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어느 날. 주인공은 차를 몰고 특별한 목적지 없이 길을 나섰다.
직진과 좌. 우회전을 거듭하더니 이내 어느 숲속 좁은 길에 들어서고 차 돌릴 수
없는 길에서 오로지 앞으로만 나가다 질퍽해진 진흙탕에 차가 빠지게 된다.
꼼짝없이 차에 갇히게 된 주인공. 그 안에서 히터를 켜고 몸을 녹이던 중
주인공은 뭔지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혀 해가 지기 전에 길을 찾아 나서게 된다.
하지만 이내 해가 지고 눈이 내리며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차가운 숲속
한가운데서 길을 잃고 헤매게 된다. 주인공이 내린 숲속에서 조난당한 채
의식을 잃어가는 중에 떠오른 생각처럼 초현실적인 내용으로 전개된다.
그에게 차례대로 나타나는 것이 있었으니 밝게 빛나는 빛의 존재,
그리고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 마지막으로 검은 정장을 입은 얼굴이 없는 사람
이렇게 세 가지 존재가 차례로 등장한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엔 부모와 검은 정장의 신사가 신발을 신고 있지 않은 모습에
의아해하다 주인공 자신도 신발을 신고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되고
그런 네 사람을 배경으로 그 뒤에서 모두를 감싸고 있는 밝은 빛의 존재가
다시금 빛을 발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더 많은 고요를 듣기 위하여 - 번역 손화수
욘 포세는 극작가이자 소설가일 뿐만 아니라 번역가로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카프카와 릴케의 작품을 노르웨이어로 번역한 직후, 3개의 시리즈로 나뉜 묵직한 '7부작' (2019~2021)에 이어, 이 책 『샤이닝 Kuitleik』(2023)을 선보였다. 이 소설은 희곡으로 각색되어 지난해 봄 베르겐에서 최초로 연극 <검은 숲속에서>로 무대에 올랐다.
「샤이닝」은 포세의 여러 작품 가운데 한 편의 작은 스케치이자, 모래알 같은 진주라 할 수 있다. 한 번은 소설로, 번은 희곡으로, 그가 집요하게 놓치지 않고 구현하려고 한 이 이야기는 아주 짧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묵직하게 다가오는 것은 죽음의 문턱에 들어서는 한 인간의 미묘한 생각과 정서를 그리는데, 어두운 단조와 밝은 장조를 적절히 섞어가며 시각적인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포세만의 문학성과 음악성이 탄탄하게 받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 과거와 현재는 서로 겹쳐져 있어 분명한 경계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포세의 다른 작품에서 접할 수 있는 삶의 도약이나 내리막도 볼 수 없다. 게다가 매우 구체적이고 혼돈스러운 상황에 처한 주인공의 복잡한 심리상태는, 압축과 반복을 바탕으로 한 포세만의 서술방식 때문에 매우 단순하고 간결하게 다가온다.
포세의 다른 작품과 비교한다면, 이 작품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포세의 스타일보다 훨씬 많은 마침표가 여기저기 뿌려져 있음을 알아볼 수 있다. 이 마침표 수는 생각이 가속화되고 이야기가 결말에 가까워지면서 점점 줄어든다. 그와 동시에 포세의 고전적인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 빛과 어둠의 교차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촘촘해진다.
이전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포세의 인물들은 복잡한 생각들과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거나 또는 살아왔던 삶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이들, 즉 풍부한 내면의 삶의 축복을 받은 캐릭터들이었다. 반면, 이 책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의 생각과 심리상태는 매우 복잡하고, 지난 삶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드러난 것이 없다. 이 책은 주인공이 느끼는 인생에 대한 '지루함'으로 시작한다. 지루함이라는 심리적 상태는 욘 포세의 작품 중 데뷔작 레드, 블랙 (1983)에 등장하는 이름 없는 17세 소년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캐릭터에서도 볼 수 없던 정서다. 그 때문에 노벨상 수상 이후 최근에 발표한 이 책의 첫 장을 또다시 놀라움을 느끼며 열게 된다.
어느 가을 저녁, '나'는 갑자기 엄습한 삶의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차에 올라 운전을 시작해, 곧 숲길 한가운데에서 꼼짝도 못하게 된다. 방향을 바꾸는 것도 불가능하고 후진도 할 수 없다. 게다가 해는 저물고 갑자기 눈까지 내리기 시작한다. 급기야 '나'는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게 된다. 그러고는 어머니와 아버지, 검은 양복을 입은 신사, 순백색의 존재 등 현실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이들과 수수께끼 같은 조우하게 된다.
