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윤정선 '자유혼(황진의 생애)'

clint 2015. 11. 12. 17:56

 

 

 

제11회 서울연극제 참가작품으로 1987년 9월 문예회관 극장에서 (극단 여인극장, 강유정 연출) 공연되었다.
황진이를 소재로 한 작품이 꽤 여럿 있다. 구상의 작품 구히서의 작품, 김용락의 작품등... 그러나 여류 작가인 윤정선의 작품은 보다 서민적인, 그리고 인간 본연의 갈등을 다뒀다는 점에서 평가 받을 만 하다. 가장 의미 있는 시대인은 왕왕 가장 반시대적인 인물이다. 그는 언제나 시대를 초월하여 있는 인간 본원의 자유를 찾아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시대와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운다. 그러나 그것은 실은 생명력을 위한 싸움, 그 문화의 죽음에 대항하는 싸움이다. 인간을 잊은 형식적 윤리와 인습, 편견…… 한 문화가 활력을 잃으면서 각질화 되고 고착되면서 죽어가게 만드는 모든 음모가 그의 적이다. 남달리 가지는 통찰력 때문에 남들의 이해의 한계에서 자주 벗어나는 그는 보다 큰 생명의 뜻을 대변하는 존재인 까닭이다. 한식물의 맨 끝가지는 이미 굳어버린 다른 부분들이 죽은 껍질 속에 살아남기에 급급할 때에도 자꾸자꾸 빛을 찾아 위로 오르려 한다. 그것은 뿌리로부터 가장 멀리 있으되 뿌리의 영양을 가장 힘차게 끌어올리는 부분이다. 가장 생명의 힘에 충만하므로 가장 멀리 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처럼 스스로가 속한 사회와 시 대,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꾸 일탈하려고 드는 존재, 천재의 괴로움, 그의 비극, 그의 영광은 거기에 있다. 한 사회는, 한 시대는 그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이 생명의 몸부림에 보다 잘 감응할 줄 알수록 보다 힘차게 번성하고, 보다 아름다운 문화를 꽃피울 수 있다.
경국지색이라 일컬어지던 미모, 〈가냘픈 몸매〉에 〈단아한 거동〉, 그러므로 가장 여자다운 여자였던 황진은 그러나 동시에 성정이 〈호협한>く남자 같은〉여자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은 여성을 다만 경멸할 대상으로 알아야 했던 조선조 사나이들이 가장 매력적인 여자를 찬미하기 위하여 썼던 최고의 찬사였던 것이다.
양반 남성들에 있어 아내는 자식의 어머니를 뜻할 따름, 그들의 공인된 연인이 될 수 있는 여성으로는 다만 기녀가 있을 뿐이었다. 귀족들이 기생들과 어울리던 양상은 다른 무엇보다도 신윤복의 풍속도 속에 잘 노출되어 있거니와, 그 사회의 속 실상을 전해 주는 화가의 진실은 볼수록 미소롭다. 기생의 제도가 없었던들 그 내숭떠는 양반의 성윤리 자체의 존속이 가능했을까?

 


그처럼 기생은 아주 미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교방에서 닦여진 높은 교양인들이었으며, 예능인이었고, 귀족다운 천민이었다. 이 엇갈리는 귀천의 괴로운 상충 속에 그들은 흔히 〈송죽 같은 절개〉로 몸을 〈더럽히지 않는〉창녀가 되기도 했다.
부득이였건, 스스로 택하였건, 이 기구한 운명의 계층에 속하였던 황진…… 신분으로 이미 별난 인생을 점지 받았거니와, 뛰어난 미모와 재능과 매력들은 더욱 그에게 범상함 속에 안주할 수 없는 고달픔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현란한 사랑과 예술을 불사르고 떠난 그의 생애, 그것은 유교라는 실천적 생활철학이 조그만 봉건 왕조의 정치 현실에 파행적으로 접목되고 이용되면서 초래한 엄청난 인간 유린에 대한 한 의미심장한 항거로 풀이될 수 있다. 슬픈 운명이 오히려 그늘 속에서나마 아름다운 예술을 꽃피우게 한 결과를 낳았으니, 남아 의 기개와 포부를 다 펴지 못하여 울적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했던 저 임백호가 한 많은 생을 시와 노래로 휘휘 젓고 사라진, 생전에 한번 대면해 볼 기회조차 없던 기녀의 무덤 앞에 술잔을 기울이며<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이 누웠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 하노라!〉 라고 탄했을 때, 그것은 말하자면 시대를 서러워한 자의 동병상련이었던 것이다.
진이 초야에 묻혀 조용한 은자적 삶을 보낸 서화담을 그토록 경애하였던 것도 같은 맥으로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른다. 유교란 원대가 진세座世의 철학이기에, 세사나 정치에의 관심을 보일 때의 화담은 당연히 세세한 예의를 의론하곤 하였지만, 그의 사고의 기본은 보다 도가적인 것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산수를 보면 일어나 춤을 추는, 신들리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자연의 은혜에 보다 민감한 도가의 사상은 유교에 대한 하나의 안티테제로서, 무색에 가까운 순수인 흰색을 사랑해 온 한민족의 보다 깊은 뿌리와 더 잘 통하는 바 있다. 인간이 아니라 다만 남성 사회의 존속을 위하여 필요한 성적 도구에 불과하던 여성, 그들에게 있어 잔인하기 이를 데 없던 당시 사회의 두터운 윤리관을 뚫고, 바닥 깊이 흐르는 생명의 맥을 따라 솟아나온, 그리고 삶 자체가 하나의 멋진 예술이었던 시인 황진은 하나의 기적이다. 그는 그만큼 절절히 외로웠을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멋진 승리에도 불구하고 시신을 모래톱에 내다 비리라 했다는, 그의 유언으로 전해지는 말들은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패배로 인정했다는 뜻일까? 아니면 비인간적 윤리의 편견에 찌든 졸장부들의 치졸한 윤색일까?

