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아이들 장난감이 담긴 소포가 안씨의 집으로 배달된다. 안씨의 두 번째 남편인 강씨와 임신 7개월 된 딸 미자의 남편인 최씨가 낚시를 가고 집을 비운사이에 인기척 소리가 들린다. 딸이 죽은 지 십여 년 만에 찾아온 사위. 안씨는 반갑게 그를 맞이하지만 그들 사이에 표현할 수 없는 슬픈 긴장감이 흐른다. 옛날 사우디에서 일하고 있다 잠시 돌아왔던 남자는 임신한 아내가 같은 동네에 살던 강씨의 동생과 바람이 났다고 생각하고는 아내를 심하게 때린 후 다시 사우디로 가버렸다. 그리고 십여 년. 아내는 아이를 낳다 죽었고 그냥 태어난 남자의 어린 딸 미자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아들 철이는 안씨는 강씨와 재혼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서로의 만남은 어색하기만하고.... 그때의 충격으로 배치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에게 냉담하기만 하고 아내가 죽은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미자가 바보가 된 사실을 몰랐던 남자는 급작스럽게 벌어진 미자의 발작을 보고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같이 살려고 왔지만 이미 자신의 가정이 아닌 이집에 자신의 설자리가 없음을 알고 조용히 집을 나선다. 휑한 집안에 남은 것은 아버지가 언제인가 사다 주마 약속했던 미자의 팬더곰 인형과 철이의 장난감… 그리고 미자의 노랫소리가 녹음된 낡은 테입 뿐....
한 불청객의 잠깐의 방문으로 드러나는 가족내의 반감, 외면, 상처투성이 과거를 통해 휴머니즘과 에너지가 사라진 무채색 삶을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작가의 글 – 송경순
아이가 넘어졌다. 평상에 앉은 노인, 저런.. 하며 혀를 잔다. 웃는다. 부채질한다. 금강산이 그려져 있다. 뚝뚝 털고 일어서던 아이, 뜻밖의 관심에 일어서기를 잠시 후로 접는다. 주저앉는다. 운다. 몇 걸음 앞서 가던 아이의 엄마는 늘 준비되어 있는 울화를 꾀 많은 아이에게 퍼부어 대고 멀리 앞장서 가던 아이의 아버지는 옆에서 서성대는 반바지 차림의 아가씨를 의식하느라 뒤에 벌어진 작은 소란에 대해 틈틈이 객관적인 미소만 지어 보내는데 두서너 발자국 쫓아오다 말겠지 했던 강아지 한 마리는 기어코 집 앞까지 따라와 발등을 핥는다. 대문을 열고 들어선 집 안쪽 어딘가에선 암고양이 한 마리가 새끼를 낳아 울어대고 기괴하게 허물어진 쓰레기 봉투 안에선 건강한 왕파리 군단이 힘있는 춤을 춘다. 바람 한 점 없는 날. 치매노인과 봉숭아뿐인 낮은 골목. 주인 잃은 강아지의 허기진 방황, 지독한 지겨움에 지쳐 걸음을 멈추는 순간 하늘을 날아오르는 참새 열 댓 마리, 감흥 없이 보게 된 추억의 잠자리 너덧 마리, 맥 빠진 인간을 조롱하듯 열렬한 기세로 고기를 뜯는 마른 고양이 한 마리. 어제는 앞집에 사는 일 없는 청년 한 명이 목을 매 자살을 했고 종이엔 이름 석 자만 적혀 있었다. 하는 일도 할 일도 갈 곳도 가야 할 곳도. 만날 사람도 만나야 할 사람도 만났으면 하는 사람도 만남을 바라는 사람조차 없었던 앞집 청년을 나는 어느 곳에서 봤던가. 언젠가 오후 서너 시경. 검은 비둘기떼가 사방팔방 빈 틈 없이 우글대는 동네 공원에서 우리는 잠깐 마주쳤을 것이다. 사색 없는 창백한 산책이 들켜버리고 부끄러운 동질감으로 눈알이 흔들릴 때 비둘기 수백 마리가 텅 빈 하늘을 향해 떼지어 날아올랐을 것이다. 구겨지고 일그러진 가난한 너와 나의 머릿속, 갈증으로 턱턱 막혀 가는 심장을 꿰뚫고, 세상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소년기의 거창한 꿈을 잠든 순간에나 만나보는 인생. 오늘도 던지지 못할 화염병. 그 식은 주둥이에 자꾸만 불 댕기는 인생. 가다 서다 반복하는 인생. 아무것도 움켜쥐지 못한 채 텅빈 길에 정차해 버린 인생, 그것으로 끝나버려는 인생. 문화가 넘치는 살 만한 새시대에 그 어떤 문화의 촉수에도 걸리지 못하는 남루한 인생, 풀에 대해 갖는 나의 관심은 철저히 정체된 절망감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이 기름진 열정과 감상에 휩쓸려 쉽게 머리 끄덕이지 않기를 나는 바란다. 간혹 허옇게 질려서 비틀대기도 하지만 그래도 내 것이기에 가장 믿을 수 밖에 없는 상상에 대해 더 이상 의심 품지 않기를 나는 바란다. 한 남자가 가족을 만나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손님이 되어 떠난다는 작은 이야기에 적잖은 시간이 할애되었다. 그 시간의 반은 당위성에 대한 나름의 고민으로 소비되어졌고 인물에 대한 불신으로 탕진되어 지기도 했다. 파격 없는 내용과 일상성을 강조하는 밋밋한 인물에 대해 유일무이한 집중과 자신감을 유지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여물지 않은 식견이 엄한 '연극의 언어' 앞에서 찢어진 깃발 마냥 펄럭대는 순간에도, 진실의 모습은 단순하고 평범하며 간결하다는 믿음을 놓지 않았는데 그것이 이번 작품을 이루는 가장 큰 원형이 되기를 조바심 치듯 원했다. 단순함은 매우 어렵고 중요하며 요점에 가까운 미덕이다. 목숨을 쥐고 올라선 8천m 고봉의 손바닥만 한 정상처럼. 뒤엉킨 삶의 한 풍경을 조금은 건조하고 간결하게 풀고 싶었지만 미숙한 운전실력으로 제 길을 찾는데 애 먹었다. 앞으로 더 분명해지기 위한 과정이라 여기며 마음 가다듬는다.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값진 공부하며 첫 걸음을 뗀 셈이다. 그것으로 족하다. 충분하다. 불안하고 애매한 인물을 맡아 머리 싸매고 연기해 준 배우들과 스탭에게 감사한다. 어둡고 불편한 거실에 함께 방문해 준 박정의형, 진심으로 고맙다. 작은 신화에 감사한다. 보다 더 선명한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기 바란다. 절망의 토양이 더 단단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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