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김정수 재창작 '셰익스피어 앤 해서웨이'

clint 2022. 10. 19. 09:04

 

셰익스피어 탄생 400주년을 맞아 전주스타일로 재창작된 작품이다.

철학자 햄릿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항상 우유부단한 행동을 한다. 주변 사람들은 남자답지 못한 모습에 수군거리지만, 사실 햄릿은 다른 사람들과 사유체계가 달랐을 뿐이다. 실존적 문제에 고민을 끝까지 파헤쳐보려는 한 인간의 처절한 싸움을 통해 인간의 실체를 들여다보려 하는데...

 

-이야기는 셰익스피어가 사망하기 몇 년 전, 런던으로부터 고향 스트랫퍼드로 돌아오고 난 이후의 상황이다. 관객은 셰익스피어와 그의 부인 해서웨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는 형식이지만, 그들이 회상이나 생각은 필요에 따라 다른 배우들에 의해 재현된다. 기본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중심이 되지만 사용되는 대사는 상당 부분 셰익스피어의 여러 대표적 작품에서 차용되거나 변용된다. 2016년은 셰익스피어 사망 400주년이다.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에 보내는 무한한 찬사와 경의를 담고 있다. 기본적으로 셰익스피어에 대해 평소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을 상상해보고자 만들어졌으며, 특히 평범한 가장이자 아버지로서의 셰익스피어는 어땠을까, 부부애는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을 통해 인간적인 셰익스피어를 만나보고자 했다.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구구한 주장들

셰익스피어에 관해 논할 때, 심심찮게 따라붙는 묘한 얘기가 하나 있다. 바로 셰익스피어의 '정체'를 둘러싼 구구한 추측이다. 물론 오늘날 셰익스피어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극작가 겸 배우가 16세기 중후반에 영국에서 살았다는, 그리고 오늘날 전해지는 유명한 희곡 및 소네트의 작가라는 데에 대부분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사실은 당대의 다른 인물의 필명에 불과하다는 식의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끈질기게 떠돌아다녔다. 어째서일까? 한편으로는 앞에서 말했듯이 셰익스피어에 관해 오늘날 우리가 아는 바가 극히 적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막대한 명성을 생각해 보면 셰익스피어에 대한 기록이 그토록 드물다는 것이야말로 정말 수수께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16세기까지만 해도 영국 내에서는 지금처럼 체계적인 기록 보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적으로 말해 우리는 셰익스피어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당대의 다른 저명한 극작가나 그들의 희곡에 관해서도 상당 부분을 '모르고' 있다. 즉 셰익스피어만 예외는 아니라는 뜻이다. 셰익스피어 전문가인 스탠리 웰스는 셰익스피어의 '진짜 정체'를 둘러싼 구구한 주장들이 하나같이 속물근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따끔하게 지적한다. 즉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결코 대단한 이력이나 학력을 지니지 못한 시골 출신의 일개 극작가가 그런 걸작을 줄줄이 써냈다고는 믿을 수 없다는 오만함이 그 배경에 깔려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셰익스피어만 아니라면 누구라도 좋다"는 마음가짐으로 당대의 유명한 지식인이나 명사 가운데서 '천재 희곡작가'의 위상에 더 잘 어울릴 법한 인물을 물색한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가공의 인물이고, 그 실체는 동시대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나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라는 주장도 있지만, 전문가들은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프랜시스 베이컨 가설'19세기에 미국의 델리아 베이컨이란 여성이 제기해서 유명해졌다. 십중팔구 본인의 성()'베이권'이라는 점이 이유가 아니었을까. 그녀는 프랜시스 베이컨이 '진짜' 셰익스피어였다는 가설을 내놓은 다음, 거기 어울리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물론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다"라는 근거 없는 주장은 이후 1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고 있다. 내친김에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라는 악명 높은 발언에 관해서도 알아보자. 흔히 제국주의적 망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이 말의 원래 맥락은 이랬다. "만일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 잉글랜드인을 보고 인도와 셰익스피어 둘 중 어느 것을 포기하겠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도야 있든 없든 상관없으나, 셰익스피어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입니다! 어쨌든 인도 제국은 언젠가는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 우리는 셰익스피어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박상익 옮김)

 

[영웅숭배론]에 나오는 토머스 칼라일의 이 말은 인도나 인도인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경제적 가치'(영국의 식민지인 인도)보다는 '정신적 가치'(셰익스피어)가 더 중요하다는 뜻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물론 인도와 영국의 과거사를 생각해 보면 오해의 여지가 있는 표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칼라일의 본의를 왜곡해서는 곤란하리라.

