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의 1900년도에 세워진 터어키식 공중목욕탕이다.
허영과 사치로 자기를 만족시키는 부류를 대변하는 댄서 조시,
평범한 가정주부에서 남편의 외도에 무방비 상태로 이혼을 당한 낸시,
그리고 성폭행을 당해서 남성 편협과 결벽증을 가진 단,
딸의 정신이상 때문에 일생동안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단의 어머니 메도우
각기 다른 생활환경을 지닌 6명의 여자들이 등장한다.
항상 하고 픈 대로 하며 살아온 조시와 사회적 지위와 책임의식으로 인간 본연의
욕구를 이성으로 자제해온 낸시가 트러블의 꼬리를 형성한다.
각기 개성을 가진 여인들은 살아가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주고받는데
낸시와 조시는 서로에게 벽을 쌓고 이질적인 생활과 사고로
서로를 경계하고 충돌하게 된다. 그러나 불우했던 과거와 현재의 성생활을
솔직하게 얘기하는 조시의 푸념이 낸시의 내적으로 잠재된 욕망을 이성으로
자제해온 삶에 솔직하게 눈을 뜨게 되는 매개체 역할이 되서
둘의 벽은 허물어지고 서로의 동질성을 확인하고 화해한다.
이런 상황에 목욕탕을 없애고 시립도서관을 세운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주말이면 모여서 위로를 받는 절실한 장소였던 이곳의 폐쇄를 여인들은
강력히 반대하게 되고 공청회가 열리는 등 맞서나 결국 수용되지 않자,
여인들은 목욕탕을 사수하기 위해 다시 뭉친다.
영국 여류작가 넬 던(Nell Dunn)이 쓴 이 희곡은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는 페미니즘 연극 시리즈의 하나다. 이런 종류의 연극은 주로 여성 관객이지만, 주중에도 꽤 사람들이 몰려들어 주최측을 기쁘게 한다고 들었다. 줄거리는 대개 비슷한 것으로 이기적이고 편협한 남자들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실컷 흉보고 분풀이하는 게 정석이라 재미도 있거니와 일종의 카타르시스 효과도 주기 때문에 여성 전용물이 되었다. 이 연극의 무대는 20세기 초 어느 시에서 운영하는 공중목욕탕이다. 여섯 명의 여자들이 제각기 다른 삶과 상처를 들어 내보이면서 부당하게 당한 억울함을 호소하고, 들어주고, 웃고 울고 하는 신세타령과 넋두리로 관객의 대리 경험을 연출한다. 이 여인들은 정숙하고 아름다운 아내를 하루 아침에 배반하는 남자, 밥 먹을 때와 잠 잘 때 이외에는 여자에게 도통 관심이 없는 남자, 철없는 딸을 범한 남자, 꿈도 낭만도 없는 속물적인 남자의 피해자들이다. 세상 남자들이 모두 다 이렇지는 않을 텐데 여섯 명의 여자들은 한결같이 문제가 있는 남자들만 만났다. 작가는 물론 여자들이 신세타령이나 하고 끝낼 것이 아니라 각자 정신을 차려, 그들의 공동 적을 물리치기 위해 홀로서기를 명한다. 그래서 알몸에 타올 한 장을 걸치고 무대를 종횡하던 여자들이 일치 단결하여 타올을 벗어던지고 탕 속으로 풍덩 뛰어드는 것으로 막을 내리게 한다. 거추장스런 껍데기 장식과 옷을 벗어던지는 행위와 욕탕에서의 자유로움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가의 의도를 나름대로 짐작하면서 새삼 여성 문제의 현주소를 짚어보았다. 『인형의 집』 이후 근 일세기가 지나도록 별로 달라진 게 없다면 여성 문제의 대처 방안이랄까, 해결책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좀더 직설적으로 말해 일방적인 공격 일변도로 여성 문제가 해결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이다. 이런 생각은 그 전날 대중탕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한층 더 구체적으로 떠오른 것이다. 아파트가 생기기 전에 단골로 다녔던 동네 대중탕은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그때 주인 여자가 백발이 되었지만, 아직도 건재하고 있는 게 반갑다. 아파트의 욕조가 답답하게 느껴질 때, 혹은 비나 눈이 내려 어디든 훌쩍 나가고 싶을 때 나는 이곳을 찾는 버릇이 있다.
모두 합해서 열 개가 넘는 수도 꼭지에서는 계속 물이 흐르고 있건만, 누구 하나 잠그는 사람이 없다. 내 집 물이라면 저렇게 낭비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우리의 이기심의 극단을 보는 것 같아 서글픈 마음이 앞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서글픈 것은 여자들의 무디고도 두터운 불감증이다. 섬세한 감각이나 부끄러움이 여성의 천부적인 속성인 것처럼 단정하는 것은 근거 없는 편견일 수도 있다. 다만 남에 대한 배려나 자신에 대한 수치심이 결여된 정신상태는 남녀의 성별과 상관없이 추하게 보일 뿐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여성의 짝이 될 수 없다. 행여 ‘욕탕의 여인들’의 넋두리가 진일보하여 서울의 여자들이 이렇듯 몰염치해진다면 이는 여성 문제 해결에 별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영국의 시인 워즈워스는 사람들의 마음과 시대 상황의 관계를 매우 밀접한 것으로 보았다. 사람들의 마음이 자꾸만 거칠어지고 야만적인 마비상태에 빠져드는 것은 전에 없었던 대형사고와 인구 밀집현상에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에 동의한다면, 우리의 현실을 놓고 볼 때 목욕탕의 여자들뿐 아니라 다른 공공장소에서의 무질서와 공격적인 언행,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작태의 원인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거칠고 야만적인 상태에서 벗어날 의무가 있다고 본다. 그것은 참을 인 자를 하루에 백 번씩 외우는 옛날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또한 땅에 떨어진 도덕심을 회복하는 사회운동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단지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오래도록 지키기 위해서다.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여성은 아름답기를 원한다.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도 화장하기를 단념하지 않는 여인들의 진정한 아름다 움은 의외로 단순한 데 있다. 그것은 섬세한 느낌과 부드러움을 아는 내면적인 것으로 어떤 비싼 화장품도 이를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예외는 언제나 있겠지만, 우리의 대인관계는 남녀관계, 부부관계를 포함해서 이런 내면적인 아름다움을 높게 인정할 때 스스로 부드러워질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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