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지훈 '원전유서'

clint 2023. 11. 10. 10:01

 

 

〈원전유서〉는 쓰레기 매립지 위에서 살아가는 주소 없는 사람들 각자의 삶의 모습이다. 여기는 제도권 밖에 존재하므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곳. 버려진 공간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세상의 논리와 결별한, 자신들만의 삶의 방식을 지녔다.
넝마주이 노인이 달관의 철학을 논하고 쓰레기 산에서 내려온 청년이 엉뚱한 논리를 무기로 기득권에게 새로운 형태의 토지를 요구하며 집 없고 땅 없는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그리고 매일 같이 여자와 아이를 학대하는 남자 매일 매를 맞아도 묵묵히 텃밭을 일구는 여자 매일 울음을 연습하는 여자아이, 매일 매 맞고 쫓겨나지만 공부를 멈추지 않는 사내아이, 버려진 종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도를 구하는 할멈, 따발총처럼 말을 쏘면서 회한을 달래는 여자, 쓰레기더미 속에 버려졌지만 끈질기게 목숨을 연명하는 치매 노인들이 사는 땅 이 땅의 이름은 사슴 촌이다. 그리하여 이 거대한 쓰레기의 산을 지배하는 인물이자 사회악의 근원적 존재인 우출이는 귀신에게 혼을 뺏긴 이웃남자의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살며 악행을 일삼는다. 두 아이는 죽어서 미래 없는 삶에 찌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나무로 환생한다. 이것이 원전유서에 담긴 가족사다.
거대한 쓰레기 산에 묻힌 전자부품 속에서 금이 추출되고 권력으로부터 토지의 권리를 승인받게 되면서 사슴촌은 야만적인 폭력과 약탈이 들끓는 혼돈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어진이와 어동이가 매 맞아 죽고, 쓰레기 산에 버려졌던 노파들이 어동이가 나무로 돌아가는 신화의 세계를 향해 비약한다. 비록 세상과 겨뤄 패배했지만 버려진 사람들의 저항으로 기록될 원전유서의 역사다.

 

 

 

 

 

<원전유서>는 쓰레기 매립지 위에 살고 있는 주소 없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발 딛고 살고 있는 땅의 지번(地番)을 요구하면서 시작된다. 버려진 공간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애시 당초 세상과 통하지 않는 자신들만의 자유로운 언어와 행동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이 연극에서는 넝마주이 노인이 철학을 논하고 실직청년은 엉뚱한 논리로 새로운 형태의 토지를 세상에게 요구한다. 이곳은 제도권 밖에 존재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그래서 본능적인 욕구와 폭력이 지배한다. 이 쓰레기 매립장을 지배하는 인물인 우출이는 불구가 되어버린 이웃남자의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산다. 그러면서 폭력과 착취의 지배 습관은 여기서도 여전하게 진행된다. 어동이와 어진이는 상가집에 가서 대신 울어주는 아이로 훈련되고 어른들의 폭력의 대상이 되며 급기야 폭력과 착취의 세계 속에 던져진 희생양이 된다. 이런 야만적이고 물질적인 세계 속에서도 생명의 탄생을 꿈꾸는 여자가 어진네다. 그녀는 밭 밑이 쓰레기와 폐수로 오염되어서 아무 것도 자라지 않는 땅에 씨를 뿌리고 텃밭을 가꾼다. 아웃사이더 지식인 남전이 토지국장과 벌인 협상의 결과, 어느 날 이 버려진 땅에도 지번이 생긴다. 더욱이 버려진 전자부품 속에서 용해 가능한 금이 추출되면서 쓰레기는 비싼 값으로 팔리게 되고, 무대 공간은 더욱 야만적인 폭력과 착취로 들끓으면서 무정부적 상황을 연출한다. 이 혼돈 속에서 어동이가 매 맞아 죽고, 쓰레기 밭에 버려졌던 할머니들이 어동이의 주검을 거두면서 이 극은 신화의 세계로 비약한다. 어동이가 죽은 땅에 나무가 자라고, 쓰레기 산이 무너져 큰 구릉이 생긴 곳에서 우리는 밑동만 남은 거대한 나무뿌리를 보게 되는 것이다.

