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공상임 '1699도화선'

clint 2022. 10. 19. 10:09

 

 

<1699도화선>은 청대 초기의 극작가 공상임의 대표 작인 도화선(桃花扇)을 저본으로, 중국국가화극원의 연출가 티엔친신이 각색하고 연출하여 2006년 초연된 작품이다. 명 말 청 초, 젊은 문인 후방역과 당대의 가인 이향군의 사랑이야기를 통해 명청 교체기 국가 흥망의 역사를 담아낸 장편 희곡이다. <모란정(牡丹亭)>, <장생전(長生殿)>과 함께 중국 전통극 가운데 가장 역사가 오래고 세련된 고급 무대예술인 곤곡(崑曲)3대 레퍼토리로 꼽힌다.

중국연극에 관심이 있거나, 본 총서를 일람하였다면, <1699 도화선>의 연출가인 티엔친신이 한국과 인연이 깊은 연출가임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총서에는 국내에서 공연되었던 그녀의 <생사장>, <붉은 장미 흰 장미> 등이 소개되어 있다. 그러한 교류의 맥락에서 티엔친신의 초청으로, 손진책 선생님과 함께 이 작품 제작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작품의 제작 과정과 성과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기에, 중국에서 전통 레퍼토리가 어떠한 양상으로 제작되는지에 대한 밀착 이해가 가능했다는 점에서 큰 공부가 되었던 작업이었다. 마침 2006년 가을 한국에서 개최된 제13회 베세토연극제에 참가하여, 106-7일 국립극장, 11-12일 의정부예술의전당에서 한국 관객과도 만났다.

 

 

작가 공상임(1648-1718)은 산동 곡부 사람으로 공자의 64대손이다. 자는 빙지, 계중, 호는 동당 또는 운정산인, 당호는 개안당이다. 부친 공정번은 명말 향시에 응시하여 거인이 되었고, 청대에는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역시 은거하던 부친의 벗 가웅총(賈應寵, 1594-1676)이 공상임을 매우 아꼈다고 한다. 공상임은 31(1678)에 향시에서 낙방하고 고향 곡부에서 <도화선> 초고를 완성하였다. 1684년 강희제가 곡부의 공자를 모신 문묘에 참배할 때 공자의 후손으로서 유가 경전을 강의하고 문묘의 기물에 대해 설명한 것을 인연으로, 국자감박사에 제수되어 북경에서 강의하였다. 이듬해에 상관을 따라 강소지역으로 내려가 치수 사업에 힘쓰다가, 40세에 <도화선> 재고를 완성하고, 43세에 북경으로 돌아와 국자감박사로 재직했다. 48세에 호부주사가 되었고, 52(1699)에 드디어 <도화선> 3고를 완성했다. 53세에 호부원외랑으로 승진하였으나, 곧 면직되었다. 학자들은 <도화선> 창작 때문이리라고 추측한다. 2년 뒤 귀향하여 은둔하다가 71(1718)에 생을 마쳤다.

작품으로는 희곡 2편과 시문집들이 있다. 30대 초반에 장편 희곡 <도화선>을 쓰기 시작하여, 10년마다 새로 고쳐 쓰며 50세가 넘어서야 완성한 것이 16996월의 일이다.

 

 

 

<도화선>은 명 말에 나라가 깨어지고 가족이 흩어지는 국가 흥망의 사회상을 배경으로 실존 인물인 공자 후방역과 기생이 향군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동시대 역사극이다.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 시기부터 남명 복왕 홍광제의 죽음까지, 1643년에서 1645년까지의 일을 주로 담고 있다. 명말 숭정제 시기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데, 그 중 이자성이 농민군을 이끌고 북경을 함락시켜 숭정제가 목을 매어 자결한다. 간신 마사영과 완대성 등이 복왕을 옹립하여 남명 정권을 세운 후, 사가(可法)을 양주로 내보내고 권력을 차지한다. 그러나 좌량옥의 반란과 청군의 양주 함락으로 결국 남경까지 함락되고, 사가법까지 자결하면서 결국 1661년 남명도 망하고 만다.

