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원경 '김대건 신부'

clint 2024. 11. 13. 11:44

 

 

이조 말엽 제24대 헌종 5년. 
헌종의 나이 겨우 8세 때 왕위에 올랐으므로 어린 왕을 대신하여 섭정하는 
대왕대비 김씨네 일파와 헌종의 어머니요 익종의 왕비인 조씨네 일파 사이의 
세력 다툼은 치열하였다. 즉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싸움이다.
여기에 무고하고도 애매하게 말려든 것이 당시 선각의 눈이 뜨인 천주교인들이다. 
쇄국정책과 사대주의에 젖은 벼슬아치들은 상대방을 모함하기 위한 수단 방법으로 
천주교 탄압을 곧잘 이용하였다. 이리하여 기해년의 천주교 대교난의 서막이 열려 
도적과 파렴치범 같은 죄인들이 들어있어야 할 좌우 포도청은 죄인 아닌 죄인인 
천주교인으로 꽉 차고 피비린내 나는 참화는 일기 시작했다. 
나라 안이 천주교 탄압으로 소용돌이 치고 있을 때 약관 16세로 어린 두 교우 
최양업(토마)과 최방제(사베리오)와 함께 이역 수 만리「마카오」로 유학을 가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신부가 된 김대건 신부는 프랑스 신부 한 명을 데리고 
고국으로 들어와 복음을 전하려 하였으나 정부의 천주교 탄압으로 피해 다니며 
활동했으며 천주교 탄압은 날로 심해져 갔다.
그러나 의협과 정렬과 모험심이 강한 김대건 신부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교세를 더욱 넓히려는 준비작업을 위해 중국으로 떠난다. 
김 신부가 황해도 연안으로 나가 어선으로 가장한 작은 목선을 타려 할 때 
그만 관헌에게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수많은 선량한 교인들이 고귀한 피를 흘린 
새남터 형장에서 26세를 일기로 순교하고 만다.

 



김대건 신부 공연을 축하하며 - 서울대 교구장 추기경 김수환
정신이 메말라 가고, 진리와 정의감이 흐려져 가는 오늘 날 금번 가톨릭 지성인 단체연합회와 가톨릭 시보사가 후원하여 순교극 <김대건 신부>를 극단 69에서 공연하게 된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순교란 진리와 사랑을 증거하는데 있읍니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오 참된 삶의 길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바로 이러한 정신의 순교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과 세계를 참으로 살리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진리 뿐이오 김대건 신부는 이를 위하여 온갖 고난의 역경속에서 청춘을 불살은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순교는 한 종교에 준하는 것만이 아니었읍니다. 나라와 인류를 구하는 길이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정신이 매말라 가고, 그 때문에 인간이 상실되어 가는 풍토 속에서 참으로 아쉬운 고귀한 정신입니다. 
이번 극단 69에서 공연하는 <김대건 신부> 순교극이 바로 이와 같은 정신을 이 극을 보는 모든 이의 마음 속에 깊이 새기는 것이 되기를 소망해마지 않습니다. 동시에 이 같은 순교극 공연을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순교자를 따르고 그들의 정신을 현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해준 극단69에게 충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고 극단 69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연극 평 - 유민영 교수
기성극단이 가톨릭 순교성극을 공연하기는 1967년 극단 드라마센타의 「이름 없는 꽃들」에 이어 이번에 공연한「극단69」의 「김대건 신부」로 두 번째가 된다. 무명작가의 작품인데 비해 「김대건 신부」(이원경 작)는 연극을 오랫동안 해왔고, 또 「이름없는 꽃들」을 연출했던 기성작가의 작품이었다. 그러나「이름없는 꽃들」이 실패했듯이 「김대건 신부」도 역시 실패작이다. 우선 「김대건 신부」(5막8장)가 실패한 원인은 첫째 희곡작품에 있다. 역사적인 인물이나 사건을 극화하기가 지난한 이유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그 역사적 사건을 이미 잘 알고 있으며 그 인물에 대해서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인다. 그래서 잘 알려져있는 역사적 인물을 왜곡시켜 작품화하면 비난의 적이 될 수 있고 사적을 충실히 그리다보면 관객에게 흥미나 감동을 못주기 쉽다. 그러니까 이 「김대건 신부」의 실패는 후자의 경우로서 실패한 것이다. 연극이 인생 그 자체가 아니듯이 역사극도 역사 그 자체가 아니다. 역사의 무대에서의 충실한 재현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예위작품으로서 생명을 상실한 것이다. 「김대건 신부」는 너무 사실에 충실하려다가 실패한 좋은 표본이라 하겠다. 너무 광범한 시간을 다뤘기 때문에 해설자가 등장해서 더욱 연극을 지루하게 만들었고 거기다가 90여 명의 등장인물이 무대를 어지럽혔으며 많은 장면의 변화는 현대극의 요체를 잃었다. 한말로 연극의 기본공식인 발단, 전개, 위기, 절정, 파국의 과정이 없어 극적 짜임새가 돼있지 않은 허술한 작품이었다. 그런 구성적 결함을 커버하기 위한 오버액션과 소극적 난동이 도리어 신파풍으로 발전한 요인이 됐다. 좀 더 능력있는 작가였다면 김대건의 생애중 가장 극적이었던 체포로부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때까지를 높은 예술적 눈으로 잡아 승화시켰을 것이다. 연극의 본질은 갈등이다. 그러나 작품「김대건 신부」에는 갈등이 없다. 삶과 죽음, 종교와 인간, 유고와 천주교, 더 나아가서는 정의와 부의, 사랑과 미움 세력대세력의 대립 상극이 어째서 김대건에게 없었는가. 그 원인은 작가의 력량부족에 있다. 둘째로 「김대건 신부」는 순교극인데 극전체를 보고 나도 관객에게 어떤 엄숙한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일으키게 하지 못했다. 그것은 작가나 연출가가 종교적 체험이나 명상이 없는데 원인이 있다.  
종교극을 반드시 종교인이 쓰는 것은 아니라도 종교적인 작품은 쓸 때는 신자이상으로 깊은 종교적 체험과 탐구가 있어야 한다. 등장인물들의 어설픈 성호의 남발은 오히려 관객의 실소만을 빚게 할뿐이었다. 즉 깊은 종교적인 관조가 없는 작품이었다. 그와 같은 현상은 대사의 비속성에도 잘 나타난다. 셋째로 순교사극으로 실패한 또 한가지 원인은 무대의 분위기에도 있다. 전혀 종교적인 냄새가 안났다. 상징적인 십자가하나 없었고 효과음악도 별로 종교적인 엄숙성을 돋보이게 못했다. 넷째는 배우들의 연습부족이다. 몇몇 등장인물이 대사를 못외워서 적당히 지껄이는 즉흥대사는 극의 앙상블을 깨뜨렸고 1910년 신파극의 구식 연극을 연상시켜 부쾌감을 주었다. 그와 같은 현상은 한국연극이 안고있는 병폐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하여간 이번에 수고한 극단 69의 모든 단원에게 감사를 보내지만 앞으로는 우리나라 가톨릭의 빛나는 수난사를 좀 더 높은 차원에서 극화하여 교우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었으면 한다. 

