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용락 '타인들'

clint 2015. 11. 13. 10:36

 

“타인들”은 이채로운 작품이다. 한국의 현대인과 고대인을 한 무대에 등장시켜 놓고 하루의 일과를 뚝 보임으로써 두 계층의 가정이 가정답지 않고 부부는 남남이라는 가벼운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기계화되어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날카롭게 비판한 작품이다.

 

 
김용락의 호는 남강(南江)이며 한 때 漢江이란 호를 쓰기도 했다. 그는 1935년 9月 15日 충남 부여에서 5남매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중학교까지는 부모님 슬하에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일찍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서 거의 學校를 고학으로 졸업했다. 그러므로 그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에 재학 시에는 불철주야 활동을 해야 했고, 특히 1학년 때는 20여 가지의 학문의 입문서, 개론서를 독파한 후 학문학의 체계를 세워 보려고 할 정도로 학문자체에 매력을 느끼기도 했었다. 이렇게 바쁜 가운데서도 틈이 나면 그는 고뇌와 번민 속에서 죽음까지 생각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철학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부모님의 죽음이 안겨다 준 아픔은 컸으나 그런 아픔을 철학서적을 통해 이겨 나갔고 이러한 철학에의 관심은 그 후에 심리학에까지 몰두하게 만들었다. 그는 프로이트를 비롯, 융, 아들러 등의 이론에 심취하게 되면서 이에 대한 관심은 관심으로 끝나지 않고 실제 동료나 친지들을 대상으로 심리검사를 비롯, 정신치료까지 해 주는 등 깊이 파고들어 갔다. 그가 60년대 초반에 내놓은 "유산 없는 젊음들", "완전한 이성","노이로제와 그 치료" 등을 비롯하여 연전에 내놓은 "노이로제 고치는 책" "정신력을 키우는 책" 등은 모두 이러한 그의 실험정신과 연구에 의한 결정체이다.
이러한 그의 심리학, 철학 및 최면술에 대한 깊은 연구 때문에 그는 대학시절의 작품창작에 대한 꿈을 억압하였으며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교단에 서던 시기에야 비로소 그는 작품창작에 임하게 되었다. 그가 처음 교단에 선 것은 덕성女高 (1963ᅳ65)이며 그 후 여러 해 동안 중동고교 (1965- 70)에서 영어를 가르쳤는데 중동은 이미 씨가 부임하기 전에 학생극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던 학교였다. 그 당시 中東에서는 연출가였으며 현재는 미국으로 이민간 이효영씨가 연극반 지도를 맡고 있었는데 李孝英씨가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자 그 후임으로 연극반을 지도케 된 것이 씨가 연극과 인연을 갖게 된 동기였다. 그 이전에는 대학의 컬리큘럼에 '영미희곡'이란 강좌가 있었고 서울사대 연극부의 활동이 활발했으나 그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1964년 MBC 개국2주년 기념 30회 연속방송극본 모집에 "미로로 달리는 사람들" 이 입선 되었을 때 심사 위원이었던 차범석 선생의 권유로 희곡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이 희곡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연극반을 맡았으니 당연히 작품은 자기 스스로 직접 써야만 했다. 그의 처녀작인 학생극 "문제아들" 이나 그 후의 발표작 "분발"은 모두 그런 인연의 소산이다. 이 두 작품의 상연은 동랑 유치진 先生의 찬사를 받았다. 여기에 힘 을 얻은 그는 그 후 계속해서 희곡을 써내려 왔는데 1968년 최초의 장막 "동트는 새벽에 서다" (문공부 공모 장막희곡의 당선작)로 문단에 데뷔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씨가 본격적으로 희곡에 집념한지 4년 만이고 문학에 신경을 쏟은 지 10여 년 만에 그의 꿈이 이루어진 셈이다. 씨는 후에 국립극단 제52회 공연으로 상연된 "동트는 새벽에서다" 팜프렛에서 .
"10여년의 집념이었다. 도무지 재능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몇 번씩이나 집어치우려 했다. 그러나 글을 쓴다는 일이 어언 내 몸의 한 부분이라도 되었단 말인가? 버리려면 한쪽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허전함과 아쉬움이라서 10년이 긴지도 모르게 갔다." 라고 스스로 10여 년을 문학창작에 집념한 것을 밝히고 있다. 1968년 당선되던 해가 씨의 나이 33세였음을 보면 문단에 데뷔한 것은 그렇게 빠른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계속하여 "막 붓대를 더 잡을 기력이 없어 失意에 빠져 있을 때 받아든 당선 소식은 내 재능보다도 노력을 더 산 神의 뜻이기 라도 하단 말인가? 그러나 이런 소식이 없어도 어쩔 수없이 여전히 작품을 쓰고 있을 나를 알기에 뜻밖에 안겨준 기쁜 소식은 내 노력을 배가해 줄 뿐이다." 라고 술회했다. 기실 그의 "동트는 새벽에 서다"는 그의 말마따나 "내 재능보다도 노력을 더 산" 작품으로 작품 자체가 그리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작가 스스로 알고 있는 터이기에 그는 그후 더욱 노력하게 되었고 곧 이어서 발표된 씨의 여동생 김현숙의 작품상연은 ("바벨탑 무너지다")그의 노력을 배가 하게끔 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그의 작품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보면
