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연에 대한 일본 페스강의 반응을 중심으로 -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장원재
한국기독공보가 초청하고 서울 YMCA가 주관하여 서울 문예회관 대극장과 속초 문화회관에서 막을 올리는 <아, 제암리여!> (이반 작 / 우치다 토루 연출)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21세기 한일 문화 교류의 전범(典範)이라 할만하다. 3·1운동 당시 마을 주민 중의 여럿이 시위운동에 적극참여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이 양민들을 한 교회에 감금한 뒤 그대로 불을 질러 엄청난 사상자를 낸 이른바 '제암리 사건을 극화한 이 연극은, 연극의 내용은 물론, 기획에서 공연에 이르는 제작의 전 과정이 미래지향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일본의 기독교 연극인들은 ‘진정한 사과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회’가 없이는 진정한 한일관계의 재정립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 같은 사죄의 뜻을 연극으로 제작하여 한국의 관객들에게 전달하기로 한 것이다. 이 공연의 총 기획자이자 각색자인 다카도 가나메(극작가 일본기독교단 출판국장 대행)는 작년 2월 <그리스도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인은 한국을 침략하여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겼다. 이것은 일본인의 원죄다. 한국민들에게 속죄하고, 나아가 남북통일에도 미력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공연을 기획하였다' 라며 제작 의도를 분명히 하였다.
일본 연극인들의 이 같은 의도는 작년 3월의 동경 초연 때 이미 명징하게 드러난 바 있다. (일본어 제목은 <총검과 처용의 춤>.) 무엇보다도, 그들은 개막날짜를 3월 1일로 못 박고, 3·1 독립운동 81주년 기념 공연이라는 명패를 내걸었다. 이 공연이 단순한 예술 행위가 아니고, 역사의 연장선상에 위치한 참회의 행동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던 것이다. 연극 평론가 사토 야스히라는 <데아도로(씨어터)> 2000년 5월호에 발표한 평문 ‘사건과 거리’에서 ‘제작진의 이 같은 의도를 정확히 인지했다고’ 밝히고, 3·1운동은 피압박 민족의 당연한 반발이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상자 750명, 부상자 15,690명, 검거자 46,948명, 소실 및 전파가옥이 765 동(이상 총독부 공식발표 자료)에 이른 일본인의 대폭력, 야만적 행동을 어찌 용서할 수 있겠는가. 제암리 사건은 베트남 손미마을의 대학살을 능가하는 국제적 범죄'라고 명기하였다. <아, 제암리여!> 제작팀의 의도는, 그들이 동경 초연의 공연장을 간다에 위치한 재일 한인 YMCA로 결정한 데서도 뚜렷하게 읽힌다. 그곳은 1919년 2월 8일 일군의 한국인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여 3·1 운동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2·8 독립선언'의 바로 그 현장이다. 일본 언론이 작품의 배경을 설명하며 3·1 운동은 물론, 2·8 독립선언까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도록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것이다. 쓰루미 대학교수 이자 연극 평론가인 미즈다니 하치야는 이 점과 관련, <복음의 세계> 2000년 4월호에 발표한 비평문 용서와 위안과 화해를 위한 기억장치에서 '2·8 독립선언, 3·1 운동, 4월 5일의 제암리 사건에 이르기까지, 사실에서 사실로 이어지는 연극의 내용을 접하고 역사적 중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 연극이 일본 언론의 관심을 끈 까닭은 무엇보다도 '한국인은 선하고 일본인은 악하다' 라고 하는 도식적 구성에서 벗어나 역사적 사건들을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조명하려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극작가 이반은 사토 야스히라와의 인터뷰에서 '관객이 역사적 사실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객관적 시점에서 사건에 접근할 수 있도록 의도하였다'고 작의를 밝혀 놓았다. 이성에 호소하는 방법을 통하여 일본 관객들에게 다가가자는 것이 이반의 의도였다면, 그 의도는 아래의 평문들이 증거하는 것처럼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미즈다니 하치야는 감정적으로 흐르기 쉬운 소재인데도 '등장인물들이 극중극을 하는 도중, 옛 사건을 회상하면 감정적으로 되어버린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이 연극에서 가장 감정이 고조되는 부분일 정도로 연극은 시종 자제력을 잃지 않음을 지적하고, 다양한 시점, 다양한 견해를 지닌 배우들을 등장시키며, 그들이 극중극을 공연하지 않을 때는 여러 가지 논의를 하며 사건의 실체에 차분히 접근하도록 한 작가의 테크닉이 돋보인다. 라고 평했다. 문예 평론가인 미츠에다 레이쵸는 <그리스도 신문> 2000년 6월 20일자 문화면에 발표한 글 '분노를 포함하는 용서의 춤' 에서 작가는 사건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관객들에게 객관적 시점에서, 사건을 고찰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연극적 장치는 극중극과 증언이 혼합된 2단 구성이다' 라며 미즈다니의 견해에 공감을 표시하였다. 사토 야스히라는 '학살을 직접 묘사하지 않고 극중극으로 처리한 점이 (가해자인) 일본인들에게는 더 큰 울림을 낳는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일본의 평론가들이 다소 아쉬움을 표현한 대목은 작품 말미에서 전동례 할머니가 추는 처용무 장면이다. 