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윤기훈 '종이달'

clint 2021. 12. 20. 06:45

 

 

 

윤희는 비행기 안에서 프랑스 농부의 손에 들린 수원과 오산이라는 아기와 만나게 된다. 남자는 아기를 무척 좋아했지만 아기를 돌보는 모습이 꽤나 정신없어 보였고, 게다가 그의 집에는 다섯 명의 아이가 더 있다고 한다. 파리의 사무실로 돌아와서도 그녀는 비행기에서 만난 아이들 생각에 사로잡혔고 회의 도중 불쑥 한 가정에 그토록 많은 아이들이 필요한 이유가 노동력이 필요해서라는 말을 내뱉고 만다.

윤희는 프랑스에서 유학 생활을 마친 후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현재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일을 하고 있다. 그녀는 30년 전 열악한 여건 속에서 유학길에 떠나기 위해 한국의 입양아를 프랑스의 입양기관으로 데려오는 대신 비행기티켓을 대가로 받았다. 이로 말미암아 성공을 위해 이 아이를 이용했다는 괴로움을, 자신의 행동이 아이와 부모에게 실제로 어떤 아픔을 주었는지 차마 헤아리지도 못한 채 가슴 속에 묻고 살아왔다.

극은 이처럼 세상의 많은 일이 개별적인 인생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 예측하지 못하고 벌어진다고 말한다. 이날 유네스코 본부에서는 A지역에 몰린 기금을 어떻게 B, C지역에까지 분배할 것인지에 대하여 논의되고 있다. 최근 A지역에서는 세계 최대 매장량의 리튬광산이 발견되었고 채굴권을 두고 기업들이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유네스코 본부 직원인 윤희, 마틸다, 토마는 기금 투입의 결과로 이 나라의 자원이 헐값에 넘어가고 아이들이 교육을 받아야 할 시간에 노동력을 제공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여기면서도 상황의 조금 더 밝은 면을 바라보자고 마음을 다지며 조금이라도 더 공정하게 기금을 분배하기 위하여 머리를 짜내고 있다. 그 와중에 유니세프의 국제 입양아를 위한 새로운 프로젝트와 협력하는 안이 나오게 되었고, 윤희는 유니세프와의 협의를 담당하게 된다. 불쑥 소환된 과거로부터 새로운 길이 열렸다.

윤희는 비행기 안 두 아기와의 만남을 처음에는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환기된 과거의 기억과 그것이 불러일으킨 내면의 복잡한 감정들에 차근차근 응하기 시작한다. 유학길에서 자신이 데려온 아이와 아이의 생모를 찾고 이들의 만남을 주선한다. 이러한 윤희의 행위는 오랜 세월 과거로 괴로워하는 아이와 엄마의 심정에 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윤희는 복잡한 심연에 놓인 이들을 서로 만나게 하는 것이 정말 잘하는 일인지 확신하지 못해 고민하지만, 정작 그들을 서로를 향해 강력하게 끌어당긴 힘은 그들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던 깊은 회한의 감정이었다.

 

 

 

 

극에 등장하는 여러 사건은 실제로 있었던 일들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자국의 입양아를 해외의 입양기관까지 데려다주는 일은 실제로 행해지고 있는 일이고, 아랍 청년이 여자 친구의 아버지가 모는 차에 치이는 사건은 이화원 교수가 유학 시절 직접 목격했던 일이다. 각각 다른 사람들이 다른 시점에서 겪은 일들이 작품 속에서 하나의 일인 것마냥 녹아 들었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보여도 모두 달의 모습이듯 세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도 하나의 본질을 향하고 있다. 진실이란 여러 가지 사건들을 관통하며 은밀한 빛을 띠게 마련이기에, 드라마의 애매모호함은 현실을 비추는 좋은 거울이 될 수 있다. 작품의 모호한 극의 전개는 이편에서 일어나는 일이 지구 저편에서 일어나는 일과도 맞물려 있다는 것을, 타인과 관계 맺지 않고 따로 떨어져 그냥 벌어지는 일이란 결코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편 극의 모호함은 아프고 참담한 현실을 여러 켜의 달빛에 걸러서 전달한다. 윤희는 신중한 인물이며 상황에 따라 자신의 의사를 영리하게 전달한다. 배우가 들려주는 불어가 그 나라 말을 모르는 한국인에게 아름답게 들렸던 만큼, 한국어를 모르는 프랑스인들에게도 그러했을 거라고 짐작된다. 윤희는 공부도 많이 했고 좋은 자질을 두루 지닌 인물이지만 그가 가진 가장 큰 자산은 뛰어난 소통능력이며, 그것으로 인해 유네스코와 유니세프의 중첩된 역할을 담당할 수 있고, 30년 만에 처음 만나는 엄마와 딸의 대화도 통역할 수 있다는 것을 관객들은 알아챈다. 그러나 영선이 과거 성폭행을 당했던 사건 만큼은 오롯이 통역되지 못한다. 삶에 허구와 모호함이 요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달은 매번 다른 모습을 한다. 아무리 과거의 일이 후회스럽고 아파도 언제까지나 그러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삶에서 매번 다른 국면이 우리를 찾아오기 때문이며, 강렬한 햇빛이 아닌 숨은 빛이 우리를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달빛 안에서라면, 언제라도 우리를 찾아온 낯선 감정들과 기억들과 인연들에 화답할 용기를 내봄직하다. 역시 애매모호한 연극이 우리의 삶에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작가의 글 - 윤기훈

