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가방추적작전›은 김윤영의 단편소설 ‘루이뷔똥’을 각색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균일한 외관 속 사회적, 경제적으로 다양한 차이를 담고 있는 아파트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룬다.
‘평상시엔 서로 같이 밥도 먹고 공도 차고 짤짤이도 하며 아무 위화감 없이 지내는 듯했던’ 평범한 중학교 교실에서 한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 안에 내재 된 적대심과 차별에 대해 돌아보고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묻는다.
공공임대 아파트와 민간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함께 다니는 수서의 어느 중학교. 이 학교에 다니던 정훈이 어느 날 가출을 한다. 평소 아이들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훈육하던 담임 교사 봉순자는 정훈이를 다시 학교로 데려오기 위해 그의 행방을 쫓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봉순자는 자신이 굳게 믿어왔던 교육관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하며, 그동안 외면하려 했던 차별과 불공정한 경쟁의 이면들을 목격하게 된다.
각색의 글
“연극 ‹철가방추적작전›은 2000년대 초반 창비에서 출판된 김윤영의 소설을 2019년 동시대로 옮겨와 연극화한 작품이다. 얼핏 균일해 보이는 아파트 단지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어느 아파트에 사느냐에 따라 차별과 혐오의 시선들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학교 밖으로 뛰쳐나간 열여섯 살 정훈이와 그 행방을 쫓는 봉순자를 통해 그 시선들을 이야기하려 한다. 우리가 당연하다 여겼던 질서들과 기성세대의 관점에 대해 다시금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피로사회, 무한경쟁, n포 세대, 탈조선. 2019년 대한민국을 묘사하는 수식어치고 긍정적인 단어가 없다. 평범한 삶으로 가는 길 가운데 놓인 벽은 웬만한 노력으로는 넘기가 힘들다. 그런 21세기 대한민국 사회 안에서 꿈은 사치재이고, 빛나는 희망은 고문의 다른 말일 뿐이다. 지나치게 비관주의적인 생각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우리는 다들 알고 있다. 개천에서 용이 나던 시절에는 적어도 그 개천이 이렇게나 복잡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몇 년 전 등장한 수저론은 현대 한국 사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처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이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사람은 흙수저를 물고 나온 것이라는 자조적 농담이 담론화되기까지, 우리 사회는 진보하지 못했다. 한 친구는 나에게, “진짜 없는 집에서 태어나는 사람들은 수저도 아니고 포크 물고 태어나는 거야. 입안 다 찔려서 그거 치료비부터 벌어야 돼.”라며 한탄했다. 안락하고 행복한 안식처로서의 집도 허상이 되어가는 게 현실이다.
‘철가방추적작전’은 집마저도 자신의 사회적 계층을 방증하는 수단이 되어버리고, 가정 안에서도 안식할 수 없는 현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미로 속에서 과연 학교와 교육이 빛이 되어줄 수 있을지, 나아가 출신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의지와 꿈만 있다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신화가 현실에서도 이루어지는지, 작품은 묵직하고 불편한 질문을 가감 없이 던지며 관객들의 문제의식을 환기한다. 졸업하면 뭐가 달라지는데요?
교사 봉순자는 학생들을 마음 깊이 걱정하는 교사다. 정훈이 가출하고 학교에 무단결석을 하자, 봉순자는 정훈을 학교로 다시 돌아오게 만들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학생은 졸업하고 대학을 가야 이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더 잘 살 수 있다, 라는, 조금은 오래된 생각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학생을 생각하는 마음 자체는 으뜸이다.
이쯤에서 조금 생각해보자. 정말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졸업하면 이 학생들의 삶이 변할 수 있을까? 이 학생들이 철가방 대신 펜을 잡고, 밥값과 월세를 아껴 등록금을 내고, 그마저도 결국 빚으로 돌아오게 되어도 종국에는 미소 지을 수 있을까? 과연 학교와 사회는 정훈에게 ‘괜찮아. 학교로 와. 우리 어른들이 지켜줄게.’라며 손을 내밀 자격이 있을까? 선뜻 답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기에 희찬의 ‘졸업하면 뭐가 달라지는데요?’라는 물음이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철가방추적작전’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아니다. 어설픈 위로와 무책임한 희망 대신, 아이들의 선택지가 가출로 좁혀진 현실을 적나라한 시선으로 해부한다.
원작 소설이 18년 전 작품이라는 사실도 함의하는 바가 크다. 20년 가까이 되는 시간이 흐를 동안 사회가 한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는 뜻이고, 어른들은 아이들이 마음껏 꿈을 꿀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지 못했다는 뜻이다. 따지고 보면 어른들조차 아이들에게 희망을 퍼부어줄 만큼 많은 희망을 갖고 있지 못해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작품 속 캐릭터들은 각자의 버팀목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봉순자는 학교가 아이들의 울타리가 되어줄 것이라 굳게 믿는 반면, 최윤우는 재능만 있다면 굳이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자신만의 울타리를 만들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봉순자의 믿음도, 최윤우의 믿음도 조금씩 흔들리게 된다. 기성세대로서 가졌던 신념이 학생들의 현실 앞에서 맥을 못 추게 되는 것이다. 반면 정훈의 울타리는 그림이다. 학교와 집을 등지고 나선 거리에서 정훈은 벽화 그리기를 통해 돈을 모은다. 그뿐 아니라 학교를 다닐 때보다 훨씬 더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하루에 몇 시간씩 붓을 벗 삼는다. 정훈의 친구 희찬이 가진 버팀목은 고급 스포츠카다. 스포츠카를 가진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스포츠카의 엔진 소리를 듣는 것, 그게 희찬의 유일한 낙이자 삶의 이유다. 소박해보이지만 절대 소박할 수 없는 꿈이라는 점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학교가 울타리라는 봉순자의 믿음, 꿈을 가지고 능력껏 날개를 펼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최윤우의 믿음, 그리고 붓과 페인트로 세상을 가진 듯 행복해하던 정훈의 울타리도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거지들, 꺼져’라는 흉한 글자가 벽화를 뒤덮었을 때 정훈은 억울해서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다. 그가 삶을 버틸 수 있게 해준 단 하나의 버팀목이 하얀 페인트칠 하나에 맥없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붓질 하나로 타인의 생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데, 누군가는 아무리 악을 쓰며 버텨도 제 자리를 고수하는 것 하나조차 이렇게 버겁다는 현실이 아프게 다가온다.
‘철가방추적작전’의 소재는 참신하다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 작품의 묘미는 흔한 소재를 비틀거나 조미료를 첨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는 점에 있다. 그렇기에 작품의 결말이 결코 따뜻하거나 편안하지 않다. 이 작품의 결말은 상당히 불편하다. 엉킬 대로 엉킨 이 사회의 단면을 마주하는 것도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닌데, 극 속에서조차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수 없다니. 시리게 현실적인 결말과 마주하며, 어찌 보면 난 이렇게 차가운 현실을 조금이나마 모른 체하고 싶어 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도 들었다. 결국 학교는 이들의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했으며, 어른은 아이들에게 방향을 제시해주지 못했다. ‘철가방추적작전’은 공공임대 아파트 거주민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놀림 받는 것, 이런 단순한 부조리에만 주목하지 않고 그 표상 너머의 불편한 현실을 조명한다. 극이 진행되는 내내 철가방 추적작전을 벌이던 봉순자는 결국 자신이 좇던 철가방 속에 담긴 음식을 먹는다. 이런 모순된 사회가 아닌, 각자의 울타리와 버팀목이 현실 앞에 무너지지 않을 세상, 우리에게 필요한 세상은 바로 이런 세상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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