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곽병창 '꼭두,꼭두!'

clint 2025. 3. 17. 06:34

 

 

1944년, 회유와 강제에 밀려 징용에 나간 만배는 사할린의 탄광에서 
살인적인 노동량과 비인간적 대우, 민족적 멸시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일본인 십장을 동료 춘보와 죽이고 밤배를 빌어 탈출하지만 
풍랑을 만나 주저앉고 만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해방을 맞는다. 
일본인들은 모두 본토로 귀환하는데 조선인들은 귀국의 길이 영영 막힌 
중에 만배는 수용소에서 오직 귀향의 날만을 기다린다.
수년이 흘러 몇몇은 공민증을 얻어나가고, 공민증을 받으면 귀국의 길이 
막힐 것을 우려한 만배와 춘보는 탄광일을 계속한다. 비인간적인 대우를 
견디다 못해 조선인들은 시위를 벌이는데 춘보는 정신병원으로 끌려가고 

만배는 병원에 입원한다. 간호원 까챠의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퇴원 후 
그녀와 결혼해, 공민증을 얻어 국적 취득하고 협동농장에서 일하게 된다.

1990년 조선인들에게 모국 방문 및 영구 귀국의 기회가 열리는데, 
대부분 소련인 아내와 자식이 있어, 마냥 반가운 것은 아니다.
만배도 같은 입장이지만, 고국에 가고 싶은 마음에 아내와 미묘한 갈등이 싹트고, 

개방이후 자본주의적 사고로 재빠르게 움직이는 동료들은 귀국에 회의적이다.
어렵게 결정해 한국에 돌아온 만배의 고국에 대한 환상은 이내 꺼진다. 
평생 그리워 하던 아내는 이미 딸과 사위에게 눈치밥 먹으며 얹혀사는 
노인네가 되었으며, 손녀는 느닷없이 자신의 인생에 끼어든 냄새나는 
할아버지를 홀대한다.
결국 그는 귀환 노인들을 집단 수용한 양로원에 들어가 비슷한 내력을 
지닌 노인들 틈에 서 가끔 찾아오는 아내를 기다리며, 또 언젠가 한번쯤 
소련의 아내에게도 돌아갈 생각을 하며, 쓸쓸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1993년 9월 제11회 전국연극제 대통령상, 연출상을 수상한 곽병창의 창작 희곡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만은 아니다. 외세 강점과 분단으로 이어진 우리 현대사의 격량속에서 처절하게 찢기고 할퀸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들만의 것이 아님은 무엇보다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꼭두」는 거창하게 조국애니 민족의 비극이니를 말하지 않는다.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고 있다. 그들의 그리움의 대상은 사사롭다. 늘 보아오던 고향의 산천이 하늘이다. 그리고 그땅에서 자신을 기다릴 사람들, 아내 , 아들, 부모,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다. 또 닮음꼴에 대한 동경이다. 대일본 제국, 쏘비에트 연방, 북조선, 남조선이 거론되지만 그들에게는 모두 그들을 가로막는 거대한 벽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러기에 역설적일지 몰라도 「꼭두」는 정말 지순한 사랑이야기가 될 수 있다. 「꼭두」가 담고 있는 이야기를 끌어나기는 힘은 당연히 꼭두극에 있었다. ′우리의 전래인형극인 꼭두 표현양식을 인용해서 전라도 사투리 특유의 더없이 질팍하고 리드미컬한 요설을 한껏 자랑해 보이면서 그것을 매우 해학스레 과장된 인형의 아가리의 개폐동작과 절묘하게 조화시킴으로써 관객을 압도해버렸다′는 전국연극제 심사위원들의 말처럼 「꼭두」의 형식실험의 핵은 여기에 있었다.  

 

 


<<연극을 통한 따뜻한 세상 만들기>>- 작가 곽병창
상을 받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한동안의 작업을 누군가라도 인정해 주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 작업의 정당성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고 절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수상이 단원들 모두가 시난고난 엮어 온 연극인으로서의 일상에 작은 빛이나마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거울 없는 방에서 화장을 하는 것처럼 우리는 아주 오랜 동안을 모종의
불안감에 시달려 왔습니다.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 누구 없을까? 잘한다고 박수 쳐 주고 쉽게 돌아가는 관객들, 어려운 일 이어간다며 등 두드리고 술 사주는 지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늘 우리가 하는 일이 정말로 이 세상에 얼마만큼 보탬이 되고 있는지를 묻곤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의 삶에 이 일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일까? 하며 초조해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수상은 다행스런 일입니다. 하지만 상을 받는 일이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보상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상을 받은 일이 우리들 팔뚝에 빛나는 완장 하나씩을 채워 주는 일일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더욱 깊이 절망하는 순간과 더욱 눈부신 날들이 우리 앞에 있을 것이고 그 속에서 전과 다름없이 이리저리 내몰리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렇게 쉬지 않고 매진할 것을 다짐합니다. 왜냐하면 연극이 세상의 차가운 곳을 따뜻하게, 비뚤어진 곳을 곧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아직은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연극의 한복판에서 공연하게 된 것을 단원 모두와 함께 기뻐합니다. 날카로운 질책으로 저희를 올바르게 세워 주시길 바라며, 이 공연에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머리 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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