스탠리 웰스는 오늘날 셰익스피어가 지닌 가치를 이렇게 말한다. "셰익스피어를 좋아할 도덕적 의무는 없으며,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전 세계의 사람들 수백만 명은 그에 관하여 들어본 적도 없다. 하지만(...) 그를 전적으로 피하기는 어렵다. 영어에는 그의 작품들에서 유래하거나 관계있는 표현들이 가득 스며 있다. 모든 세대와 모든 장르의 작가와 예술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셰익스피어는 분명 수백만 사람들에게 심미적인 즐거움이고 지적인 자극물이다. 그를 물리칠 길이 없다. 뭐라고 할까. 그는 수도관 속을 흐르는 물 같은 존재다. 수도관은 닳아 버릴지 모르지만, 물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이종인 옮김)

 

 

작가의 글 김정수 (전주대학교 공연엔터테인먼트학과)

올해는 셰익스피어 서거 4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사실 400주년이라 해서 제가 나서서 뭔가를 해야 할 의무도 그런 능력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짧은 재주로나마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작년 일년 런던생활에 대한 의무감 때문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을 오가며 셰익스피어 연극도 보고, 극장이 보이는 템즈강변에서 술 마시던 사람으로서의 작은 책임감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는 셰익스피어가 사망하기 몇 년 전, 런던으로부터 고향 스트랫퍼드로 돌아오고 난 이후의 상황입니다. 셰익스피어와 그의 부인 해서웨이의 대화를 중심으로 두고, 그들의 회상이나 생각이 필요에 따라 다른 배우들에 의해 재현되는 구조를 취했습니다. 대부분 픽션이지만 장면에 따라 셰익스피어의 여러 대표적 작품에서 차용한 대사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에 보내는 무한한 찬사와 경의를 담고자 했습니다. 사실 셰익스피어의 생애는 그의 작품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평소 잘 알려져있지 않은 부분을 상상해보고자 하는 것이 이 작품 창작의 출발점이며, 특히 평범한 가장이자 아버지로서의 셰익스피어는 어땠을까, 부부애는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 속에, 상상 속의 인간적인 셰익스피어를 만나보고자 했습니다. 선뜻 연출로 나서서 수고해주신 류경호 교수님과 창작극회 대표님, 그리고 출연진, 스텝진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세계와 그의 말년을 추억하며... 연출 류경호

 

셰익 스피어의 작품들은 그동안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재공연하는 성과와 아울러 수많은 이들과 함께 재해석 되거나 각색 공연되는 연극의 교과서와도 같은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때를 기하여 창작극회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한꺼번에 감상하고 그의 말년 잘 알려지지 않은 생활의 기록 들을 수합하여 나름의 연극으로 꾸미보기로 했다. 그 작품이 바로 '셰익스피어 앤 해서웨이'이다 이 작품은 전주대학교 공연엔터테인먼트학과 김정수 교수님께서 작년 한 해 동안 영국에 거주하면서 모았던 역사적 자료와 작가적 상상력으로 써낸 각고의 결실이다. 이 작품은 역사적으로 셰익스피어 관련 연구나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와전된 이야기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지위 여부를 놓고 하나 공연예술계에서 논란이 되어 왔던 기록들을 토대로 유추한 것이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그의 작품들을 고루 음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특히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가 말년에 그의 고향 스트랫퍼드에 돌아와 부인 앤 해서웨이와 함께 안식을 취하며 제대로 된 결혼 생활을 할 수 없었던 상황에 대하여 술회하는 형식으로 공연을 풀어나간다. 이 작품은 공연을 구상하고 무대화하는데 있어서 많은 고심과 배우들과의 협의를 거쳐 국내 초연 창작희곡으로 재탄생한 셈이다. 어찌보면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가져온 명대사와 함께하는 번역극이면서도 창작 희곡 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 작품의 줄거리는 세익스피어와 그의 부인에 관한한 여러 가지 억측과 그의 왜곡된 삶에 대한 이해가 주류를 이룬다. 참으로 셰익스피어를 이해한다는 것이 상상하기 힘든 내용이 될 수도 있으나 오히려 소탈하기 그지없는 인간 셰익스피어를 그리며 이 작품을 준비해 왔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