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재현 '코리아 게이트'

clint 2015. 11. 13. 16:25

 

 

 

극단 부활이 초연 공연한 이재현 작·연출의<코리아게이트>(1988. 11)는 1970년대 한미외교상 가장 큰 위기를 몰고 왔던 이른바 ‘코리아게이트’ 중 김한조 사건의 전말을 추적한 서사극이다. 잔체 2부로 구성된 이 작품은 김한조라는 재미동포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가 정치적 스캔들에 휘말리게 되는 과정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있다. 성공한 재미 사업가 김한조는 유신통치문제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시각이 비판적으로 흐르자 한국방문시 우연히 만나게 된 박대통령, 그리고 그의 부탁으로 마국에서의 친한활동을 조직적으로 추진한다. 미의회와 행정부, 백악관 언론계등 광폭 활동으로 반한 파를 잠재우고 포드대통령 방한, 주한미군 감축안 부결, 주요언론 기고, 등을 이룬다.
그가 박동선과의 다른점은 돈으로 매수하거나 불법적인 태두리가 아닌 여러 아는 인맥을 통해 진정한 한국의 상황을 이해시키고 도움을 받는 식이었다. 그러나 박동선의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터지고 중정의 일부 인사가 정치적 망명으로 김한조에 불리한 증언등으로 결국 한국과 미국의 대형 스캔들로 번질 뻔한 사안을 본인의 비리로 막고 실형을 선고 받는다. 그는 미국의 그의 정관계 지인과 한국 관련자에 대해 모두 입을 다물어 신의를 지킨다. 그러나 결국 그 후유증으로 회사는 망가지고 한국은 10. 26 사태로 묻혀진 역사릐 길로 빠진다.

제 3공화국의 박대통령,육영수 여사, 김 재규, 김 형욱 둥이 등장하는 소재 자체의 시사적 흥미, 김한조라는 불운한 낭만주의자가 극중인물로서 주는 매력이 극적 긴장감을 조성한다. 이 연극이 보다 의미있는 기록극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려면 유신정치 한미관계의 변화, 대미로비의 당위성 등의 균형적 시각과 보다 객관적으로 보완되는 동시에 신문이나 사진, 그리고 참고 기록물, 동영상등이 무대 연극과 잘 조화되게 이끌어야 작가가 의도하는 권력앞에 무너지는 한 인간의 무력함이라는 주제도 더불어 살아나지 않을까 한다.

이재현의 서사극은 표현의 측면에서는 기록적인 성격이 강하며, 소재의 측면에서는 실화를 활용하는 특성을 보여준다. 분단현실과 이념대립, 유신독재로 이어지는 살벌한 1970, 80년대에 이재현은 금기시되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이슈를 과감히 채택하여 극화하였다. 현실비판의 측면에서 희극적이고 우회적인 성격이 강한 이근삼의 서사극과 달리, 이재현의 서사극은 비극적이고 직접적이다. 그런 점에서 이근삼에 이은 이재현의 등장으로 한국 서사극은 비로소 균형과 조화를 확보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코리아게이트
1976년 10월 15일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지는 한국이 미 국회의원들을 매수,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재미 한국인 사업가 박동선과 한국 정보기관 요원들이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뇌물을 주었다는 내용이었다. 이 신문은 9일 뒤 한국측이 미 의원들과 고위관리들에게 수백만 달러를 제공했다는 후속기사를 내보냈다. 미 언론들은 워터게이트가 백악관과 미 행정부를 파멸시켰다면, 이 사건은 의회를 파탄으로 몰아갈 것이라는 예측아래 ‘제2의 워터게이트’라고 부르며 진상을 파헤치는데 몰두했다. 처음 보도된 박동선 외에 재미 사업가 김한조, 김상근과 이상호 등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코리아게이트’의 핵심인물로 떠올랐다. 조사가 진행되면서 미 정보기관의 한국 청와대 도청이 드러나자 한국 정부는 도청을 문제 삼아 미국 의회와 국무부가 요청한 박동선의 송환을 거부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의 회담을 거쳐 1977년 12월 31일 한미 양국은 박동선이 미국 정부로부터 전면사면권을 받는 조건으로 증언에 응할 것이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1978년 2월 23일 미국으로 건너간 박동선은 미국 상·하원 윤리위원회 증언에서 한국에 대한 쌀판매로 약 920만 달러를 벌어 이 중 800만 달러를 로비활동 등에 지출하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4월 3일 공개청문회에서 그는 전 하원의원 해너 등 32명의 전·현직 의원들에게 약 85만 달러의 선거자금을 제공하였으며, 1972년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후보 닉슨에게도 2만 5천 달러를 제공하였다고 밝혔다. 123명의 미 정치인·관료들이 소환되고 1,500명이 넘는 참고인 진술이 이루어졌으나 현직의원 1명만 뇌물수수로 유죄 판결을 받고 3명이 의회 차원에서 가벼운 징계를 받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뇌물 제공의 주역이었던 박동선도 면책특권을 이용한 사면을 받았다.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의 프레이저 소위원회와 윤리위원회는 1978년 11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조사보고서를 발표했지만 사건의 구체적인 실체를 밝히는 데는 실패했다고 말했다. 뇌물 공여를 통한 불법적 로비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부정부패에 대한 염증이 극에 달했던 미국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각인시켜 커다란 손실을 초래했다. 결과적으로 주한미군의 전면적 철수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한방위공약도 지켜졌지만, 불법적 로비에 의한 것 이라기보다는 미국의 사활적인 이익이 걸려 있는 동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지 한국의 중요성을 미국의 정치지도자들이 인식하고 있었던 결과라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한 해석일 것이다.

