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쯔무텐텐은 어머니가 유아를 데리고 노는 놀이의 일종이다. 어머니가 ‘오쯔무텐텐'이라고 말하면, 유아는 두 손으로 자기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는 행이로서, 일종의 지능개발유희라고 할 수 있다. 머리를 두드리게 하는 행위로 보아서 머리의 중요성, 사고(思考)의 중요성, 나아가서는 인간으로서 마음의 자세를 중시한 상징적인 놀이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희곡 <오쯔무텐텐>에서는 유아놀이가 아니라 성인놀이이며 사자유희(死者遊戱)로 전환되었다. 작품 전체가 죽은이들의 변신극(變身劇)이자 유희극으로 전개된다. 삶을 하나의 유희로 전제하고, 특히 사자인 등장인물들이 벌이는 유희를 통해 인간존재성을 투시하려는 것이 작가 특유의 드라마방법론이다. 이승과 저승의 변증법은 이렇게 설정되었다. 등장인물들은 시체(미라) 혹은 그 시체의 분신들로 설정되었다.
전체는 서막, 아동극, 렛슨, 유희, 즉흥극, 의식, 종막 등 7장면으로 구성되었다. 7장면은 기승전결의 악장(樂章)과도 같은 구조를 지녔다. 서장의 바로크음악으로부터 아동극장면의 트럼펫소리와 염불, 렛슨장면의 불협화음, 유희장면의 빠른 템포음악, 즉흥극 장면의 북소리, 의식장면의 마태수난곡, 종막의 대합창 등 극중 행위의 변화에 수반되는 선율의 변화는 이 극이 '삶의 변주곡'임을 상징한다. 이처럼 소리(음악)와 짓(연극)과 놀이(존재성)를 일치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극중 장소는 텅 빈 공간이다. 언제나 우윳빛 안개가 감도는 곳이다. 이곳이 바로 죽은 자들의 놀이판이 된다. 그러나 연옥이라는 별칭을 지닌 세계이다. 죽은 이들의 영혼이 천당에 가지도 못하고, 완전히 지옥에 가지도 못한 상태, 영혼들이 안주하지 못하고 떠도는 세계가 연옥이라는 것이다. 불교식으로 보자면, 사망 후 49일 동안 영혼이 방랑하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49일제를 통해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었다. 이 극에서의 의식장면은 기독교의 부활제, 불교의 극락왕생제와 상통한다.
전아한 바로크음악이 울리면서 하늘에서 백자입관 하나가 춤추듯 지상으로 내려오는 데서 극이 시작된다. 그 속에는 누더기에 싸인 시체가 하나 서 있다. 이 시체가 주인공이다. 그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말하지도 않는다. 다시 지하에서 도깨비 탈을 쓴 두 사나이가 등장한다. 도깨비들은 시체와 같은 모습으로 변신하고, 자신들이 그 시체의 분신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지나간 인생을 회고하고 이제부터 천상으로 가느냐 혹은 지하로 가느냐가 문제라고 번민한다. 시체는 분신의 조력을 받아 렛슨을 시작한다. 렛슨이란 희노애락의 온갖 놀이를 말한다. 심지어는 동물놀이까지 시도해본다. 렛슨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처음에 잘 움직이지 못하던 시체는 점차 동작이 커진다. 분신들이 사라지면, 그는 다시 원상태가 되고, 고독한 몸이 된다. 해골들의 의상쇼(누더기, 여성내의, 레인코트, 기모노, 광대 옷 등을 걸쳤다)로부터 유희장면이 펼쳐진다. 다시 탈을 쓴 배우들이 나와서 해골들이 가져온 의상을 입고, 오쯔무텐텐을 코러스식으로 펼친다. 배우들은 시체에게 말을 시키고 움직이게 하려고 갖은 애를 쓰지만 그는 끝내 움직이지 않는다. 배우들은 다시 즉흥극을 펼친다. 의자 뺏기와 오쯔무텐텐을 기본으로 한 극중극이 벌어진다. 본격적인 극중극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쌍의 배우들은 각기 애인과 부부로서 극중극을 하고, 남은 배우 하나는 마지막에 독백을 한다. 부부는 노경에 이르러 ‘두 영혼이 하나가 되기 위해’ 단검으로 자살한다. 애인은 출산을 거부하는 갈등 속에서 '사내아이와 모친의 관계'로 놀이하다가 산소 부족으로 죽는다. 독백에서는 암으로 죽은 한 남자의 '삶에 대한 저주'가 펼쳐진다. 놀이가 끝나자, 시체의 분신인 배우들은 갈 것을 몰라 방황한다. 이런 국면에서 어린애들의 미래성과 순수성이 소중하게 부각된다.
