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연극집단. <낭만정> 기획으로 1996년 11월에 탄생 75주년을 기념하는 국제 도스토예프스키 연극제에, 도스토예프스키 연고인 스타라야 무사로 상연되어, 이미 특별상을 수상하였다. 말할 것도 없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채용해, 작중 조연인 술 주정뱅이 마르메라도프를 주인공으로 다시 쓴 작품이다.
우선, 암흑 속을 부유하는 마르메라도프의 해골이 등장하여, 앞서 말한다. 1세기 반 전의 <죄와 벌>의 문학세계와 현재의 관객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면서, 마르메라도프라는 조연에게 관객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일에 필요불가결하여 고안한 것일 터이다. 뿐만 아니라, 작가에 의해 이미 작품 중 살해당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완벽한 죽음으로 죽지 못하고 연옥에 있는 마르메라도프가 그 연옥의 공중에 붕뜬 상태를 어떻게 결말지어 줄 작정인가 작가에게 격렬하게 물으면서, 당신들 자신은 어떻게 심판을 내려줄 것인지, 그러면 그런 용기는 있는지, 그렇게 객관적으로 질문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소설 중 술집 장면은 거의 만취한 마르메라도프의 독백이다. 그러나 원래부터 1인극은 아니기에, 스스로 그 나름대로의 극적인 꾸밈이 요구된다. 여기서 독백에서 재료를 취한 세 개의 회상 장면(3장, 5장, 7장)이 삽입되는 것일 터이다.
제3장에 해당하는 회상(1) ‘카체리나의 집'은 마르메라도프와 카체리나가 함께 하게 된 과정을 작가가 자유롭게 부풀려서 그려 본 소묘지만, 프라이드가 높고 게다가 로맨스를 좋아하는 카체리나의 면목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다. 극의 흐름이라는 관점에서 보아도 지금까지의 마르메라도프의 '씻어낸 듯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빈곤'의 이래도 되는 것인가, 라고 할 정도로 어두운 현실묘사를, 갑작스럽게 밝은 무대로 그 느낌을 바꿔 버리는데 있어 극히 효과적이다. 또 동시에, 이것과 대조적인 제5장의 회상(2) '마르메라도프의 집'의 소냐의 몸을 파는 장면을, 한층 처참한 가정 붕괴로 두드러지게 하는데 효과적이다. 제7장의 회상(3)에서의 카체리나가 소냐를 상대로 새로 태어나는 꿈을 이야기하는 잔인하면서도 밝은 장면도, 회상(1)과 같이, 제10장의 마르메라도프에 의한 꿈의 파괴, 한층 더 제12장에 있어서 죽음의 파국이라고 하는 처참한 장면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필요한 삽입으로서, 다소 번거롭기는 해도 납득이 간다.
제11장은, 마르메라도프의 죽음을 자살로 해석하는 입장에서 재구성한 작가의 독자적 장면이다. 분명히, 두 번 세 번 경고했는데 스스로 뛰어들어 왔다고 하는, 마부와 목격자의 증언이 있다. 마르메라도프 자신도 이미 어딘지 모르게, "어디라도 이제 전혀 갈 곳이 없더라도 인간, 누구든지, 어쨌든 어딘가 갈 곳이 없어서는 견딜 수 없다…… 그것을 당신이 아는가"라고 이전 학생에게 확인하고 있다. 그렇기에, 도스토예프스키도, 마르메라도프의 죽음을 자살로 암시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것을 자살로 단정하지 않는 것도 분명한 것이다. 실제로 니에바강의 다리에서 몸을 던지는 것은, 라스코리니코프도 생각했다. 소냐는 좀 더 여러 번 생각했다. 그러나 마르메라도프에 대해서는, 작가는 결국 그것을 밝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해석이 엇갈리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마르메라도프의 독백의 성격규정까지도 좌우함에 틀림없다.
제12장은, 미친 카체리나와 아이들에 의한, 길거리 예능 같은 춤의 장면이다. 이곳은 바후친의 소위 카니발적인 요소로 넘치는 민중극적 장면의 전형이어서, 그것이야말로 처음부터 이 장면을 극의 클라이맥스로 하기 위해서, 극작가가 이 작품을 1인극으로 꾸미는 것을 단념한 비밀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든다. 여기서는 분명히, 보는 자가 보여지는 자에게 보여지는 자가 보는 자로 바뀐다. 제정신이 광기로, 광기가 제정신으로 바뀐다. 삶과 죽음, 죽음과 삶이 교체된다. 이곳에는, 광기의 고뇌와 함께 큰 웃음이 있다. 축제가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이 장면은, 마르메라도프의 소위 "어디에도 이제 일절 갈 곳이 없어도, 인간, 누구라도, 어쨌든 어딘가에 갈 곳이 없어서는, 견딜 수 없다"라는 외침을 폭발시킨 으뜸가는 장면임에 틀림없다. 클라이맥스 장면으로서도 이것이 제일일 것이다. 다카도 가나메의 극세계의 예사롭지 않은 변천과 비약을 끌어내면서 일관되게 그 기저(基底)를 관철해온 것도 실은 그 외침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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