작가는 부패한 정치와 간신배들의 행태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제기하면서, 인생의 부귀영화나 남녀간의 사랑도 모두 뜬구름 같은 것이라는 각성을 촉구한다. 공상임이 작품을 쓰기 시작한 때는 남명이 망한 지 이십 년도 채 되지 않아, 당시 혼돈을 경험한 부친 연배 유민들에게는 생생한 기억이 존재했을 것이다. 1699년 완성본이 나왔을 때에도, 당시의 반응들을 보면, 이민족의 지배하에 망국의 한을 지니고 있던 한족 지식인들이 이 희곡 또는 공연을 통해 유민의식이 분출되고 공유되는 경험을 하게 되면서, 많이 공감했던 것 같다. 사실 청대 초기에는 검열도 만만치 않아 문자옥이 많았으므로, <도화선>에서는 청에 대한 비판보다 오히려 명에 대한 비판이 강하다. 심지어 강희제 의 성세를 극구 치하하기도 한다. <도화선>은 과거의 잘못을 거울삼고 교훈 삼고자 한 역사극이지만, 그러한 감회를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작품이었기에 더욱 당대 문인들 사이에 공연되고 회자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주인공 후방역은 명 말 하남 귀덕인으로, 자가 조종(朝宗)이다. 동림당의 핵심인물이자 호부상서를 지낸 후순의 아들로, 복사 문인이다. 부자가 모두 당시의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이었다. 그와 함께 등장하는 오응기와 진정혜들도 모두 복사 문인으로 마사영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향군과 이정려들은 남경 진회하의 명기들이며, 소곤생, 유경정은 물론, 정계지와 정타랑 등은 당시 유명 예인들이다. 물론 실제의 후방역은 후에 청조에서 시행한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변절의 오명을 남기고 165437세로 사망하였으나, 당시 '고문 삼대 가'의 하나로 꼽히는 문장가였다. 이향군의 전기인 <이희전(李姬傳)>을 남겼다. 공상임은 극중에서도 이향군의 성격과 결기가 후방역보다 더 강한 것으로 그리고 있다. 작품 결말에서는 이들이 모두 도가에 귀의하는 것으로 그려지나,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청패>에서 <면향>까지는 명기(名妓) 이향군과 복사 문인 후방역의 만남과 결합의 과정을 담고 있다. 후방역은 향군과 만나 곧 사랑에 빠지고, 양용우의 주선으로 혼인이 성사된다. 후방역은 사랑의 징표로 주었던 비단부채에 시를 적으니, 하얀 부채가 시부채로 변하며 더욱 확실한 사랑의 상징물이 된다.

<각렴>에서 <사원>은 후방역과 이향군이 헤어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향군이 양용우로부터 혼수 비용의 출처가 완대성임을 듣는 순간, 혼수를 모두 돌려주라며 역당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표명한다. 후방역은 향군의 진면목을 알게 되어 사랑이 깊어지나, 체면이 깎인 완대성은 후방역에게 좌량옥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씌워 잡아들이려 한다. 후방역은 어쩔 수 없이 향군과 이별하고 사가법 장군 휘하로 피신한다.

<곡주>에서 <서진>까지는 헤어져서 시련을 겪는 과정을 통해 두 사람의 사랑이 더욱 승화되나, 명의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후방역은 사가법의 군영으로 가서 그를 보좌하고, 이향군은 마사영, 완대성 등 권간들의 세도와 강압에 저항하며 남명 정권의 안팎을 그려낸다. 향군은 전대감에게 첩으로 팔려 갈 위기에 놓이자 필사적으로 반항하다 바닥에 머리를 찧고 혼절하여, 기생 어미인 이정려가 대신 전대감의 첩으로 들어가 위기를 모면한다. 한편 양용우가 향군이 머리를 부딪힐 때 '시선'에 튄 혈흔으로 그린 복사꽃으로 인해 도화선이 탄생하고, 이는 소곤생을 통해 후방역에게 전해진다. 그 후 후방역이 남경으로 돌아오지만, 향군은 이미 배우로 뽑혀 궁에 들어가고 없다. 정치 집단 내부로 들어간 향군을 통해, 황제와 마사영, 완대성 등 권력을 쥔 간신들의 향락 및 부패로 인한 남명의 혼란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티엔친신의 <1699도화선>(2006)

