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귄터 아이히 '다섯 번째 꿈'

clint 2025. 3. 13. 08:23

 

 

뉴욕 리치몬드 가에 사는 루씨 해리슨 부인은 1950년 8월 31일 오후 치마 솔기를 꿰매다가 

깜빡 잠이 들어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다.

 

 

 

새로 이사한 딸의 집에 엄마가 찾아온다. 
그런데 딸의 표정이 불안하다. 어디 선가 모래 떨어지는 소리, 
혹은 낙엽을 밟는 소리 같은 것이 간헐적으로 들린다. 
라디오 소리와 음악 소리도 연극 중간중간 들린다. 
딸은 어째서 이렇게 불안에 떠는 걸까? 
신경을 자극하는 쌔~한 소리는 바로 뭐든지 먹어치우는 흰개미들이 
내는 소리다. 벽이며 사람들의 내장까지 모두 파먹은 흰개미들은 
그렇게 세상을 장악했다. 세상은 이미 겉모습만 남아 있어 조금만 
건드려도 우르르 무너지게 되어 있다. 껍데기만 남은 세상과 그것을 
감지한 딸은 불안하다. 소리가 들리기는 하지만 그게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며 껍데기만 남은 집에 찾아와 차를 마시는 엄마에게 딸은 묻는다. 

"모르겠어요?" "저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사위가 퇴근하고 온다. 평소같지 않게 표정이 어둡다.

장모님이 어디 계시냐고 묻고 잠깐 주무신다고 하자

인사한다고 들어갔다가 사색이 되어 뛰어나온다. 흰개미한테 파먹혔단다
결국에 벽도, 테이블도, 사위와 딸도 모두 흰개미에게 파 먹히고 만다. 

 

 

 

흰개미는 극중에서 실제로 등장하지 않고 소음으로만 존재의 확실성을 전해줄 뿐이다. 그리고 흰개미는 사물의 겉모습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 안쪽으로부터 파먹어 들어간다. 흰개미는 모든 사물을 갉아먹는다. 신이 만든 모든 사물을 갉아먹는다. 신의 사물은 무엇인가? 성경에 태초에 신은 신의 모습대로 인간을 창조하였다는 점에 중점을 둔다면, 신의 사물은 특히 인간을 지칭하는 면이 강할 것이다. 그렇다면 신은 인간의 최상의 상태, 최고의 선을 지닌 인간다운 인간, 불을 전해준 프로메테우스를 닮은 인간일 것이다. 그들은 세상을 주시하고, 비판하고 감독하는 그리고 우매한 인간을 계몽하고 각성시키는 창조자로서 문필가일 것이다. 흰개미에게 파먹히어 파멸되는 것은 완전하지 못한, 세상일에 물들기 쉬운 인간이다. 인간이 획일적인 사회에서 물신에 굴복하고 파렴치한 세상의 유혹에 중독되고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서 어제의 친구를 오늘 버리고 화려한 문명의 그늘아래 맹목적인 삶을 살아간다면, 분명 흰개미는 그의 속을 안으로부터 파먹고 겉모양만을 남겨놓을 것이다. 자아와 인간성을 상실한 인간의 모습을 한 단순한 대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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