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서문.
[세번은 짧게 한번은 길게] - 그것은 2차대전때 프랑스 레지스땅스의 모르스부호였다.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베토벤의 [운명]이다!
[세번은 짧게 세번은 길게] - 그것은 당신의 고독과 또 그 무엇을 예고하며, 당신의 운명을 휘몰아치려는 암호인가?
1장
김종실은 자신이 만든 콜라 병 따는 효과음의 댓가로 백지수표를 받게 된 날, 당황한 나머지 자기 집이 아닌 윗층 아파트 집으로 잘못 들어가게 된다. 자신을 찾는 암호인 세번은 짧게, 세번은 길게 울린 초인종 소리를 듣고 콜걸인 주인 여자도 김의 침입을 의심하지 않는다. 김은 잘못 찾아 들어왔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지만 그집 현관문이 망가져 나갈 수가 없게 된다. 거기다 새로 이사온 집으로 전화연락을 할 수도 없게 된다. 그는 집에 늦게, 그것도 저녁 7시 이후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남의 집에 낯선 여자와 단 둘이 갇혀 있게 된 처지가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실수로 인한 상황을, 사람들이 치정의 관계로 몰아갈 것이 두려워 빠져나갈 생각을 못하게 된다. 여인도 그런 면을 걱정해서 김은 별 수 없이 여인의 집에서 하루를 지내기로 한다.
2장
김은 그 와중에서도 자신의 효과음 작업을 계속 한다. 그래서 여인은 김이 효과음을 만드는 직업을 가졌음을 알게 된다. 김은 그런 여인에게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자신의 직업이 갖는 고독을 일러주기도 하고 자신이 만든 갖가지 음향들을 들려주기도 하면서 하룻밤을 보낸다.
3장
다음날 아침, 김은 외박에 대한 적당한 변명을 만들어 집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러나 한번도 집에 늦게 돌아온 적이 없는 남편, 그것도 백지수표를 소지하고 있는 남편의 외박을 실종이라고 판단한 부인은 경찰에 신고를 하고 만다. 경찰들이 집에 진을 치고 김은 문이 고쳐지고 난 뒤에도, 자신의 실수로 인한 외박을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을 것같아 그 집에서 빠져 나갈 수가 없게 된다. (인서트) 김이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사이, 신문에는 김의 실종의 원인을 부부싸움, 백지수표의 소지로 인한 갱들의 납치, 효과음 계약시일들이 촉박으로 인한 두려움 등 세가지로 압축 수사 중이라는 경찰의 발표가 실림.
4장
수사는 확대되고 김은 더욱 더 그 집을 빠져나갈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만다. 그리고 자신이 갑자기 사회의 화제거리가 된 것은 자신의 존재 때문이 아니라 백지수표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백지수표는 자신이 맘대로 적을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이 아니라 자신을 얽매이게 하는 물욕의 공간임을 알게 된다. 그리곤 자신에 대한 관심이 사그러들기를 기대하면서 거기서 더 머물게 된다. (인서트) 김에 대한 수사는 엉뚱한 방향으로 발전해 그의 효과음에는 사람을 최면시키는 초음파가 들어있고, 그가 사람들의 마음을 맘대로 바꿀 수 있게 하는 초음파 총을 제작했다느니 하는 쪽으로 발전하고 그는 안보관계 혐의자의 누명까지 쓰게 된다.
5장
갇혀 있던 김은 자신도 모르게 그 여인에게 연정을 느끼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여인의 콜걸이라는 직업이 싫다. 김은 거기에 도망자로서 머문다는 것이 싫었고 그 집의 당당한 주인들에게 질투를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김은 여인에게 자신의 역사, 국민학교 때 주인공인 왕자 역을 맡았으나 가난 때문에 부잣집 아이에게 그 역을 빼앗기고 무대 뒤에서 외롭게 효과음을 담당해야 했던 설움의 역사, 자신이 언제나 그늘인 효과음 제작자가 되어야 했던 그 역사를 말한다. 여인은 김의 이야기에서 자신과의 동질성을 느껴 역시 김에게 연모를 느끼게 되고 둘은 동침하기에 이른다. (인서트) 김의 실종은 나어린 여인과의 애정도피 행각이었다는 제보가 사실처럼 받아들여진다.
