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크 수도원 아드소 신부의 회고록
멜크 수도원, 멜크 시를 굽어보는 절벽 위에 장엄하게 자리 잡은 채
로마 가톨릭의 이념적 근거지로 1000년 가까이 버텨온 수도원이 있는 곳,
그 위세가 먼발치에서도 분명하게 보였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으로>에 나오는 그 곳이다.
바벤베르크 왕가(1076~1106년)가 1106년께 피폐해진 로마 가톨릭을 일신하게 되는
베네딕트 수도회에 왕궁을 기증한 이후 조성된 험준한 산 위의 요새형 멜크 수도원은
지금처럼 세속 권력조차 감히 넘볼 수 없는 규모에다 수많은 회화와 조각 작품들로
바로크식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하는데,
이는 에코의 소설의 배경, 즉 14세기와는 다소 무관하다.
다만 9만여 권의 진귀한 장서는 에코의 <장미의 이름> 주인공인 아드소 신부의
다음과 같은 회고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가련한 죄인의 삶이 이윽고 막바지에 이르고 보니 이제 내 머리는 백발…. 바야흐로 바닥 모를 심연, 고요와 적막의 신성(神性)이 가득한 그 심연을 헤맬 날을 기다리는 한편, 천사의 은혜인 지성이 광명에 의지하고 세상과 더불어 나이를 먹는다. 늙고 병든 육신을 여기 안온한 멜크 수도원의 독방에 가둔 나는 지금 소싯적에 우연히 체험하게 된 저 놀랍고도 엄청난 사건의 기록을 이 양피지에다 남겨 놓을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동명 영화
그리고 몇 페이지를 더 넘기면 ‘저 놀랍고도 엄청난 사건’이 펼쳐진다.
이 사건은 14세기의 늙고 병든 신부 아드소가 기록하고 있지만,
그가 양피지에 적고 있는 것은 젊은 시절의 아드소가 겪은 일이며,
이를 18세기의 석학으로 불리는 베네딕트회 장 마비용 수도사가 편집하여
1842년 파리의 라 수르스 수도원 출판부가 펴냈다.
이를 움베르토 에코로 유추되는 저자 ‘나’가 1968년 8월 16일에 손에 넣게 되는데,
‘나’는 이 엄청난 이야기를 대학노트 몇 권에다 번역하였으나,
잘츠부르크 인근 몬트제 호숫가의 호텔에서 분실하게 되고….
이렇게 간략히 요약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서지학적인 이야기가 <장미의 이름> 서문에 나온다. 아드소는 실존인물인지, 그의 기록은 ‘사실’인지, 라 수르스 수도원에 출판부는 존재하였는지, 이러한 질문들을 풀어줄 실마리를 찾아 ‘나’는 라 수르스 수도원은 물론 생트 주느비에브 도서관이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고서점까지 뒤지게 된다.
<장미의 이름>을 읽는 데 있어 이런 서지학적인 탐사가 ‘사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한 텍스트와 기호들이 지시하는 지적인 방향들, 그 방향들 속에 숨겨져 있는 역사적 기록과 신학적 담론들, 그를 둘러싼 ‘중세 중의 중세’, 즉 1327년 11월 말의 7일 동안 프랑스 접경 아페니노 산맥의 어느 수도원에서 벌어진 사건 속으로 숨 돌릴 틈도 없이 빠져들게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에코는 <장미의 이름>을 쓰면서 본격적인 사건에 들어가기 전에, 그러니까 병들고 지친 몸으로 양피지에 한 글자씩 적고 있는 아드소 신부의 기록으로 들어가기 전에 ‘서문’, ‘노트’, ‘프롤로그’를 앞에 달고 있다. 이 세 장치는 ‘소설’이긴 해도 함부로 배척하기 어려운 서지학적인 자료를 ‘제공’하여 ‘놀랍고도 엄청난 사건’이 실제로 역사적 지층 아래에 숨겨져 있는 충격적이고도 ‘무서운’ 사건임을 다각도로 암시한다. 그런 후에 소설, 아니 아드소 신부의 기록 ‘제1일’이 시작한다. “산허리로 감겨드는 가파른 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나는 수도원을 보았다. 그러고는 놀라고 말았다.”
움베르토 에코
(Umberto Eco 1932년 1월 5일 ~ 2016년 2월 19일)
움베르토 에코는 알레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미학자, 언어학자, 철학자, 소설가, 역사학자이다. 볼로냐 대학의 교수로 재직했으며, 기호학뿐만 아니라 건축학, 미학도 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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