첫째,劇作家이면서 연극 評論家인 그는 1966년 處女 戯曲을 내놓은 이래 1980년까지 무려 42편의 희곡을 집필했다. 평생을 演劇에 투신해 왔던 유치진先生이 40여 편, 이광래 先生이 50여 편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는 15년 만에 42편의 작품을 집필했으니까 그들을 이미 능가하고 있는 셈이며, 현역 작가 차범석 先生도 多作의 作家이긴 하지만 그가 지금처럼 계 속 써 간다면 그분마저도 능가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셰익스피어가 평생에 쓴 희곡이 38(거의 장막)편이나 거의 수준급의 작품이며 소위 아일랜드의 싱그가 6, 7편의 희곡으로〈아일랜드의 셰익스피어〉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을 보면 많은 戯曲을 쓴다고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많은 희곡을 씀으로써 보다 훌륭한 내일을 기할 수 있다는 사실과 관련지어 본다면, 그리고 많은 희곡 가운데서야 주목받는 희곡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여긴다면 창작희곡 부진이란 우리의 풍토에서 하여간 김용락은 한국에서 가장 희곡을 많이 쓰는 多幸한 劇作家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둘째, 그는 1970년 서울신문 연극평론부문에 그의 평론 "비극성의 고찰"이 입선된 후 2, 3년 동안에 걸쳐 신아일보에 연극 평을, 月刊文學에 戯曲 評을 발표하고 있었다. 그 評論들 가운데서는 戯曲은 공연으로 이어졌을 때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라고 간간히, 그리고 강력히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自意에 의해서 쓰여 지던 타의에 의해서 쓰여지던 自意半 他意半에 의해 쓰여 지던 모두 상연을 목표로 삼았다. 그 가운데서도 他意에 의해서 쓰여진 게 많은 까닭에 그의 작품은 다양한 주제, 여러 계열의 작품을 내놓게 되지 않았나 여긴다.
(대다수 작가가 초기에는 실험하기 위해 여러 형태의 작품을 내놓는 경우가 있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극단 에저또와의 인연으로 인해 극단 에저또의 프로그램에 맞는 작품(이를테면 마임드라마)을 쓰기도 했던 건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최근 작품경향을 보면 이를 불식 하고 앞으로는 作家의 의식이 분명한 작품을 쓸 가능성은 충분히 볼 수 있다.
셋째, 素材와 主題의 선택을 보면 그는 그 어느 작가보다도 다양함을 볼 수 있는데 이 점은 자칫 작가에게 있어서 장점이자 단점도 될 수 있다. 劇作家가 어느 작가보다 욕심이 많은 경우 다양한 소재, 다종의 주제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지만 작가가 하나의 시도에서 만족치 못할 경우 다양한 작품이 나오는 경우도 흔하다. 그러니까 이 점은 작가가 자기의 방향을 잡지 못한 경우에 더 흔히 나타나기 때문에 장점보다는 단점이 될 수도 있는 소지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경우, 초기작품을 보면 거의가 일정한 방향이 없는 작품을 볼 수 있는데 반해 후기의 작품을 대해 보면 그가 추구하는 소재나 테마는 다양성은 그대로 지니고 있지만 의식은 확실해진 것 같다. 이는 그의 욕심이 작용한 것이리라 믿는다. 그는 확실히 욕심이 대단한 작가이다. 그의 작품 소재상의 계열을 가르면 역사나 전기, 설화에서 소재를 가져온 경우와 도시의 소시민의 생활상을 다룬 것이 대부분이며 농촌을 배경으로 삼은 작품의 가능성도 엿보인다. 첫 번째의 경우에 해당 하는 작품으로는 "꿈속의 연인" "東里子博" "將軍은 말이 없다" "청산리 벽계수야" "장화와 홍련" "홍도야, 마음문 열어라" "장끼전""피그말리언" 등을 들 수 있고, 둘째의 경우에 해당하는 작품으로는 "우물 안 영도자" "어떤 小市民" 을 비롯하여 "열한개의 出産" "돼지들의 산책" "새 인형의 집"「내 취미는 전직"등의 작품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해당하는 작품은 "위대한 유산" "타인들" 을 들 수 있는데 이 작품으로 출발하여 그는 (그동안 경우를 보더라도) 몇 작품에서 다시 촌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쓸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다.