6장
김은 새벽같은 세상의 밝은 모습이 그립다. 그래서 김은 여인과 변장을 하고 멀리 떠나 버릴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미 뿌려진, 갖가지 형태로 변신했을 가능성에 대한 몽타쥬 때문에 그도 허사로 돌아간다. 둘은 김의 효과음을 통해 먼 바다로의 여행을 상상하는데 만족한다. 이 순간만은 김은 여인의 왕자가 된 기분이다. (인서트) 김의 실종사건은 엉뚱한 시체를 남편이라고 증언한 부인에 의해 자살로 결말이 난다.
7장
자살발표로 사람들에게 완전히 버림 받은 김은 더욱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언젠가 주인처럼 집에 들이닥칠 남자 때문에 느끼는 고통 또한 커져간다. 여인도 욕심을 위해 자기 곁에 있는 사람이 아닌 김에게 깊은 사랑을 느낀다. 여인이 김의 영안실에 꽃을 바치고 김의 딸을 김에게 몰래 보여주려고 집을 나간사이, 김은 세속과 물질에 찌든 세상사람들에게 야유를 퍼붓는다. 그러는 사이 세번은 짧게, 세번은 길게 운명처럼 초인종은 울리고 김은 하나밖에 없는 안식처를 잃는 두려움에 자살하고 만다. 외출에서 돌아온 여인은 죽어가는 김을 발견하고 자신들이 믿을 수 있는 거짓말보다 믿을 수 없는 진실이 살고 있는 나라로 떠나고 있음을 선언한다.
현실이 반영된 사회극
- 실험극장의<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은 제일 주제가 세 번은 짧게 한 번은 길게 울린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들이 지하운동을 하면서 그 장단을 그들의 비밀스런 신호로 활용했다고 해서 이어령도 거기에 어떤 운명의 예감 같은 신비스런 신호를 주는 것은 아니다. 이런 맛깔스런 제목을 따올 수 있는 것도 그의 재치이다. 우리의 귀에 익은 김 아무개 물리학자의 실종과 자살 사건을 효과음을 만드는 천재 김 아무개의 실종 사건과 결부시키고 거기에다 광고와 대중매체의 ‘센세이셔널리즘’을 풍자하는 이 연극에는 실제로 효과를 맡은 김벌래의 녹음기술과, 알고 보면 그리 신기할 것도 없는 효과음이 제조과정의 눈요기 감으로 나온다.
창녀의 문을 열게 하는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의 초인종 소리는 실종신고를 받고 자살하는 연극 속의 주인공의 운명인지 아니면 연극의 효과를 맡은 사람, 또는 창녀의 운명인지를 작가 이어령도 분명히 하지 않는다. 다만 상황을 그려 보임으로써 현대인의 운명을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갇힌다는 상황을 큰 뼈대로 해서 갖가지 작은 상황들이 펼쳐진다.
연극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시사성을 띤 연극, 곧 ‘시사연극’이라는 갈래가 있을 수 있다. 소재를 우리 생활주변에서 따와 연극으로 꾸미는 시사연극은 관객이 이미 대중매체에서 읽고 들은 사건이어서 관객이 연극의 내용을 살갗으로 느끼게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사연극은 정치나 사회문제를 너무 재빨리 받아들여 극으로 만들기 때문에 수박 겉핥기식으로 단지 사건만을 건드리고 지나가기가 쉽고 그래서 주제의 설정이 얕다는 핀잔을 듣는다. 시사연극은 개방된 사회에서 정치나 경제, 그리고 사회문제가 제대로 토론될 수 있어야 하며 그래서 어떤 사건의 맨바닥까지 토의와 같은 형식을 빌어 깊이 파 내려가야 비로서 제 모습을 갖출 수가 있겠기 때문이다. 시사연극이 주로 재판극 형식을 빌리는 것은 재판이 원고와 피고, 추궁과 변호, 그리고 증거와 논증으로 넓은 뜻의 토론장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극은 본디 이런 말의 주고받음으로 이룩되는 예술 형식이지만 시사연극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삼는다는 면에서 다른 연극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연극’이 어쩌면 가장 멀 수도 있다. 가깝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를 사로잡는 매력이 없으면 싱거워지고 외면당하기 쉽다. 거기에다가 토론의 자유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으면 정치나 사회비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제약 받는 ‘시사연극’은 완전히 흥미를 위주로 하는 통속물이 될 위험이 매우 많다.
