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원제는 '튜브의 형이상학'이다. 노통의 특기, 과장의 미학이 엿보인다.
내용 또한 자신을 신이라 믿는 어린애의 얘기다.
이 아기는 확실히 다른 아기와는 다르다. 우선 울지 않는다.
울음은 아기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그만한 나이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의사소통이다.
울음의 부재는 곧 관계의 부재고 관계의 부재는 곧 존재의 부재다.
아기는 고심끝에 결론을 내린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나는 신이로구나.
지고의 숭배 대상이자 유일한 신인 아기가 하는 일은 먹고 싸고 먹고 싸는 일이다.
먹기만 하면 싸는 걸 보니 입에서 똥구멍까지 수직의 튜브로 연결되어 있는게 분명하다.
아기는 고심끝에 신의 본질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 신은 튜브다.
두 살이 넘어갈 즈음, 분노한 아버지가 독생자를 내려 주듯 아기는 힘차게 울며
자신을 낳은 인간들과 소통을 시작한다. 이 아기의 이름은 아멜리 노통.
여차저차 인간 세계에 발을 담갔지만 부모를 헤아리는 마음이 지나친 나머지
곧바로 말을 하지는 않기로 결심한다. 머리 속에는 이미 모든 단어가 들어 있었지만
갓 두살이 넘은 아이가 유창하게 불어를 - 노통은 벨기에 사람이고 불어를 쓴다 -
구사하면 부모의 마음에 근심이 서린다. 그래서 밤낮 울기만 했다.
2년 동안 철저히 침묵을 고수한 아이가 입을 열자마자 울음만 쏟아내니
오히려 부모들의 마음에 걱정이 가득했다. 아,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정녕 신의 뜻을 헤아릴줄 모르는구나. 신은 분노했다.
그러나 분노한 신의 입으로 친할머니가 공수해온 벨기에산 화이트 초콜릿이 들어가자
뚝! 울음을 그쳤다. 그리곤 아직 모든 사람을 용서할 마음은 없었지만
할머니와 초콜렛에게만큼은 사랑을 약속했다. 신이 내린 첫 번째 구원이었다.
얼마 후, 드디어 인간에게 신의 언어를 허락했다.
생각만큼 발음이 잘 된건 아니지만 그럭저럭 엄마, 아빠를 말 할 수 있었다.
노통은 자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증거로 그들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그러나 오빠만은 예외였다. 자신을 괴롭히는 지저분하고 교활하고 난폭한 작은 인간.
노통은 오빠를 저주하는 의미에서 결코 그의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다.
신과 세상, 실존과 불안의 의미를 어린 아이의 심리 속에서 풀어내는 아멜리 노통의 글 솜씨를 보고 있노라면 과연 이 감상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단순히 감탄을 했다는 말로 감상을 적는다면 노통에게 대단한 실례를 범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나에겐 이 소설을 평할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 소설은 신과 실존, 삶과 죽음, 존재와 불안 등 철학적 주제를 다루면서도 경쾌한 문체로 유년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노통은 서구의 실존주의 문학에 자양분을 제공했던 불안이라는 진부한 화두를 다시 꺼내 들었지만, 속도감 있는 단문으로 그 무거운 주제를 자유자재로 농락함으로써 조금도 지루함을 느끼지 않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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