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승옥 '무진 기행'

clint 2023. 11. 9. 13:56

 

 

무진에서의 23

윤희중은 오래만에 고향인 무진으로 내려간다. 무진은 안개가 많고 특징이 별로 없는 조그마한 항구도시이다. 그가 고향에 가게 될 때에는 항상 무엇엔가 쫓기며 갈등할 때나 현실에서 좌절했을 때였다. 이번에도 처가에서 운영하는 제약회사의 주주총회에서 전무로 선출되기 위해 잠시 머리를 식히려고 오는 길이다. 서른세 살의 나는 젊고 부유한 미망인과 결혼을 하여 얼마 후 제약 회사 전무가 될 예정이다. 모든 일은 장인과 처가 알아서 해줄 것이다. 나에게 무진은 어머니의 산소가 있고 또 젊은 날의 추억이 있는 곳이다. 나는 그곳에서 밤에 중학 동창으로 세무서장이 되어 있는 '조씨', 모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후배 박 선생과, 같은 학교 음악 선생인 하인숙과 술자리를 같이 한다. 술자리에서 가곡이 아닌 유행가를 부르는 여선생에게서 연민 비슷한 정을 느낀다. 술자리에서 파하고 나오는 길에 후배인 박선생이 하선생을 좋아한다는 것, 그런데 하선생은 출세한 세무서장인 '조씨'를 좋아한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하인숙과 단둘이 귀가하고 되었는데 그녀가 자기를 서울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는 다음 날 바닷가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다음날 윤희중은 부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어머니의 묘에 성묘를 하고 오다가 방죽에서 자살한 술집 여자의 시체를 보며 연민의 정을 느낀다. 여인의 죽음에서 젊었을 적 무진을 탈출하려고 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오후에는 세무서장 ''를 찾아간다. 그는 다소 자랑스러운 듯이 윤을 대한다. 윤희중은 '조씨'에게 하인숙과 결혼할 거냐고 물었고, ''는 하인숙의 배경이 초라한 것을 이유로 대면서 대수롭지 않은 존재로 여긴다. 단지 하 선생이 '조씨'에게 귀찮게 따라다닌다는 말을 듣게 된다. 아무것도 모르고 사랑의 편지를 보내고 있는 후배 박선생이 불쌍해진다. 세무서에서 나와 하인숙과 약속된 바닷가 방죽으로 나간다. 방죽을 걷다가 예전에 살던 집에 찾아가 인사하고 옛날 살던 방에서 하인숙과 잠시 머무른다. 하인숙은 서울로 데려가 줄 것을 애원한다. 그는 반드시 그렇게 하마하고 약속한다. 뻗은 방죽, 과거에 폐병으로 요양했던 집에서 윤희중은 하인숙과 정사(情事)를 갖는다. 다음날 아침, 아내로부터 온 전보로 과거의 의식에서 깨어난 윤희중. 그리고 그는…. 하인숙에게 남기는 사랑이 담긴 편지를 썼다가 찢어버리고 이제는 영원히 기억의 저편에 무진을 묻어 두기로 결심하면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러면서 그는 무진을 떠나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인생의 보편적인 갈등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갈등을 속물 근성을 지닌 세무서장과 순수한 성격의 후배 중학교사 사이의 대립, 서울의 아내와 고향에서 만난 음악교사 하인숙 사이의 대립으로 바꾸고 있다. 또한 이러한 불화와 대립의 구도를 서울과 고향의 경계에 놓인 이정표, 무진 마을의 명산물인 '안개'라는 상징을 빌려 표현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1964년에 발표한 이 작품은 4. 19, 5. 16이 지난 60년대 중반의 한국의 모습이지만 세대를 뛰어넘는 힘이 있다. 인간 본연의 보편적인 갈등이 그 바탕에 있기에.

 

 

 

 

작가의 말 - 김승옥 

'무진 기행'의 착상은 우연히 얻어진 것이었다. 어는 날 고향 거리를 우울하게 걷고 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왜 사람들은 객지에서 실패하면 고향으로 가고 싶어하는 것일까? 귀소 본능이란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데 뭔가 크게 작용하는 요소가 아닐까?' , 한 가지 우연히 얻은 소재는 어느 사사로운 모임에 갔더니 서울에 있는 모 음악 대학을 나온 여선생님이 노래부르는 모습을 보고 문득 '우리 나라에서는 대학을 다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서글픔에 잠시 잠긴 일이 있던 거였다. 당시는 대학을 나와도 취직 자리 하나 변변찮던 암울한 시대였다. 안개가 낀 듯이 미래가 보이지 않던 6·25 전쟁으로 전통적인 재산도 가치도 다 파괴돼 버리고 너나없이 속물이 돼 버린, 속물이 되지 않고서는 살아 남을 것 같아 보이지 않던 불투명한 시대가 바로 1960년대였고 젊은 날의 상황이었다.

 

 

김승옥 - 감수성의 혁명, 한국 문단의 살아있는 전설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하고, 1945년 귀국하여 전남 순천에서 성장했다. 순천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불어 불문학과를 졸업. 1962년 단편 <생명연습>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하였으며, 같은 해 김현, 최하림 등과 더불어 동인지 <산문시대>를 창간,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작가·김승옥 대학 재학 때 《산문시대》동인으로 활동했으며, <환상수첩> (1962), <>(1962),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1963) 등의 단편을 동인지에 발표 했다. 이후 1960년대에는 <역사(力士)>(1964), <무진기행>(1964), <서울, 1964년 겨울>(1967) 등의 단편을 지속적으로 발표했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서울의 달빛 0>(1977),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1979) 등을 간헐적으로 발표하면 서 절필 상태에 들어갔다. 동인문학상 ·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무진기행> 1967년 작가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로 각색해 김수용 감독에 의해 <안개>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 바 있다. 이를 계기로 영화와 인연을 가지고 김동인의 <감자>를 직접 각색·감독하여 스위스 로카르노 영화제에 출품하여 호평을 받았고, 이후 이어령씨의 <장군의 수염>, 조선작 씨의 <영자의 전성시대>, 최인호 씨의 <어제 내린 비> 등의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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