한불수교 130주년 공식인증사업의 하나로 한국과 프랑스에서 공연된 연극 <종이달(La lune en papier)>의 구상은 사실 한-불수교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2013년 여름, <피아 노포르테, 나의 삶(Pianoforte, my life)>을 공연 중이던 영국 에든버러에서 시작했다. 2004년부터 경계없는 예술센터를 통해 프랑스, 영국, 호주 등지에서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국경과 문화의 경계를 넘어 해외 관객에게 선보임에 있어 적합한 공연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문제는 늘 고민거리였다. 그것은 2006년 여름, 프랑스 오리악 축제의 예술감독이었던 장-마리 송쥐(Jean Marie Songy)가 프랑스에서 공연되는 한국의 작품들은 왜 대부분 전통이나 넌버벌 퍼포먼스를 기반으로 하느냐, 현대적인 극형식이 한국에서는 활성화되지 않았느냐고 질문했을 때부터 시작됐다. 물론 그것을 우리 공연예술계를 잘 모르는 편협한 시각에서 비롯된 개인적인 의견으로 치부하면 그만이었겠지만, 적어도 고민의 씨앗이 되어 매년 해외공연을 준비할 때마다 신경이 쓰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 후로 해외 공연을 위해 작품을 창작함에 있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몇 가지 가이드라인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첫째, 보편적 주제를 다룰 것. 둘째, 동시대 연극 양식을 추구할 것, 셋째, 언어적 정서가 일방적이지 않을 것 등이다. 이는 작가이자 연출가로서 오랜 기간 미국에서 활동해왔던 내게는 어쩌면 적절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피아노포르테> 연작으로, 이는 은퇴한 노() 피아니스트가 자신의 삶(Pianoforte, my life)과 사랑(Pianoforte, my love)에 대한 이야기를 모놀로그로 엮어내는 가운데 클래식 콘서트가 함께 병행되는 형식의 공연이다. 두 작품은 불어와 영어로 번역되어 공연되었으며, 다행히 현지의 관객으로부터 많은 공감을 이끌어 냈다. 연극 <종이달> 역시, 그러한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기획되었다. 이 작품은 인류의 오랜 고민이자, 쉽게 끝날 것 같지도 않은 '정체성'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다양성의 가치가 시대적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가운데, 물질적 변화가 정신적 변화의 속도를 추월하여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본질에 다가서기도 전에 새로운 외부적 요인들로 인해 뒤틀려버리는 현실에서 우리는 과연 ''의 본질에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작품을 구상하며 ''를 규정하는 다양한 외부적 요인들을 본질과 대비시키는 극적 장치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중 하나가 언어이다. <종이달>은 우리말과 불어를 동시에 구사해야만 하는 작품이다. 어느 한쪽의 언어로 번역해서 작품 전체를 공연하는 것은 극의 구성상 효과적이지 않다. 자막을 봐야 하는 불편함을 무릅쓰고 외국어의 낯섦이 유발 하는 작품(공연)에 대한 외래적 시각이 필요했고, 극의 절정 부에서 이루어지는 거짓 통역 장면은 이중 언어의 사용이 본질과 현상의 괴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핵심적인 장치로 작동한다. 또 다른 하나는 배우의 역할이다. 1인 다역이라는 연극적 장치를 활용하여 배우의 본질과 캐릭터의 허구성을 대비시켰다. 그리고 각 장마다 등장하는 등장인물의 독백 역시 시간의 간극을 통해 경험한 사실과 기억 속의 사건, 현재와 과거의 대비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종이'이라는 제목에서 암시하듯, 유일한 존재로서의 달의 본질과 한지공예품인 각각의 종이달의 상징성은 극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가장 직접적으로 설명한다. 이 작품은 입양아를 소재로 하지만, 굳이 입양아와 그 가족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감성을 자극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공연은 한국과 프랑스 관객 모두에게서 인물의 이야기를 통한 반응을 이끌어 냈다. 물론 주제의식이 전달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관객들은 등장인물들의 이야기에 더 빠져들었다. 인간적인 소통은 그렇게 강하다. 역시 연극은 그런 것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