crazy, B+, Kitsch). 이것이 연극 <닭쿠우스>가 설정한 방향인데, 이 연극은 연극이 주는 무게감을 파괴하는 것으로 키치를 정의한다. ‘충남시리즈답게 배우들이 구사하는 유려한 충청남도 방언은 번역극의 무거움을 잊게 하고, 약간의 틈이라도 보이면, 바로 치고 들어오는 B급 유머는 충남으로 향하는 KTX의 속도다.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닭쿠우스>는 피터 셰퍼의 <에쿠우스>를 비튼다. 이 작품들에는 각색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어울리는 것은 뒤틀기, 비틀기, 꼬집어 뒤집기, 벗기기, 찢어버리기, 뭉쳐서 던져버리기, 구멍내기다. 말의 먹이를 빼앗아 던진 곳은 양계장, 무료한 정신병원이다. 그곳의 원장 다이다이와 닭 여섯 마리의 눈을 찌를 소년 알란이 B, 킷치의 세계로 안내한다.

저항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내는 것이 비틀기라면, 스스로를 의심하며 자신을 비트는 행위는 나를 확장시키고, 새로운 나를 만나게 한다. 연극에서 닭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닭의 삶은 레일 위에서 시작되어 선택권 없이 끌려만 간다. 저항하기엔 벗어날 수 없는 조건이 너무나 많다. 날개가 있지만 날 수 없는 닭과 부조리를 깨달아도 변화를 선택하기 어려워하는 인간의 모습을 어찌 닮지 않았다 할 수 있을까. <닭쿠우스>는 인간의 딜레마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캐릭터들에게 종종 배우 자신을 불러내고, 작품 안으로 연극을 끌어들인다. 작품이라는 에서 연극이라는 껍데기를 뚫고 나오는 시도는 관객을 <에쿠우스>라는 원작의 일루젼에서 해방시킨다. 마치 충남 사투리가 그러하듯이. 무대라는 환상 공간에 존재하는 인물들은 느닷없이 연기를 직업 삼은 사람으로서의 존재를 드러낸다. 두 세계의 공존이면서, 두 세계의 충돌인 이 연극에서 유일한 진실은 무대에서 객석을,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 인간이라는 복잡다단한 세계들의 흔들리는 불완전함뿐. 좁은 구멍 안으로 들여다본 이가 나인가? 들여다보는 이가 나인가?

 

 

 

 

이철희 작가가 남긴 한 마디를 충남 방언으로 바꿔 여기에 옮겨본다.

저항의 대상은 거대한 골리앗이 아닌, 연약하고 지독히 변하지 않는 바로 나 자신이어유.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면 적어도 직면해 보기라도 해봐유, 아님, 글쎄유. 순응하시든가유.” 

그리고 덧붙이는 그의 메시지

“(이 작품은) 당신의 머리를 헤집어 놓는 게 아니라 바로 잡아 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