 

 

김한조
1953년 화물선을 타고 미국 유학길에 오른 김씨는 아메리칸대학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약회사 말단 사원으로 시작해 화장품 회사 존 앤드 비 디(John&Bee Dee)를 설립한 김씨는 1973년 한 해에만 2100만달러의 매출을 올리며 성공 가도를 달렸다. 김씨는 이 시기 대미 로비스트로도 활동했다. 당시 우리 정부는 미국을 설득해 주한 미군 감축에 따른 보완책을 마련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워싱턴을 기반으로 인맥이 넓었던 김씨와 재미 사업가 박동선씨 등은 미 의회 의원들과 관리들에게 암호명 '백설(白雪) 작전'으로 불리는 로비전을 벌였다.
김씨의 로비 활동은 1976년 10월 15일 워싱턴포스트(WP)지가 보도하면서 드러났다. 신문은 "박정희 정부가 1970년대 들어 재미 실업가 등을 내세워 50명 이상의 전·현직 미 의회 의원과 미 정부 관리에게 매년 50만~100만달러의 금품과 선물을 전달했다"고 폭로했다. 미 언론들은 닉슨 대통령의 몰락을 불러온 워터게이트 사건에 빗대 이 사건을 '코리아 게이트'라고 불렀다. 당시 위증과 매수 혐의로 기소된 김씨는 1979년 7월 앨런우드 미 연방 교도소에 수감됐다. 같은 해 11월 28일 출감한 그는 주변을 정리하고 1981년 귀국했다. 그는 이후 서울 동작구 흑석동 인근의 허름한 집에 홀로 살다 최근에는 조카와 함께 구로구의 아파트에서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평소 주변 지인들에게 "미국에서 화장품 사업을 할 때 데리고 있던 직원만 8000명이었는데, 끝내 사업도 망하고 재산도 다 빼앗겼다"면서 "국가를 위해 내가 한 일이 묻힐 수는 있겠지만, 국가를 위해 개인만 희생당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김씨는 1995년 펴낸 자서전 '코리아 게이트'에서 "파출소 한번 가본 적이 없는 내가 교도소에 수감되는 것은 엄청나게 치욕적인 일이지만 4000만 국민을 생각할 때 참을 수 있었다. 내가 보여주었던 애국심을 정부와 우리 국민이 높이 평가해 모든 국민의 애국심으로 연결되리라 생각했다"면서 "그러나 조국에 돌아온 뒤 모함과 멸시, 무관심 혹은 외면으로 지내왔다"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