 

 

 

 

 

작가의 글 - 김지훈
-혹독하다. 밤 깊어 혼자 물결을 바라봅니다. 물의 근육들이 힘을 풀고 어깨를 다시 잡을 때! 방울방울이 하나로 뭉쳐 만드는 길이 연극이라는 이름의 강물 같습니다. 물에 비친 풀잎들이 새로운 연극을 싣고 내 담론의 나무들을 먹이러오는 운반선 같습니다. 최초의 원전유서는 일백 페이지가 넘지 않았습니다. 마침 이백 페이지가 넘기도 했습니다만 오늘은 일백 페이지와 여남은 장을 남기게 되었네요. 그 기간 동안 혹독하리만치 냉혹한 가지치기와 연극은 함께 하는 것이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나는 결코 쉽게 쓰지 않을 것이며 내 담론의 나무들을 두고서는 그 어떤 서사의 땅도 밟지 않으리라 다짐합니다.
-눈부시다. 손에서 물이 솟는 병을 다한증이라고 하지요. 어이없게도 뭔가에 몰두하면 특별히 물이 더 나옵니다. 파리처럼 손을 가만 두지 못하고 계속해서 손의 물을 증발시켜야 합니다. 아니면 흘러내리는 지경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때문에 남다른 버릇이 있어요. 손부채를 부치거나 손가락으로 죽은 닭발 흉내를 내거나 젖은 방석을 널듯 손바닥을 하늘로 향해놓고 앉아 있는 것. 이따금 정신불안의 오해를 사기도 해요. 버릇 같은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 엄마는 네가 아기 적에 젖배를 곯아서 그렇다고 틈날 때마다 마음 아파하셨죠. 어떤 이는 저와 악수하곤 몰래 바지에 손을 닦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익사한 표정이 되기도 하고 더러운 걸 만졌다는 듯 불쾌한 얼굴을 드러내기도 하고 어떤 이는 그저 내색하지 않았지요. 제게는 그 몸짓들이 하나 도 빼지 않고 큰 아픔인 적이 있었습니다. 악수하자고 내미는 손이 칼 든 손보다 더 무서웠습니다. 책을 읽거나 무엇을 쓰느라 손을 대고 있으면 종이는 금방 젖어서 결국 저편의 활자와 이편의 활자가 겹쳐 보이는 지경이 될 때, 내가 쓴 글자가 무참히 번져갈 때, 얼마나 손을 경멸했는지 모릅니다. 시를 생각하며 잡았던 지하철 손잡이를 이어서 잡은 벌로 당황하지 않는 그 의 얼굴을 보고 싶고 손수건 없이 턱에 손을 괴고 책을 읽고 싶기도 해요. 그동안 약은 먹을 만큼 먹었습니다. 별반 차도가 없으므로 결국엔 수술만 남은 것이지요. 그런데 그 수술이란 것이 대단히 각박해서 시술 도중에 환자가 죽었다는 말도 여러 번 들어 무척 두렵답니다. 또 저와 비슷한 중상이 있는 우리 누나 친구가 먼저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 후 손에서 물이 안 나는 대신 겨드랑이에서 철철 철- 쏟아지더랍니다. 무서운 수술이지요. 말하자면 훨씬 더 불행해진 것이지요. 상상해보세요. 검은 머리 성숙한 여인이 길고 흰 팔을 높이 들어 올렸을 때 환히 드러난 축축이 젖은 겨드랑이를. 병을 재미로 여길 만큼 제가 어른이 된 걸까요. 나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청소년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병도 복으로 바꿔 생각하면 희망이 됩니다. 살면 서 만나는 사람을 여행지에서 만나는 샘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은 그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 인생을 차갑게 들이마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손이라는 샘은 제 마음이 긴장하는 순간 물이 솟는 휴대용 오아시스입니다. 긴장 없이 사는 인간은 우리 속의 짐승과도 같습니다. 나는 손에서 물이 멈추지 않는 순간을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마음이 일다운 일을 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이제는 손에서 물이 나면 아- 이 순간 내 마음이 참 열심히 일하고 있구나. 그리하여 어떤 갈증을 향해 솟구치는 손의 물을 격렬한 일의 증거로 받아들입니다. 저와 악수한 사람들 모두 회초리 맞은 둣 섬뜩섬뜩 놀랐으면 좋겠습니다. 나중에 아주 나중 무렵에 물이 솟는 손으로 쓴 제 글을 읽고 사람들이 삶이라는 갈증을 조금 잊었으면 합니다. 두 손을 일종의 처벌로 알았던 어느 날부터 오늘까지. 내 손에서 나는 물로 사람들 마음의 갈증을 풀어줄 테다. 나는 손에 물이 나서 행복하다.

 

 

 

고려대학교 문예 창작과
2004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05년 제4회 대산 대학 문학상에서 〈양날의 검)으로 희곡부문 수상
2007년 〈원전유서)로 창작화곡활성화 공모에 당선
2007년 〈원전유서)로 한국 문화예술위원회 창작희곡 활성화지원 작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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