주인공이 도움을 청하기 위해 발길을 돌리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갈 때, 혹자는 작가가 이야기를 쉽고 편하게 이어나가기 위해 의도적으로 주인공을 잘못된 길로 인도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야기를 계속 따라가다보면, 우리는 어느새 되돌릴 수 없는 신비로운 세계에 주인공과 함께 서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즉 포세는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주기 위한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어올린 세계 속으로 독자들을 초대하기 위해 이 작품을 쓴 것이다. 그가 초대하는 세계 속에 우리가 선뜻 들어설 수 있는 이유는 그의 말과 글이 보여주는 진실성 때문일 것이다. 노벨 시상식에서도 말했듯, 작가 자신은 글을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 어딘가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글을 끄집어낼 뿐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며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그의 질문에는 물음표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질문은 실재적 답을 요하는 현실적인 질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의문을 담은 생각은 제 모습을 갖추기가 무섭게 뒤를 잇는 또다른 생각에 묻혀버린다. 그가 숲 한가운데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그는 도움의 손길도 찾을 수 없다. 그가 숲속의 영원한 어둠. 또는 빛 속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그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본능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미 정해진 운명 같은 것이 있을까.
그가 숲속에서 헤매다 만나게 되는 빛나는 순백색의 존재는 천사일까? 그렇다면 검은색 양복을 입은 맨발의 남자는 누구, 또는 무엇일까? 그들은 주인공과 함께 또다른 세상으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에 남아 있을 것인가?
한편 이 책의 전개 방식은 강렬하게 열려 있다는 느낌을 주는 그의 이전 소설과는 달리, 오히려 폐쇄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또한 한 문장 한 문장 입축과 반복을 통해 나아가는 서술 방식은 이전 작품의 루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때로는 억압적으로 나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지루함과 폐쇄라는 요소로 첫장을 여는 이 작품은 그 만의 이런 서술방식으로 인해 더욱 강렬하게 다가오며, 우리는 그 속에서 작가 의도와 치밀함을 엿볼 수 있다.
반면 이 책에서 중심 공간인 숲은 폐쇄적 공간임과 동시에, 무한하게 열려 있는 공간으로도 다가온다. 이러한 패러독스 때문에 주인공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그 상황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그 때문에 그는 낙담과 실의 속에서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스스로 미쳐버린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한다. 욘세는 그 누구도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삶의 한순간을 매우 효과적으로 서술하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누군가는 경계선 없이 현실과 꿈을 넘나드는 그의 글에서 노르웨이 작가 타리에이 베소스의 <새들>에 등장하는 마티스를 연상하기도 하고, 현실과 조현실의 경계 점을 묘사하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하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작가 앨리 스미스 Ali Smith의 작품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 책은 포세의 다른 작품들보다 예측 불가능한 꿈의 논리에 더 크게 기대고 있다. 주인공의 차가 숲길에 처박혀 오도 가도 못하는 그림은 이 책에서 전개되는 이야기 전체에 적용되는 첫번째 이미지다. 포세는 이 이미지를 통해 우리의 삶은 대부분의 꿈처럼 되돌아갈 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무작정 차에 올라탄 주인공은 각각의 교차로를 지날 때 마다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가며 차머리를 바꾸었고, 결국은 한 숲길에서 막다른 상황에 처하게 된다. 어둠이 내리고 눈이 쌓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도움을 찾아 나서는 대신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간다. 주인공의 이러한 행위는 누구나 한 번쯤은 당면해본 적 있는 일반적인 삶의 한순간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앞날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선택의 갈림길 앞에 이르면, 우리는 마치 제비뽑기를 하듯 한 번은 이것을 선택했다가 또 한 번은 저것을 선택하기도 한다. 운이 좋으면 앞이 훤하게 보이는 탄탄대로에 오를 수도 있을 테지만, 가끔은 이 책 속의 주인공처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캄캄한 숲속에서 옴짝달싹 못할 때도 있다. 흔히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고들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인간이 항상 이성적으로 행동한다는 말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인간은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도 있는 존재라고 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가끔 이성을 잃어버리고 치명적 결과를 가져오는 엉뚱한 선택을 내릴 때도 있다. 숲속에 있던 주인공이 도로변으로 나가 도움을 청하는 대신 엉뚱하게도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숲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주인공은 한기와 배고픔과 피곤에 지친 나머지, 천사를 연상시키는 빛나는 순백색의 존재, 그를 찾아나선 부모님, 그리고 검은 양복을 입은 맨발의 사나이 등 환영을 보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초현실적인 존재들은 주인공의 눈에 점점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그들이 누구인지, 또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포세는 이러한 상황을 자신만의 특징적인 서술방식, 즉 물음표 없는 질문을 던지면서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로 몰아간다.