작가가 즐겨 다루는 테마는 여러 가지이나 우선 씨가 대학시절의 관심사였고 현재도 연구 중인 精神分析學은 그의 작품의 주제 포착에도 크게 영향이 되었고 또 그의 敎育界의 生活은 계몽적이며 교육적인 소재의 발굴은 물론, 그의 테마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전자에 속하는 작품으로는 "부정병동" "화해" "연약한 침입자" "내 趣味는 轉職"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공모살인" "뮥시록" 등이며 後者에 속하는 작품은 "問題兒들" "분발" "동트는 새벽에 서다" "사돈의 車" "落郷" "窓" "特講""환갑잔치" "大遺産" 등이 이 영역에 속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본다면 作家는 현실적인 사회고발의 작품으로 "어떤 小市民" "달나오기" "돼지들의 散策" "行先地" "내 趣味는 轉職" "태초에 말씀이 계십니다." "새 인형의 집" "不贞病棟" "東里子傅" "타인들" "연약한 침입자" 등을 다루었고 사랑의 테마로서는 "파도가 있는 풍경" "새 인형의 집" "타인들" "벽이 없는 집" "和解" "꿈속의 연인" 등을. 서로 약간 차이는 있으나 다루고 있으며 권선징악문제로서 "東里子傅" "共謀殺人" "열한개의 출산" "홍도야, 마음문 열어라" 등을 다루었다. 특히 종교적 입장에서나 또는 인간적 입장에서 인간 구원의 문제를 중요시 했는데 "묵시록" "연약한 {침입자" "피그말리언"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등이 이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작가는 한국인의 故郷은 농촌이라고 여기고 농촌은 앞으로 점점 사회가 발달될수록 더욱 부각되어야 한국의의 脈이 存在한다고 생각하고 농촌에의 귀의 문제, 노인문제에 신경을 쏟았다. 「동트는 새벽에 서다」 「위대한 유산」 「落郷」과 「환갑잔치」는 그 좋은 예이다.
넷째, 登場人物과 그 성격을 보면 이도 역시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모든 작품들이 서로 相反된 性格의 對照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성격의 미약함 때문에 構成上에까지 미약함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옛날처럼 성격의 대조에서 오는 극구성은 현대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묘한 성격 차에서 오는 미묘한 갈등이 바로 현대극의 구성 요소라고 한다.
어쨌든 그 때문에 그들이 쓰는 대사나 動作도 극적 대결이 되는데 아쉬움이 있는 것 같다.
다섯째, 사조 상으로 보면 최근에 활동하는 현역극작가들 거의가 寫實主義와 반사실주의를 함께 맛보게 되었는데 씨도 역시 처음에 사실주의 연극을 쓰다가 차츰 소위 내용, 인물의 성격, 구성 자체의 고정관념을 배격하는 이른바, 超現實主義 劇, 實驗劇을 쓰게 되었는바 60년대 이후에 이런 풍조가 밀어 닥친 데서 그런 결과가 오지 않았는가 여겨진다. 그러나 최근의 작품에선 이러한 혼란이 사라지고 있다. 소위 자기 나름의 手法과 演劇性을 회복한 셈이다. 그의 작품을 思潮上으로 區別한다면 크게 사실주의희곡과 반 사실주의희곡으로 구별할 수 있는데 이번에 그의 作品선집에 담은 것을 중심으로 분류하면 사실주의희곡으로서는"연약한 침입자" "사돈의 車" "壁이 없는 집" "첫 夜行" "내 趣味는 轉職" "默示錄" "동트는 새벽에 서다" "共媒殺人" "환갑잔치" "不貞病棟" "피그말리언"등을 들겠고 반 사실주의희곡으로서는 "和解" "열한개의 出産" "痛木" "어떤 小市民"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꿈속의 연인" "달나오기" "돼지들의 散策" "태초에 말씀이 계십니다." "行先地" "파도가 있는 풍경" "將軍은 말이 없다" "東里子傳" "타인들" 등이 이에 속한다.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하고 표현력이 풍부한 劇作家라도 탁상 앞에 앉아 쓴 희곡이 무대화될 때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흔히 본다. 따라서 劇作家의 경우 탁상 앞에서 끝내버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소위 연극을 만드는 모든 사람과 상호협력을 함으로써 戯曲은 그 本然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작가의 작품이라도 연출의 능력에 따라 좌우된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작품은 수준 이하라 해도 훌륭한 연출가와 협력함으로써 훌륭한 희곡이 완성될 수도 있다. 작가 金容洛씨가 극단에 관여했을 때 가장 많은 작품을 냈고 또 公演을 통해 많이 그의 작품이 수정되고 가필된 것을 몰 수 있다.
이런 점은 세계적인 작가들의 경우 대개 그들이 극단에 직접 뛰어 들어 함께 창조 작업에 임한 것을 통해서 충분히 증명된다. 한 작가의 희곡은 한 극작가의 소유물만은 아니다. 희곡은 연극의 일부분으로서의 가치밖에는 없기 때문에 演出家 배우 등 무대를 형성 하는 모든 요소에 좌우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의 지적대로 운이 없는 극작가이다. 무대에의 정면도 있지만 이상하게 그의 작품은 다른 극작가에 비해 상연되는 비율이 적었다. 이는 그의 결함인지 아니면 우리 연극계가 너무 몇몇을 편애하는 때문인지 알 길이 없다. 이 작품집이 나옴으로써 씨에 대 한 평가가 다시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 간질하다. 그리고 작품집을 여러권 씩이나 한꺼번에 내는 그의 이유도 바로 그 점에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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