 

 

 

끈끈한 샤만 적 전통 속에 선과 불佛의 맥이 온 산천에 살아 숨쉬고, 생활 규범에 있어서만은 유가에 지배되던 조선 사회......, 이 작품의 전반부에서는 여성으로 서라기보다는 차라리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시대에 저항하는 한 시대인의 항거를, 후반부에서는 속浴 가운데 탈속한 달인達人이 생사의 화해 속에 자신을 해방시키는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을, 그리고 조용히 꺼져가는 한 기구한 삶의 애달픔 속에 영원으로 남는 예술혼의 아름다움을 그리려 하였다.
앞서 나온 작품 「호동」이 삶 속에 매복하고 있는 비극의 정수를 추출하려 하였다면 이 작품은 그 비극을 넘어 생사를 초탈하는 동양적, 또는 한국적인 초월철학에 바탕을 둔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비극적인 갈등, 그 파국, 내적 심리의 전개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절단하는 대신 통괄하는, 어쩌면 아주 동양화적인 필법을 쓰려 하였다. 인간의 뜨거운 내면 묘사가 인생을 내시경 적으로 바라보게 한다면, 내부의 비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겉보기에 얼른 이해되어지기 어려운 (따라서 뜻밖에 비인간적으로 비쳐질지도 모르는) 천재성의 외부적인 묘사는 언제나 개인의 고귀함을 뭉개어 버리려 드는 이 세상의 한 조감이 될 수 있기 때 문이다.
누군가의 일생을 무대 위에 극화한다는 것, 그것은 매우 욕심 사나운일이며, 보다 많은 제약 속에 일함을 뜻한다. 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작자는 여기저기 조각 져 남아 있는, 때로는 모순되고 상충되는 사료들은 물론 그의 향기 높은 예술작품인 시조와 한시들을 하나도 떼지 않고 언급, 작품 속에 소화하려 하였다. 이 아름답고 오만했던 조선조 최고 시인의 남은 편린 하나라도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웠기 때문이다. 설령 이 희곡을 쓰는데 방해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욕심을 고집하려 든 것은 황진에 대한 작자의 애정의 한 표현이다.

 

 

"현란한 사랑과 예술을 불사르고 떠난 황진이의 생애는 여인에게 있어서는 잔인하기만 했던 조선사회의 윤리관과 봉건왕조의 정치 현실에 대한 의미 심장한 항거라고 볼 수 있다. 자유혼은 끈끈한 샤만적 전통속에 선과 불의 맥이 산천에 숨쉬던 조선조사회가 유독 생활규범에서만은 유가에 지배되는 당시의 상황에서 여성이기를 바라고 인간이기를 바라며 자신의 시대와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는 선각자 황진이의 싸움은 오직 생명력을 위한 싸움, 그 문화의 죽음에 대항하는 싸움이며 형식적 윤리와 인습 편견을 극복하려는 인간해방의 의지임을말하고 있다."


작가 윤정선
1970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사범대 불어과에서 수학.
프랑스 몽펠리에 대학 수학.
1986 『문학사상』에 희곡 「호동」으로 등단.
단국대학교 불문학 교수.
[상훈]
1991 제15회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 「기차와 별」.
1992 제16회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 「해질녘」.
[시]
『우리들의 숲』, 문학세계사, 1988, 시집.
「먹는 자여 모름지기 구토를 배우라」, 『문학사상』, 1989.11, 시.
[소설]
『유충들』, 시대와문학사, 1986, 소설집.
『당신께』, 청하, 1988, 장편.
『누나의 방』, 청하, 1990, 장편.
[희곡]
「호동」, 『문학사상』, 1986.10-11, 희곡.
『자유혼』, 예니, 1988, 희곡집.
『윤정선 희곡집』, 청하, 1988, 희곡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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