"나는 둥근 바위에 앉아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를 바라본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지금 어디 에 있는 것일까. 그렇다. 나는 지금 숲속에 있다."(본문 75쪽)
앞서도 말했듯, 이 책의 주인공이 던지는 질문에는 물음표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포세가 우리 앞에 던져놓은 이러한 문장들을 있는 그대로 즉, 질문이 아닌 하나의 서술이나 주장으로 읽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실힘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경우, 우리는 포세의 문장에서 새로운 리듬을 찾을 수 있다. 특히 그의 문장을 소리 내어 읽으며 그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 강조해서 읽어보라. 그렇게 한다면 이 '무엇'은 더이상 의문의 주체가 아니라, 일종의 어둠 또는 심연, 또는 아마도 우리가 죽음이라 부르는 알 수 없는 것을 상정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매우 압축적이고 특이한 독서 경험을 할 수 있는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다. 포세는 '무엇'이라는 작은 단어에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고, 우리는 이 단어를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 반대로 이처럼 연이어 등장하는 물음표 없는 질문에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가끔은 마침표로 끝나는 문장에 무의식적으로 물음표를 넣어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도 눈에 보이는 활자 그 이상의 의미를 짚어낼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 그 어떤 선택이라도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어쩌면 우리는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샤이닝」에서 접했던 물음표의 부재에 익숙해질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명상이자 묵상이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묵상은 이 책의 끝부분에서 정점에 이른다. 포세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과 죽음의 이상하고도 미묘한 관계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마치 죽음이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주인공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물음표를 거의 볼 수 없다. 그러나 마침표는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특히 직전에 출간된 그의 12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소설 '7부작'에는 마침표가 하나도 없기에. 그 직후에 출간된 「샤이닝」의 마침표들은 상대적으로 더욱 눈에 띈다. 욘 포세의 전작을 읽은 독자들은 이전 작품에서 마침표의 부재 때문에 오히려 마침표의 의미를 더욱 강렬하게 받아들인지라 이 작품을 더욱 신선하게 읽어낸다. 게다가 수백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마침표의 부재로 숨 돌릴 만한 곳을 찾지 못한 그들은 언어적인 면에서, 또는 시각적인 면에서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이 작품에 환호를 보냈다. 마침표는 멈춤을 의미한다. 포세는 이 작품에서 다시 마침표를 등장시켰고, 실제로 이 작품을 '멈춤'으로 시작했다. 이미 책의 첫 페이지에서 운전을 '멈춘' 주인공이 묘사되었고, 주인공이 숲속으로 들어간 직후 길을 잃게 되면서 다시 '멈춤'이 진행된 셈이니 말이다.
우리는 주인공의 나이를 짐작할 수 없지만, 책을 읽다보면 적어도 그에게는 꽤 연로한 부모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숲속에서 자신의 부모를 만나고, 얼굴이 없는 검은 양복 차림의 남자를 만나기도 한다. 부모는 실제 노부모처럼 서로에게, 또 주인공에게 농담을 건네기도 한다. 그들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들은 왜 그를 따라 여기에 왔을까? 아버지는 어머니를 따르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따른다. 주인공 역시 왜 이처럼 맹목적으로 숲에 들어왔는지 대답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는 내면의 독백을 통해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또는 자신이 미쳐버렸는지 등의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그런 주인공의 심리는 "나는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라고 중얼거리는 한마디를 통해 잘 드러난다.
원서 제목 'Kvitleik'는 말 그대로 '순백색whiteness'을 의미하지만, 포세가 담으려 한 의미가 단지 이 단어의 기술적 의미는 아닐 것이다. 물론 이것은 포세의 예술성과 그에 대한 대중적 수용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별빛과 달빛이 비침에도 불구하고 칠흑 같은 어둠으로 묘사되는 숲을 강조하기 위한 일종의 도구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실질적으로 이 책의 제목은, 순백색의 '존재', 포세의 주인공이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 가장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캐릭터를 가리킨다. 그것은 신일까? 이 '존재'가 신 또는 천사라 해도 놀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인공은 자신이 처한 초현실적인 상황과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들이 얼마나 이상한지 지속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세는 이 책을 통해 인간이기에 결국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고 최종적으로 자인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초현실 속의 진실로 묘사했다.
포세는 이 작품에서 다시 한번, 우리 중 그 누구가 될 수도 있는 한 평범한 사람이 외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전 작품인 '7부작'에서 마침표 없이 죽음을 묘사했다고 한다면, 반면 이번 작품 「샤이닝」에서는 죽음의 순간을 훨씬 간결하게 묘사했다. 단 몇십 페이지에 그려낸 죽음, 그리고 마침표 형태로 자리잡은 더 많은 '멈춤'을 접할 수 있는 작품이 바로 이 책이다. 포세는 스쳐지나가는 순간의 통찰을 통해 신이 그 무엇보다 먼저 존재하고, 예술이나 빛의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음을 말하기 위해 반드시 수백수천 페이지가 그토록 많은 글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해 증명했다.
'좋아하는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베르나르 베르베르 '꿀벌의 예언' (8) | 2024.11.03 |
---|---|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7) | 2024.11.02 |
베르나르 베르베르 '퀸의 대각선' (14) | 2024.10.28 |
베르나르 베르베르 '웃음' (3) | 2024.10.09 |
김애란 '노크하지 않는 집' (1) | 2024.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