하늘에서 길로틴이 내려오면서 마지막 의식이 시작된다. 의식은 탈을 쓴 배우들에 의해 진행된다.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시체를 찾아내어 그들의 임금님'으로 분장시킨다. 의자 뺏기를 통해 임금을 골려준다. 시체는 배우들의 배신자인 유다에 비유된다. 그에게 욕설과 악담이 쏟아진다. 드디어 시체의 본격적인 오쯔무텐텐이 벌어진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놀이를 진실로 이해하지 못한다. 화가 난 사람들은 그를 길로틴에 넣어 목을 자르자 피보라가 솟구친다. 종막에 이르러 시체는 잘린 목이 다시 붙어지고 벗겨진 누더기를 다시 걸친 채 누워 있다. 그네 하나가 하눌에서 내려온다. 그를 태운 그네가 하늘로 올라간다. 시체(미라)를 위한 대합창이 울린다. 모두가 도깨비들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이처럼 이 연극은 시종 죽은 이들의 유희(극중극)와 역할 바꾸기(변신극)를 통해 현실 속에 살아있는 인간들의 존재성과 삶의 의미를 투시해주고 있는 점에서 특징이 있다. 아울러 진실한 생명의 부활과 미래적인 구원을 추구하고 있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오쯔무텐텐>은 1980년경에 이미 씌어졌음에도 1996년 초연될 때까지 발표되지 않았던 작품이다. 그러므로 연대적으로나 주제적으로나, 제Ⅱ기로부터 제기로 발전하는 변환점에 위치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즉, 이것은, 제1기의 「놀이」로서의 세계를 추구하는 관점, 제기의 진정한 놀이를 가능케 해주는 '부활'의 세계의 탐구로 발전해가는 그 변환점으로서, 양자가 교차하면서 서로 대결하고 있는 극세계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특징적인 것은 그때까지의 무대가 대다수 다소 성격이 없는 '사자 (死者)의 나라'였는데 반해 '연옥'이라는 종말론적 성격을 가진 세계를 설정하고 거기에 작가의 독자적인 시좌(視 座)를 분명하게 붙박아 놓은 일일 것이다. 연옥이란 부조리한 곳, 천국도 지옥도 아닌 공허한 곳. 혹은 시이나 린조(椎名麟三)의 소위, '신이 침묵' 바로 그것인 허무의 세계이다. 불교에서도, 죽은 후 49일간은 죽은 사람이 이도저도 아닌 존재로서 허공을 헤매고 있는 중음(中陰)이라든가 증유(中有)라고 하는 중에 큰 상태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연옥의 성격은 좀 더 분명한다. 즉, 최후의 심판에서 죽음의 죽음을 이루어, 되살아나게 되는 것인지, 단지 제2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뿐인지, 전혀 알 수 없으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조차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공중에 뜬 세계이다. 즉, 이곳은 말하자면, 최후의 심판 때의 신의 침묵을 바로 앞에 둔 종말론적인 허무의 세계이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 있으면서 죽어 있는 것 같은 인간, 죽어 있으면서 살아있는 것 같은 인간이 실제로 놓여 있는 세계 이외의 어느 곳일까.
사바(娑婆)의 누더기를 걸친 채 매달려 내려온 관 속에서 기어 나오는 미라 모습의 시체는, 말하자면 죽어 있으면서 살아 있는 것 같은 인간, 살아 있으면서 죽어 있는 것 같은 인간의 전형이리라. 어쨌든 아직 응얼거리거나 짖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바세계의 누더기보다 고급인 해골들의 의상을 입히려고 하면 도망다니는 것이다. 그 연옥의 미라의 생과 사를 가르는 것이 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이라는 놀지 않는다. 놀 수 없다. 무대 진행 역의 빨간 도깨비와 파란 도깨비가 등장해도, 이곳은 말도 의미도 없는 허무의 세계여서 말놀이조차 불가능하다. 그래서 미라의 하품 연기를 계기로, 연옥의 배우들을 시켜 미이라의 역할을 연기하게 한다. 친절한 연옥 나라의 배우들은, 「오쯔무텐텐」으로 시작되는 놀이로 미라를 놀게 하려 한다. 그것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 놀아보자는 신호라고 한다. 배우들은 미라가 살아온 모습이라도 연기해 보이는 듯 즉흥극을 하며 놀아 보인다. 이를테면, 스스로는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불쌍한 남자가 여자에게 강제로 동반 자살 당한 이야기라든가, 믿고 있지도 않는 사랑에 대한 무익한 잡담으로 산소가 부족해져서 질식사한 남녀의 이야기라든가, 그리고 마지막에, 죽어 있으면서 살아 있고, 살아 있으면서 죽어 있는 것 같은 반죽음 상태에 견딜 수 없게 된 남자가, 완벽하게 시체가 되는 날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마침내, 신에게 호소하게 되는 이야기. "완벽하게 죽여 주세요.... 거기서부터, 뭔가, 새로운 것이, 시작하는 게 아닙니까. 하느님"이라고 하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라, 남자는 마지막에 "완벽한 죽음이, 왔을 때, 죽음이 죽음을 죽을 때 죽음은 승리에 삼켜 버린다…죽음이여, 교만하지 말라, 만세, 만세, 만세..... 환생의 새벽이 온다"라고 말하며 쓰러진다. 다시 일제히 등장한 배우들은 하늘을 우러러, “이제, 우리들, 어디로 가나”하고 외친다. 그것은 마치 바로 그다음에, "영원한 생명은 너에게 있도다"라는 말로 이어질 듯하다. 그래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놀려고도 하지 않는 미라를 '임금 역'으로 삼은 배우들은, 화가 난 나머지 미라를 길로틴에 걸기로 한다. 그제 겨우 미라가 오쯔무텐텐의 흉내를 시작한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며, 미라의 목은 절단된다. 사람들은 그 피를 포도주처럼 잔에 받아 건배하고는, 미친 듯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윽고, 어둠 속을 내려온 그네에, 도깨비들의 손으로 원래의 누더기가 입혀져, 어둠 속을 내려온 그녀에 올라탄 미라는 다시 위로 당겨 올라간다. 헌데, 미라가 당겨 올라간 것은, 뒤늦기는 해도, 마침내 그가 「오쯔무텐텐」을 하며 놀기 시작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배우A가 애타게 기다렸던 것, 완벽한 죽음이, 그에게 드디어 내렸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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