실험극장의<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를 그런 시사연극의 테두리에 넣는 것 자체를 못마땅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선 작가 이어령 자신부터 자기 희곡을 1910년대의 독일 연극 형식에 견주는 것을 못마땅해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잠깐, 그 못마땅해 하는 마음을 달래면서 연극 역사에 부침해 간 흐름들을 보면 이 시사연극 형식이 ‘사회연극’이라든지 ‘정치연극’의 모체가 되었고, 역사의 사건과 관련하여 70년대 초기의 거창한 기록 연극으로 발전해 나간 사실로 봐서 단순히 그렇게 못마땅해 할 일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실제로 연극이 현실의 반영이라는 그 흔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우리 연극은 현실에 반영하는 매운맛이 없어 보인다. 어쩌다 차가운 웃음을 담기도 하고 능청을 부리기도 하는 그런 풍자가 상징적으로 그려진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것이 현실의 심층을 꿰뚫는 것이냐 하면 좀처럼 그렇지 못하다. 현실을 그리는 비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연극도 흔하지만 그것이 얼마만큼 우리의 현실을 예술답게 승화시켰느냐는 의문도 많다. 제대로 된 시사연극이 없다는 것은 제대로 현실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어령의<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는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주인공의 실종과 자살 때문에 다분히 우리의 주변에서 벌어졌던 김 아무개의 실종사건이 떠오르는 만큼 오늘날의 삶이 반영된 시사연극, 사회연극의 모습을 띠고 있다. 그만큼 현실반영이 뚜렷한 이 연극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인식이 빠진 대신에 현대 문명의 특징이라고 할만한 광고매체와 기계문명의 톱니바퀴에 끼인 삶의 증인이자 진단이 된다.
이 작품에는 주제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비누거품처럼 깨어지기 쉬운 무수한 상황들이 영롱한 영상을 담고 엉켜 있다. 그것이 이 작품의 장점이자 흠인 것이다. 하나의 틀 속에 끼인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 또는 의식과 상념이 하나의 주제 속에서 제대로 이어지지 못할 때 그것은 문제일 수밖에 없다.
최근에 특히 눈에 띄는 납치실종자살타살의 겉면을 현대 문명의 함수관계로 끌어들인 이 작품에서는 사건의 특종 기사화를 노리는 대중매체의 센세이셔널리즘 그리고 그것을 부추기고 부채질하는 상업광고의 어마어마한 음모를 통해서 바로 70년대 말의 한국사회가 맞닥뜨릴 현실의 시사적인 단면을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다. 시사연극은 주로 사건의 평가만을 노리기 때문에 인간성의 상실이 가볍게 다루어지는데 바로 그것이 시사연극이 지닌 큰 흠이다. 다시 말해서 사건 위주이기 때문에, 그리고 사건의 배경을 뒤쫓거나 사건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하다 보니까 그 사건의 핵심에 있는 사람의 정신이나 영혼이 사라져 버리게 된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시사연극의 함수일 수도 있다.
문학평론가인 이어령이 그런 함정을 모를 턱이 없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는 그런 함정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다시 그의 함정이 된다. 똑똑한 사람이 자기 꾀에 빠지듯이 그는 시사연극이 지닌 함정, 곧 인간다움의 상실을 이겨내려고 주인공을 너무도 인간답게 그림으로써 이 작품이 견디어 낼 수 없을 만큼 많은 의식과 생각들을 구겨 넣었고, 그럼으로써 이어령의 문명비평적인 예지와 상념들이 이 연극을 용량이 넘치는 연극으로 만들고 있다. 연극의 틀에 다 들어갈 수 없는 착상과 사상과 예지의 조각들이 수많은 비누거품처럼 두 시간짜리의 연극에 못다 한 하소연을 그리고 있다. 그에 따라 이어령의 희곡세계는 끝없는 지껄임의 홍수가 된다. 현대 연극의 특징으로 흔히 일컬어지는 어눌한 연극과 지껄이는 연극 중에서, 지껄이는 연극의 그 지껄임은 작가의 끝없는 착상과 의식의 홍수를 반영한다. 그것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내적 공허의 독백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다분히 프랑스의 냄새가 나는 실존의 독백이고, 그것을 일컬어 부조리 연극의 특징이라 부를 수 있다.
