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안 어느 외진 곳에 자리 잡은 펜션에 이상한 파티가 준비되어 있다. 그날 밤 강풍과 진눈깨비 내리는 불안정한 날씨에 길은 고립된다. 파티에 참석할 손님들의 방문은 지연되고, 이곳을 운영하는 노부부는 애가 탄다. 그러던 중 첫 번째 손님으로 교수와 그의 아내가 도착한다. 교수와 아내는 뭔지 모를 두려움과 초조함에 어색한 분위기를 모면하려 애쓰며 노부부와 함께 초대된 또 다른 손님을 기다리는데… 차가 고장 난 신혼부부와 기사인 신랑친구가 같이 들어온다....
크리스마스 시즌 장식용으로 쓰이는 잎 끝이 뾰족한 육각형 잎의 빨간 열매가 달린 나무 이름을 아는가? 서양에서 ‘홀리’ 라고 불리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지만 그 이름은 생소한 이 나무의 이름은 ‘호랑가시나무’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이름이 지어진 이유는 호랑이 등을 긁어주는 나무라 해서 지어졌다. 붉은 열매를 지닌 아름다운 이 나무, 그러나 그 잎의 가시는 생채기 또한 낼 수 있을 만큼 위험하다. 인생의 동반자, 부부, 연인은 달콤함만을 공유하지 않는다. 연극《호랑가시나무 숲의 기억》은 사랑, 결혼, 부부관계에 거울을 들이대어 ‘사이’에 도사리고 있는 삶의 이면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작가 장성희는 어떤 글쓰기를 해왔던가? 안과 밖의 일치를 표현상의 기틀로 삼아 궁극적으로 인간관계와 사회현상을 그녀 특유의 따뜻한 시선과 포근함으로 감싸 안았던 것이 장성희 글쓰기의 중심 축 아니었던가? 이랬던 그녀가 《호랑가시나무 숲의 기억》에서는 광기라는 정서적 독성을 주입하고, 혐오와 치욕과 죄의식을 예전작품의 서정적 기운과 대결시킨다. 그렇다면, 그녀 글쓰기의 ‘끌어안기’ 태도는 이제 관객의 몫으로 넘겨졌다고 봐도 무방한가? 글쎄, 적어도 《호랑가시나무 숲의 기억》에서는 이런 종류의 이동이 감지되고 있음을 분명히 해두자. 《호랑가시나무 숲의 기억》에서 장성희 작가의 변화된 글쓰기가 감지되고, 무엇보다 작품의 각 등장인물이 지닌 내적 에너지와 외적표출 간의 집요한 상호작용을 변화의 중심으로 인식하고, 이 부분을 그는 그 만의 독창적 시선으로 풀이한다. 이를테면 그로테스크한 잠재의식의 세계와 일상적 리얼리즘의 조우란 것인데, 과연 그는 어떤 일탈적 연극을 염두에 두고 이 조우를 파헤치려는 것일까?
작가 장성희의 글
젊은이들은 꿈을 잡기 위해 수없이 옷을 갈아입고 노인들은 지난하게 계절을 견뎌온 옷의 날개를 접으며 생의 끝으로 걸어간다. 수천 번의 밤과 낮을 수놓은 육체의 섬모 속에는 검푸른 죄의 공모가. 물빛어린 젊음의 오만함이. 소멸에 이르지 않으려는 광기가. 흙속의 차가움을 견디지 못하리라는 허덕임이 그득하다. 범람한 육체에는 더운 영혼의 입김이 이르지 않는다.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가 너와 나의 육체인가. 내가 쓴 가면은 바로 내가 아닌가. 내가 쓴 가면은 바로 내가 아닌가. 혹은 옷을 벗어버린 우리란 그저 무(無)가 아니었을까 그 대답을 찾기 위해 호랑가시나무 숲을 찾아간다. 숲속에서의 기억은 파멸을 예고하지만 가지 않을 수 없다. 왜나하면 인생이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보다 뭐든 일어나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혹자는 장성회가 이제 신랄해졌다. 삶에 대해 어두운 부분을 보기 시작했다고 이야기를 해요. 맞는 부분도 있고 아닌 부분도 있죠. 나이가 드니까 삶에 대해 공평해지는 시각이 있어요. 선과 악율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채적인 것. 있는 그대로를 봐야겠다는 그것이죠. 전에는 제가 보고 싶은 면만 본거죠. 또 한편으로 제 세계관은 여전히 긍정적 이고 따뜻해요. 이걸 쓰면서도 던진 질문은 정말 일부일처 결혼제도라는 것이 인간에게 어떤 인간적인 것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거든요. 자본주의에 내포된 재산상속 내지는 일부일처제의 이기심 말고 인간에게 이 제도가 고안되었을 때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렇게 해서 제가 답을 찾은 부분은 이런 거예요. 이 극의 구성이 처용에 제사상 차리는 놀이로 시작해서 끝에는 문상놀이로 끝나거든요. 자식이 죽었는지 유학 갔다 안 돌아왔는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제사상 차려줄 자식도 없다면 결혼제도라는 것이 인간이 죽을 때 기품 있게 죽게 해줄 한사람은 있는 것 아닐까. 그래서 전 자주 남편한테 "당선이 나중에 죽어. 내가 먼저 죽을게.- 이래요.(웃음) 인간이 인간다움을 유지하면서 삶을 정리하게 해주는 최소한의 제도. 어떤 사연도 있을 수 있고, 배신도 있고. 고통도 주고 극 속의 중년부부처럼 굉장한 증오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이 주는 따뜻한 배웅에 대해서…. 아직은 인간이란 서로 기대고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현재 저의 인생관인 거죠.
제가 쓰고 싶어 하는 말들이 있는 것 같아요. 연극을 볼 때 제가 듣고 싶은 말의 총량이라는 것이 있거든요. 그런데 일상적인 말이라도 작가가 삼백 개의 어휘를 버리고 버려서 삼십 개의 단어로 말을 쓰면 그 내공이 전해지는데 삼십오 개의 어휘를 가지고 삼십 개를 쓰면 재미가 없어요. 그래서 제 취향에는 연극을 보러 다닌다기보다 들으러 다닌다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사실 그래서 비난도 많이 받아요. 언어가 너무 문학적이라든가 단박에 안 들어온다든가. 실재로 연습하면 첫 리딩 때 배우들한테 공격을 많이 당하거든요. 나중에 공연 끝나면 배우들이 씩 웃으면서 공부도 많이 되었고 이런 말로 연극을 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고 하고. 사실 이런 낯선 말들. 사라진 말. 잊힌 말들로 공연을 하려면 6.7개월은 연습해야 되는데 제작여건상 두 달 정도 연습해서 배우들이 그 말을 그냥 몸에 우겨넣은 상태에서 나오는 거죠. 이제는 나이가 드니까 뱃심이 생겨서 상처 안 받는데 마흔 전까지는 내가 정상이 아니고, 내가 다른 말을 쓰고, 연극을 오른다는 자괴감에 진짜 접으려고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에요. 지금은 말만 승하거나 말만 넘쳐서는 연극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죠. 이제 조금 저 나름대로 그 사이의 긴장을 잘 찾아가는 어떤 방법이 생기기 시작한 거죠. 재미있어요. 그리고 사실은 이렇게 점점 세계연극을 따라 신체연극으로 가고 있는데 언어중심의 연극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모국어를 어떻게 지켜야 할지의 문제는 작가들이 반드시 고민해봐야 할 숙제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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