1699년 세상에 나온 <도화선>은 나오자마자 북경의 종이값이 올랐다고 할 만큼 인기가 좋았다. 여기저기서 빌려다가 베끼기에 바빴고, 이듬해부터는 공연이 끊이지 않았으며, 1708년에는 출판까지 하게 되었다. 당시 북경에서는 곡이 대세로, 아직 경극은 생기기도 전이었다. 그 후 각지에서 다양한 극종으로 수용되어, 20세기에 들어서만도 오우양위첸의 경극본 과 현대극본을 비롯하여 영화대본, 계극본, 초극본, 월극본, 상극본, 민극본, 북곤본, 남곤본, 황매희본 등이 나왔다. 중국은 지역마다의 지방희가 각기 부르는 노래가 달라서 그 지방희로 공연하려면 가사도 바뀌어야 하므로, 극종마다 새로운 각색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대에는 무엇보다 곤곡으로 각지에서 공연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21세 기초에 나온 <1699도화선> 역시 <도화선> 곤곡 공연본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왜 특별히 이 공연을 거론하는 것일까? 2001''이 전승 위기에 처한 중국 문화유산 제1호로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1699도화선>이 중국의 국가적 프로젝트로 다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곤곡'이 지정된 다음 해부터 대만의 소설가 바이셴융(1937-)이 먼저 곤곡 부흥의 기치를 들고 거대한 제작비를 들여 '양안 세 지역' , 중국, 대만, 홍콩 세 지역 예술가와 문사들이 참여하는 공동작업으로 <청춘판 모란정>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소주곤극원(지금은 중국곤곡극원으로 바뀌었다)을 중심으로 교육과 공연이 진행되었다. 위기 극종으로 지정된 경우, 전승이 가장 큰 의무사항이다. 20세기 곤극 전습소에서 전자 항렬 예인들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장지칭(1939-2022) 여사와 왕스위(1941) 선생을 큰 스승으로 모시고, 소주곤극원의 대표 배우인 왕팡(, 1963-) 등이 당시 20세 전후의 젊은 배우인 선평잉, 위쥬린 등을 선발하여 전통 방식으로 1:1 도제 교육을 통해 정통 곤곡 <모란정>을 전수하고, 이들을 내세워 '청춘판'이라 이름한 것이다. 바이셴용, 화웨이, 장수샹, 신이원 등이 함께 원전에 충실하되 짜임새 있게 대본정리하였고, 왕스위, 웡궈성이 공동 연출을 맡았다. 모든 의상과 소도구, 무대가 지극히 화려하고 세련된 명청 고급문화의 정수를 담고, '사의 미학 정신을 구현하여, 상중하 3본으로 3일간 공연되는 <청춘판 모란정> 버전을 탄생시켰다. 1993년 강소성극원의 내한 공연 때에 장지칭 여사를 필두로 <모란정><심몽>, <이혼> 단락이 공연된 적이 있고, 2016년 내한한 왕팡 여사도 <모란정><유원>, <경몽>, <심 몽> 단락을 공연했었다. 모두 쉰 중반의 나이에 16세의 소녀보다 더 봄을 타는 여린 감성의 소녀를 아름답게 보여주었다. 곤곡은 단순히 외모를 보는 것이 아니라 원숙한 창과 연기, 그리고 그것을 통해 표현된 정신을 감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매이란 광도 늦게까지 두여랑을 연기했었다. 그러나 <청춘판 모란정>은 그러한 과거의 관습을 떠나 새로운 포장으로 젊은 곤곡 스타를 만들어냈다. 20044월에 초연되었고, 엄청난 관심을 불러 모으며, 2007년에 이미 100회 공연을 올렸다. 이들의 홍보 전략은 곤곡이 명청대 사대부 지식인들의 애호를 받으며 문학과 음악과 연극이 함께 어울려 중국 최고의 무대예술로 자리잡았던 점에 착안하여, 곤곡을 새로운 중국 지식인 문화의 아이콘으로 만들고자 한 것이었다. 양안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청춘판 모란정>의 대성공은 중국으로서도 환영할 일이었다. 다만, 그 창작 주체가 대만이라는 점이 다소 불편했던 것 같다. 이런 이유로 기획된 것이 중국이 주체가 되어 제작한 곤곡 <1699도화선>이다. 우선, 이 국가적 프로젝트를 맡을 주체로 그동안 중국 곤곡의 정통을 잇는 본산으로 자부해왔던 강소성 곤극원이 선정되었다. 당시 중국에는 남경에 강소성곤극원, 상해에 상해곤극원, 소주에 소주곤극원, 북경에 북방곤극원, 항주에 절강성곤극원, 침주에 호남성곤극단, 온주에 영가곡전습소의 7개 극단이 있었다(후에 곤산에 도 곤산곤극원이 생겼다). 그중 20세기초 곤극전습소의 전통을 잇고 풍부한 인적 자원과 공연 경험을 지닌 강소성곤극원이 선정된 것은 당연했다. 그들에게는 소주곤극원의 <청춘판 모란정>으로 인해, 곤극 대표 극단으로서 손상된 위신을 만회할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또 다른 선정 이유는 당시 중국이 그간 국공립 기관이었던 예술단체들을 기업으로 전환하는 문화예술 산업화 정책을 강소성에서 먼저 진행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래서 강소 성곤극원 등 강소성의 여러 예술단체를 통합하여 강소성연예집 단유한공사를 만들었고, 문화부가 아닌 선전부가 예산을 투입하였다. 국가 정책이 이 프로젝트를 통해 실효를 거두기를 바랐던 것 같다. 이러한 제작 조건은 무대에 화려함을 더하였다. 예를 들어 의상도 모두 특별 제작한 소주 실크에 유명한 소주 손수를 놓아 제작하였고, 무대 제작에도 큰 투자가 가능했다.