이어령의 희곡문학을 부조리 연극의 테두리에 넣는 경우에도 우리는 부조리 주제를 반영하는 이 시사연극에서 풀이 죽지 않은 뻣뻣한 배추처럼 고개를 드는 숱한 주제와 착상을 본다. 말하자면 이 연극은 마치 백화점에서 온갖 잡동사니의 상품을 팔 듯이 상념이란 상념은 모두 모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시사연극이 부수적으로 갖기 쉬운 현실의 여운이 때묻은 생활감각으로 되비치기 때문에 그 세계는 베토벤의 ‘운명’의 제일 주제에 어울리지도 않고, 프랑스 레지스탕스들이 보내는 모르스 신호가 주는 절박감과도 동떨어진다.
지성과 의식이 말갛게 드러나기에 앞서 오히려 겻내나는 살림 냄새를 풍기는 부조리한 이 연극의 시사성은 연극적인 상황이 지껄임으로 풀려지는 과정에서 이어령 희곡이 지닌 위험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 말은 이 희곡과 연극이 상황을 만들어내고 보여주는 데에는 강하지만 극적으로 상황을 꾸미고 감동을 전달하는 데에는 약하다는 뜻이다. 아무리 말을 잘하더라도 끝내 말만으로써는 설득할 수 없는 벽이 있듯이 이어령의 희곡문학에도 제한이 있어서 그의 현란한 말재주와 장난도 연극적으로 몰아 주지는 못하는 가장 큰 장애요소가 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연출과 연기가 개입할 틈이 없을 정도로 온갖 너저분한 지껄임만이 넘실대고 있어서, 그리고 그것이 모두 ‘밖으로 향한 것’이어서 내면의 세계를 그리거나 이끌어낼 틈이 없기 때문에 연출자나 연기자들은 완전히 꼭두각시 노릇을 했다고 밖에는 달리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러하기 때문에 마땅히 꼭두각시로만 끝내야 할 연출과 연기가 비비대고 살아나려고 하는 동안에 연극의 리듬은 더욱 더 볼품이 없어지고 말았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효과음을 만들어내어 그것을 녹음으로 통조림해서 파는 주인공 김종실은 말하자면 가짜를 만들어 파는 현대 기계문명의 앞잡이이고, 그런 뜻에서 만들어낸 소리, 인공의 효과음에 목을 매단 그의 삶도 바로 가짜이다.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는 마침내 이 가짜의 삶에 대한 문명 비평이다. 그 문명 속에서 사람은 이리저리 맞물리어 돌아가는 톱니바퀴나 자동 인형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인형에게 인간다운 회상과 고뇌와 절망을 새겨 넣으려는 의도는 도통 무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베토벤 교향곡의 ‘운명’을 운명 그것으로 받아들인 연극 속의 한 주인공의 죽음을 너무 운명적으로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에게 탈휴머니즘의 달콤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이렇듯 지나친 원작의 의욕은 연극 제작에서 제거될 수 있었는데 연출은 너무나 무력했다. 연출가 김효경은 그답지 않게 연극에서 밀려나 있으므로 원작이 늘어놓은 착상의 메모와 사상의 단편과 이야기되어야 하는 예지의 파편들에 맞아 부상당한 것처럼 보인다.
채희재도 마찬가지로 단순화되어 있지 않다. 자동 인형처럼 단순화되어 장난감 병정처럼 기계문명의 앞잡이 노릇을 해야만 하는데 그처럼 현대의 비극을 혼자 다 감당한다는 것은 그의 일관된 연기술을 깨는 것이다. 그리고 보면 이 연극에서는 보다 더 일관되고 단순화된 작업이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주제의 단순화는 어눌한 연극을 쉽사리 예술로 발돋움시키는데 지껄임의 연극에서는 이 단순화 작업이 매우 힘든 것이다. 그러나 그 잘못이 이어령의 희곡세계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연출이나 연기에 있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작가 이어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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