 



김대건 신부
증조부 김진후(金震厚)가 10년 동안의 옥고 끝에 순교하자, 할아버지 김택현(金澤鉉)이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로 이사함에 따라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도 독실한 천주교신자였으며,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1836년 조선교구 설정 후 신부 모방(Maubant, P.)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 최방제(崔方濟)·최양업(崔良業)과 함께 15세 때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동양경리부로 가게 되었다. 그 곳 책임자인 신부 리부아(Libois, N.)의 배려로 마카오에서 중등 과정의 교육을 마친 뒤 다시 철학과 신학 과정을 이수하였다. 그 뒤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주교 페레올(Ferreol)의 지시로, 동북국경을 통하는 새로운 잠입로를 개척하고자 남만주를 거쳐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땅에 잠입했으나 여의치 못하여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그 동안에도 꾸준히 신학을 공부하고, 1844년에 부제(副祭)가 되었다. 그 해 말에 서북국경선을 돌파하고, 1845년 1월 10년 만에 귀국하였다. 서울에 자리잡은 뒤 박해의 타격을 받은 천주교회를 재수습하고, 다시 상해로 건너가서 완당신학교(萬堂神學校) 교회에서 주교 페레올의 집전하에 신품성사(神品聖事)를 받고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같은 해 8월에 주교 페레올, 신부 다블뤼(Daveluy, M. N. A.)와 서울에 돌아와서 활발한 전교활동을 폈다. 1846년 5월 서양성직자 잠입해로를 개척하다가 순위도(巡威島)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뒤 문초를 통하여 국금(國禁)을 어기고 해외에 유학한 사실 및 천주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임이 밝혀졌다. 이에 정부는 그에게 염사지죄반국지율(染邪之罪反國之律)을 적용,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을 선고하고 9월 16일 새남터에서 처형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6세였다. 그의 시체는 교인들이 비밀리에 거두어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에 안장했다. 한국 천주교회의 수선탁덕(首先鐸德: 첫번째의 성직자라는 칭호)이라 불리는 김대건의 성직자로서의 활동은 1년 여의 단기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기간에 한국인 성직자의 자질과 사목능력을 입증하여 조선교구의 부교구장이 되었고, 투철한 신앙과 신념으로 성직자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천주교회는 그를 성직자들의 대주보(大主保)로 삼고 있다. 1925년 로마교황 비오11세에 의해 복자로 선포되었고, 1984년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2019년 11월 유네스코는 제40차 총회에서 김대건 신부를 2021년 세계기념인물로 확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