둘째로, 레퍼토리 선택에서 곤곡 3대 레퍼토리 중 <장생전><모란정>을 잇는 낭만적인 작품인데다, 제왕 후비의 이야기라 사회주의 중국의 대표 레퍼토리로 내세우기에는 불편한 점이 있다. 그래서 역사적 교훈을 담은 <도화선>이 채택되었다. 게다가 <도화선>의 배경이 남경이어서 남경 소재 강소성곤극원의 레퍼토리로 삼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것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미 다양한 <도화선>의 각색정리본들이 있었으나, <청춘판 모 란정>과 필적할 만한 새로운 시도들이 필요했고, 그 장단점을 보완하는 기획이 필요했다.

셋째로, 바이셴의 양안 세 지역, 즉 중국 대만 홍콩의 참여는 '문화로 하나 되는 중국'을 콘셉트로 삼은 기획이었다. 따라서 이를 뛰어넘는 기획 콘셉트가 필요했고, 이에 제작진에 한중일 예술가들이 참여하는 국제적 프로젝트로 기획되었다. 국가화 극원 상임연출가인 티엔친신이 총연출을 맡았고, 그의 파트너인 리둥과 라오샹이 기획을 맡았다. 한국에서는 손진책 선생이 예술 고문으로, 본인은 남경대 둥젠(1936-2019) 선생과 함께 학술 고문으로 참여했다. 장지칭 여사가 곤곡 예술 고문, 남경 출신으로 대만의 유명 작가인 위광중 (1928-2017) 선생이 문학 고문, 일본의 나가오카 세이 코우(長成貢, 1961- )가 음악 쪽에 참여했다. 무대와 조명에 샤오리허, 의상에 모샤오민 등 해외파들이 참여하여 최고의 기술을 동원한 세련된 무대를 만들었다. 곤곡에 가장 세련된 동아시아의 전통 무대예술로의 가치를 부여하려는 기획이었다.

넷째로, 위기 극종은 그 전승이 첫째 목표이므로,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역시 20세 전후의 젊은 인재를 선발하고 강소성곤극원의 매화상 수상자들을 비롯한 최고의 배우들이 도제 교육을 진행했다. 당시 선발된 젊은 인재들 가운데, 후방역 역을 맡았던 스샤밍이 지금 강소성곤 극원원장을 맡고 있고, 이향군 역을 맡았던 산원은 2019년 제29회 매화장 수상자로 이제 강소성극원의 대표 배우가 되었다.

다섯째로, <청춘판모란>이 전통의 계승을 내세웠다면, <1699 도화선>은 전통의 정수를 계승하는 동시에 일정 정도 현대 무대의 중국 전통 예술로 거듭나고자 하였다. <청춘판모란정은 본래 55단락을 29단락으로 정리하였으나, 여전히 3부로 구성되어 사흘 동안 공연하는 방식이었다. 그러한 길이 또한 관람용으로 는 부담스러웠으므로, <1699 도화선>44단락을 6단락으로 축약하여 하룻저녁 공연 분량으로 만들었다. 본래 중국 전통극은 장편 희곡을 며칠에 걸쳐 다 공연하는 방식(全本)과 단락별로 따서 독립적으로 공연하는 방식이 있었는데, 근대에 들어서는 서구적 극장 관람 방식이 도입됨과 동시에 서사의 완정성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면서 원래의 디테일들을 덜어내고 하룻 저녁에 전체 내용을 다 담는 축약방식이 유행하였다. 이렇게 제작된 <1699도화선>은 최고의 스승으로부터 특별 전수받은 젊은 배우들을 통해 우아한 품위와 격조, 화려함을 갖춘 곤곡 무대, 곤곡의 본질을 계승하면서도 현대적인 무대로 거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