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시>는 일제시대 13세의 나이에 강제로 끌려가 위안부노릇을 했던 사실을
평생 숨겨온 할머니와 성 접대 사건으로 재작년에 자살한 어느 여배우를 함께 등장시켜
일본군의 만행과 고위직의 성적 타락을 한 기자의 입장에서 고발한 연극이다.
무대는 배경 중앙에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과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조명으로 2층에 서있는
인물들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고, 무대 왼쪽에는 가지만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그 앞에 평상이 놓여있고, 무대 오른쪽에 대청마루 끝부분이 집안과 연결되는 것으로 설정되어있다.
연극은 도입에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나지막한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있음이 객석에 감지된다. 잡지사 기자인 손자가 등장하고, 할머니의 치매 증세에 역정을 내지만, 손자에게는 항상 춤추는 모습의 여인의 환상이 그의 행동거지마다 동반해 떠오른다. 손자는 여배우 자살사건에 연루되어 외출을 않고, 동료기자가 찾아와도 일체 만나지를 않고,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만 읽는다. 어머니만 기자를 대하고 기자의 닦달에 심정이 상하기도 한다. 할아버지의 기일이 다가오고, 만삭의 몸으로 누이도 기일에 맞춰 친정으로 온다. 그런데 기자가 급사하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진다. 죽은 지 3일이 다 되어 가는데도 할머니의 제지로 손자의 시신에는 손도 대지 못하게 해, 장례는 엄두도 못내는 형편이다.
장면이 바뀌면 염라국으로 저승사자에게 끌려온 손자가 조사과정에서 착오로 할머니 대신 연행되어 온 것으로 밝혀진다. 염라국에서는 큰 혼란이 일어난다. 천상에서 옥황여제가 달려오고, 저승사자의 잘못이기는 하지만 결국 자신들의 실수로 사자가 바뀌어 연행되어 온 것에 대한 자책과 함께 대책을 논의하는 염라와 옥황간의 티격태격하는 장면이 자못 흥미롭게 펼쳐진다. 한편 손자의 사망순간, 치매상태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사고를 하게 된 할머니는 기억력을 회복하고, 소녀시절 대갓집 도령을 연모했던 일과 과거 위안부시절의 아픔과 상처, 그리고 동료들의 이름까지 일일이 기억해 내고 호명을 한다.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위안부시절에 낳은 자식에게 소녀시절 연모했던 도령의 성을 가져다 붙이고, 도령의 기일을 할아버지의 기일이라 정한 할머니의 비밀 또한 객석에 알려진다.
기자 한 명이 또다시 들이닥쳐 어머니와 누이에게 동료기자의 행방을 묻는 모습이 불량스럽기까지 해, 모녀가 분노를 터뜨리기도 하지만, 사주의 호출로 기자는 되돌아간다. 누이는 급작스런 산기로 해 어머니와 함께 방으로 들어간다. 할머니는 아들이 가져온 붉고 아름다운 꽃 때문이었는지, 손자의 시신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굳게 다져먹었던 마음을 살포시 열어놓고, 아들 등에 업혀 손자의 시신이 있는 방으로 들어간다.
대단원에서 옥황과 염라가 저승사자와 함께 데리고 온 손자를 계단 아래로 내려 보내면, 방에서 나온 할머니가 그 계단을 올라가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부활한 손자는 기자생활에서의 한 여배우를 자살로 몰고 간 죄책감과 자신의 주위를 춤추듯 배회하던 그 여배우의 환상을 한편의 시로 펼쳐 보인다. 종장에서 할머니가 여가수의 모습으로 등장해 연극의 도입에 웅얼거리며 부르던 모습과는 달리 약동하는 모습으로의 열창은, 손자의 부활처럼 또 하나의 생명체의 부활과 약동으로 느껴지는 명장면이 되었다. 우리의 가슴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고, 일본의 만행을 상기시키고, 현재 우리나라의 고위직이나 가진 자들의 성적, 도덕적 타락과 부패를 꾸짖듯 지적한, 한 편의 문제작이자 걸작연극이라 평하겠다.
작가의 글 - 이해성
할머니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마음 한 웅큼이 많은 것들을 만들어내고 변화시켰다. 작년 겨울에 빨긴시를 혜화동 1번지에서 공연하고 이제 꽃 피는 3월에 대극장에서 재공연을 하게 되었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고래 식구들이 늘었고 두 작품을 공연으로 올렸고 연습실이 생겼다.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누군가가 끊임없이 도와주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극장 대관문제, 연습실 문제, 캐스팅 문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면 물 흐르듯이 문제들이 해결되고 더 나은 환경이 주어졌다.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까. 소중한 고래식구들이 생긴 것 보다. 연습실이 생긴 것 보다. 더 감사한 일이 있다. 나 자신의 변화이다. 1년의 세월 동안 성숙한 내 모습을 바라보며 그 이유를 생각해본다. 연극을 놓지 않고 해와서일까? 가진 게 별로 없어서일까? 타인의 고통에 마음을 열어서일까? 모두 그럴 듯 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게 감사해야 할까........ 노캐런티로 흔쾌히 단역을 맡아주신 용수 형님,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고통을 끌어안은 애심 누이, 두 달 동안 12시간 연습을 해낸 우리 배우들, 소극장 제작비로 대극장을 채워준 우리 스탭들, 극장과 연습실 문제를 도와준 왕우리와 한팩 식구들, 끊임없이 후원회주신 정희형님과 동휘, 연습실을 꾸미는데 도와주신 성열형과 선후배님들, 광수형님을 필두로 연습실을 만들어준 통섭회원님들, 농업의원님들, 묵묵히 뒤에서 고생해준 고래 1기들, 이번 공연에는 같이 하지 못하지만 초연 때 힘을 모아주었던 배우와 스탭들, 머리 숙여 감사합니다. 이승에서든 저승에서든 한 인간의 마음을 열어주신 할머님들, 계속 지켜봐주시고 도와주세요. 할머님들의 도움을 느낄 수 있는 이 마음을 잃지 않겠습니다. 이 세상을 위해 아낌없이 나를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내 안에 바닥을 알 수 없는 욕망이 있습니다. 인간에 의해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끊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삶이, 살아있음이, 꽃 같습니다. 아름답고 두려운, 빨간 꽃 같습니다. 제가 그 두려움을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말이 두렵습니다. 침묵도 두렵습니다. 내가 두렵습니다.” * 빨간시는 2007년 토지문화관에서 초고를 완성했습니다. 집필실을 제공해주신 박경리 선생님과 토지문화관에 감사드립니다. 타인의 고통에 눈 뜰 수 있게 내게 다가왔던 그 고통들에게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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