미츠에다 레이죠는 '적색과 백색의 이미지, 우아함과 익살스러움까지 어우러진 처용무가 그 자체로 훌륭한 춤이기는 하지만, 처용무가 나오는 장면에서 무대의 분위기가 급전직하 하는 것을 느꼈다'고 비판했고 사토 야스히라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처용 설화를 소개한 뒤 '처용무의 전승지에서는 이해가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일본인에게는 이해가 쉽지 않은 대목'이라고 했다. 이 두 평자의 견해는 일견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두 평자는 작가 이반이 묻어둔 사금파리 하나를 발굴하지 못했다. 일본의 평론가들은 전동례 할머니의 처용무를 모든 것을 감싸 안고 초월하는 용서의 춤'으로 해석하였다. 이 지점이 원작자와 비평가의 의견이 갈라지는 대목이다. 이반에게 있어서 중요한 점은, 역사적 사실은 쉽게 잊혀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제암리 사건으로 시아버지와 남편을 잃은 실존인물 전동례는 사건이 자행된 시간인 화요일 오후 두시가 되면 수십 년을 한결같이 교회당에 나와 기도를 드리면서도, 70년이 지나도록 학살자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이반이 굳이 처용무를 끌어다 대미를 장식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역신이 과오를 인정하고 처용에게 사과했던 것처럼, 무엇보다도 진정한 사죄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을 그는 작가적 입장에서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역신이여, 나와라!’ 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동례의 처용무는 일본 평론가들의 지적대로 '고통 속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전동례가 감정을 의탁하고 있는 춤'이 아니라, '역사에 대해 던지는 피해자의 분노이며 과거의 무게와 아픔을 내포한 처절한 몸짓'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반은 제암리 사건이 역사 속의 잊혀진 사건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카도 가나메의 말대로 '이것은 한으로 응축되어 녹기 어려운 상처'이며 '인간으로 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사건이다. 이반과 다카도는 피해자의 입장에 서서 문제를 바라보며, 한국과 일본 양국의 관객들에게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도, 하느님을 가운데 세우면 화해가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겸허한 물음을 던지고 싶었던 것이다.
'아, 제암리여!' 극본 쓴 이 반 교수
`아, 제암리여!'는 일본에서의 첫 공연시 3.1절에 맞추어 동경YMCA건물에서 `총검과 처용무'라는 제목으로 막이 올려졌다. 이반 교수는 당시 이 연극을 “동경YMCA에서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고 술회한다. 그러나 일본에서 일본인에 의해 제암리 사건을 다룬다는 것 자체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사죄의 의미를 극대화했던 것이 사실. 이 교수는 이에 대해 사람들이 “작품의 예술성보다는 소재의 역사성에 더 관심을 표명하는 것을 보고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으나 워낙 충격적인 역사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했다”고 전한다.
지난해 일본의 한복판에서 초연된 이 연극은 3.1절이나 일본의 만행, 그리고 제암리 사건을 모르는 일본인들에게 아픈 역사를 알리는 역할을 했다. 실제로 당시 이반 교수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한 기자는 한국인 2세로 민단에 근무하면서도 제암리 사건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고 했다는 것. 반면, 조총련계의 조선대학 학생들이 제작진에게 찾아가서 “일본 사람들이 이같은 공연을 한다는 사실에 대해 감동을 받았다”는 말을 전했던 일이 있었다고.
이 교수는 아울러 “이 작품을 한국과 일본 간의 민족적 갈등으로 그리기보다는 폭력을 지양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로 다루고 싶었다”고 전제한 후, “그러나 처용무를 추게 한 나의 무의식 속에 일본 최고 책임자에 대한 사죄의 요구가 내재해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또 이 연극을 통해 “일본 연극인들 역시 자신들의 과거를 덮고 화해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1982년 사적 제299호로 지정된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 제암교회. 제암교회 사건은 일제시대 일본 경찰들이 1919년 4월 15일 서울의 3.1만세운동에 뒤이어 일어난 제암리 만세운동에 참여한 주민들을 제암교회 안에 가둔 채 23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일본 경찰은 교회 문을 걸어잠그고 불을 지르는가 하면 문밖으로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칼과 죽창으로 찔러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학자들은 이 사건이 수원지역 만세시위에 대한 일제의 치밀하게 계획된 토벌작전 중 일부였다고 보고 있다. 특히 희생자들이 기독교인이었던 이유는 일제측이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을 가장 경계해야 할 반일세력으로 보고 탄압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것. 3.1운동 당시 유난히 단결력이 강했던 이곳에서 제암교회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벌어지자 3월 31일과 4월 5일 만세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제암교회에 대해 보복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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