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년을 연극배우의 길을 걸어왔지만 이영진은 아직까지도 단역만 하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다.
중학생인 아들과 대학생 딸이 있지만 아버지로써도 배우로써도 별로 존경을 받지는 못하는 처지이고, 다만 미장원을 경영하며 살림을 꾸려가는 아내만은 이영진을 아직 기회를 만나지 못한 배우로 생각해 줄뿐이고 밤만 되면 언젠가는 하게 될지도 모를 햄릿공연을 위해 이영진은 가족들을 모아놓고 햄릿 연습을 한다. 햄릿을 한번 해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이영진은 극단에서 햄릿공연을 하게되자 연출자에게 사정을 해서 햄릿 역을 맡게 되고 집에 와서도 자랑을 하며 햄릿연습에 열중이었지만 관객동원을 염려한 제작자의 입김으로 또 다시 기회는 ....
대학로 발렌타인극장의 작은 무대는 한 배우의 열정으로 뜨겁게 달구어졌다.
맨 앞자리에 앉았던 나는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에 몸을 떨었다. 전율, 그는 이미 강태기가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하다못해 가족들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슬픈 인생을 너무나 처절하게 연기했다. 그로 말미암아 객석에 있는 우리들의 마음을 순식간에 움켜쥐었다. 그의 땀방울이, 거품기로 저은 계란처럼 하얗게 변한 침이 얼굴에 사정없이 뿌려져도 몸을 비틀며 피하는 사람 하나 없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때문에 눈이 따갑다. 비록 인정받지 못하는 위치에 있지만 이영진은 언제나 자신감에 차 있었다. 왜냐하면, 그에겐 햄릿을 멋지게 연기하게 되리라는 꿈이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기회가 오겠지. 올 거야. 꼭 하고 싶어. 하고 말 거야. 그래서 나는 미리미리 준비하는 거야.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그에게 주어지는 역은 언제나 단역이었다. 30년 이렇게 지나왔다. 역할 비중이 크지 않다고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다. 어떤 자리에 있건 모두가 일류이다. 삼류는 스스로 하찮게 여기고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니 이영진은 일이 즐겁고 자신감에 차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않겠는가. 분명한 목표가 있고 오로지 한 방향을 바라보며 성실하게 준비하는데 좌절하거나 주저앉아있을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영진 가면을 쓴 강태기는 극의 초반을 코믹하면서도 성실한 모습으로 이끌어갔다. 드디어 극단에서 햄릿을 무대에 올릴 계획을 세웠다. 이영진, 이토록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다. 연출에게 통사정한다. 후배인 그는 선뜻 내키지는 않지만 선배가 염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잠정적으로 수락한다. 아, 이럴 줄 알았어. 언젠가는 꼭 하게 될 거라 믿었잖아. 내가 얼마나 연습했는데. 아내와 딸에게 상대역을 부탁하면서 얼마나 오랫동안 대본을 읽고 또 읽었는데. 기쁨과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제작자로부터 흥행에 지장 있으니 그 역할은 인기 탤런트에게 맡기겠다는 말을 듣는다. 너무하는 거 아냐? 내게 한 번만이라도 기회를 주지. 한 번만 시켜보지. 잘할 수 있는데. 너무나도 애절한 슬픈 독백이었다. 이영진의 좌절은 객석을 짐짓 숙연하게 만들었다. 갖가지의 비극들이 산재해있는 현시대를 적절하게 꼬집은 대목이라 여겨진다. 그가 배역을 빼앗겼을 때 관객들의 입에선 안타까운 비명이 가늘게 흘러나왔다. 몇 회의 공연이 지난 어느 날, 주연 배우가 펑크를 내면서 이영진을 대타로 기용한다. 그래도 좋았다. 다시 찾아온 기회였다. 가족들에게 면이 서지 않았던 그는 큰소리를 뻥뻥 치며 관람하러 오라고 말한다. '내가 햄릿을 하게 되었어.' 그러나 공연 당일 상일이 나타나 그 기회마저 무산된다.
텅 빈 객석, 조명 꺼진 무대, 쓸쓸한 분장실, 이영진은 흐느끼며 분장을 지우고 있었다. 아버지, 왜 햄릿 안 하셨어요? 나 아버지가 하시는 햄릿, 보고싶어요. 중학생인 아들 진호가 철없이 뱉은 말 한마디에 그는 가족들 앞에서 햄릿을 모노로 연기한다. 이 장면이 클라이맥스다. 길고 긴 대사를 하는데 그의 얼굴은 땀으로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침을 삼킬 겨를 없을 정도여서 침이 거품 되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무대를 누볐다. 이에 함께 공연하는 배우들도, 그 모습을 지켜보는 관객들도 숨을 죽이며 흐느꼈다.
배우 강태기의 삼류 배우에서 나는 진정한 일류를 보았다. 제 삼자의 잣대로 수준이 정해지는 일류, 이류, 삼류. 그러나 진정한 일류 인생을 만드는 데는 자신의 가슴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이 극의 메시지다. 좁게는 하나의 꿈을 향해 고지식하지만 성실하게 달려가는 삼류 배우의 애환을, 넓게는 인간이 삶을 영위하면서 가져야 할 진정한 자세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다룬 작품이기도 하다.
작가의 변
연극이 갖고 있는 구조적인 영세성으로 인해 흔히 연극인이라는 직업은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서나 가난하며 현실 생활의 감각과는 동떨어져 있는, 어쩌면 특수한 사람들이나 하는 특수한 일이고 직업이며 특정인이 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연극예술은 분명 우리사회의 문화적인 기본 틀 중에 하나이고 무대공연 예술분야의 한 뿌리이며 사회문화계층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중심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기에 경제상황과 사회인식에 구애받지 않으며 연극작업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은 개인의 부단한 노력과 열정 내지는 연극예술에 대한 사명감과 연극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정열이 수반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고, 개인의 후천적인 노력은 물론 선천적으로 타고난 “끼”와 “재능” 또한 필요한 일인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보여주고 행하는 예술행위는 사회에 활기와 청량제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후세에 남겨줄 문화적인 유산을 창출하며, 과학과 첨단산업이 보여줄 수 없는 인간정서에 호소하는 유․무형의 문화를 구축하는 사회의 밀알이고 그 사회의 작은 축소판인 것이다. 비록 사회와 가정에서조차 일류배우로는 평가받지 못했지만 연기자의 길을 오직 자신의 “업”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며 자신의 직업과 생활에 자부심과 자존심을 지키며 타협하지 않았던 한 연극배우의 고달픈 삶과 현실을 뒷 배경으로 삼으며 이곳에서 우리사회에서 진정으로 존경받을 수 있는 “어른”의 참 모습을 확대시켜 그려보면서 우리사회의 연극 현실에 대한 주소를 새삼 확인하고,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며, 변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장인정신과 그러한 인간상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되새겨 보고 싶었다.
또한 연극인 자신들에게 연극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초심과 지금의 자세에 대한 각성의 시간과,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연극인들에 대한 정리되지 않은 정서의 바른 제시와 함께 연극예술에 대한 부단한 관심과 이해를 주장하고자 한다.
김순영 : 현 극단 미연 상임 연출
<최근 대표작품>
작/연출: 삼류배우, 주인공, 사랑의 방정식, 씨앗 외
번역/연출 : 사랑을 주세요, 달님은 이쁘기도 하셔라, 연기가 눈에 들어갈 때, 사랑게임 외
연출 : 서산에 해지면 달 떠온단다, 금의 환양, 황금사과, 바다를 건넌 도깨비들 (한.중.일 합작)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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