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루드비히 폴커 작 김민기 번안 각색 '지하철 1호선'

clint 2022. 11. 25. 07:46

 

 

연변에서 온 선녀가 서울역에 도착하는 것으로 공연은 시작한다. 약혼자 제비를 찾기 위해 서울로 온 선녀는 행방이 묘연한 제비를 찾아 청량리 588로 향한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지저분한 사람들이 모이는 청량리 588. 연고 없이 서울에 떨어진 선녀를 청량리 588사람들만이 골치 아파하면서도 챙겨준다. 사창가의 창녀들을 관리하는 철수 삼촌과 창녀 걸레, 걸레가 사랑하는 안경 씨, 곰보 할매 등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블랙 코미디 우화에 나올 법하다. 제비를 찾아 남쪽 나라로 온 선녀는 갖은 고난을 겪게 되는데..!

마약과 시정잡배들이 활개 치는 서울은 고달프기만 하다. 이야기는 제비를 찾는 선녀를 중심으로 흘러가지만 중간중간 지하철 속 인간 군상들을 보여준다. 전철은 잡상인, 종교인, 자해공갈, 보험판매인, 만취한 사람들로 조용할 틈이 없다. 밴드의 라이브 연주에 맞춰 각자 풍자적이고 해학적인 노래를 부르는데, 암울한 선녀 이야기를 환기하는 요소이다.

명품 속옷을 사기 위해 전철을 탄 강남 과부들의 장면이다. 전철같이 지저분한 대중교통을 탈 일 없는 이 사모님들은 기세 좋게 전철에서 노래를 부른다. 자신들이 빨갱이 적출과 땅 투기로 어떻게 돈과 명예를 얻었는지. 선녀나 걸레의 삶과는 대조되는 강남 과부들의 당당함이 우스우면서도 서울의 모순을 신랄하게 꼬집는다.

걸레는 떠나고, 우여곡절 끝에 만난 제비도 선녀를 잊었다. 기댈 곳이 없어진 선녀와 안경 씨는 서로 손을 맞잡은 채 무대 밖으로 사라진다. 쓸쓸한 장례식에서 노숙자 둘은 소주를 먹다 막차를 놓칠 뻔한다. 막차를 탈까 말까 고민하던 둘은 뛰어가면서 말한다. '빨리 가자, 우리를 받아주는 건 지하철밖에 없어.'

지하철 (특히나 1호선)을 타고 통근하다 보면 온갖 별나고 괴상한 사람들을 다 만난다. 갈 곳이 있는 사람들 눈에는 피하고 싶고, 무섭기도 하다. 시민들을 위해 전철이 더 '깨끗'하고 '안전'한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그 말은 전철이 노숙자, 부랑자들, 사회에서 벗어난 삶들이 '일반' 시민들과 부대낄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고도 할 수 있다. 재개발과 도시재생, 더 청렴하고 깨끗한 서울을 만들겠다는 야심 찬 선언은 이런 빈민들이 제멋대로 몸 누일 곳을 없애겠다는 말과 같다. 공원 벤치는 노숙인을 좇기 위해 철 막대를 끼운 벤치로 바뀌고 있다. 공공장소라는 단어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공공의 영역에서 배제된다.

청량리 588의 집창촌은 지금은 재개발로 인해 사라졌다. 재개발 과정에서 성매매 종사자들은 반발했다. 뚜렷한 지원책 없이 이뤄진 재개발은 빈곤한 여성들을 더 열악한 환경으로 몰아넣을 뿐이다. 1998년의 서울역과 지금의 서울역 역시 다르다. 외국인 방문객이 많아지고 기차역을 재정비하면서 코레일은 2011년 서울역 주변의 노숙자들을 강제 퇴거하기 시작했다. 민원과 서울역 이미지를 위한 조치였다. 그 많은 노숙인은 뿔뿔이 흩어져 숙대입구역이나 영등포역 등으로 옮겨갔다. 전철의 잡상인 역시 <지하철 1호선> 에서 나온 만큼 빈번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이제 잡상인이 나타나면 기장이 방송으로 경고한다. 자해공갈단은 찾아보기 힘들다.

1998년에서 2019년까지 21년의 세월은 많은 것을 변하게 했다. 이렇게 거칠고 지저분하며 개성 넘치는 사람들은 사라진 걸까 아니면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려난 걸까? 빈곤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보여주고 같은 처지인 사람들과 소주를 훔쳐 먹을만한 장소가 아직 있을까? 가난한 자들을 위한 공공장소가 남아 있지 않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하는 게 아닐까.

 

 

<지하철 1호선>은 독일에서도 오래 공연되어 호평을 받은 바 있는 폴커 루드비히의 원작을 우리의 실정에 맞게 각색·편곡한 작품으로 정도 600년을 맞는 서울특별시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소시민들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그려냈다. <지하철 1호선>은 수도 서울의 교통 중심축인 1호선 지하철 노선을 따라 펼쳐지는 내용이다. 즉 서울을 처음 찾아온 연변 처녀 선녀가 애인 제비를 찾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 앞과 청량리 588일대를 오가면서 발견하는 서울의 뒷골목 풍경을 극화한 것이다. 서울에 살고 있는 우리의 시각으로는 지나쳐 버리기 쉽고 나아가 당연시되기까지 하던 문제점들을 순진무구한 선녀의 눈을 통해 예리하게 지적해 내었다. 즉 일그러진 자본주의 사회의 타락상과 분단 상황 아래에서 자행된 획일적 군사문화의 잔재와 그 속에서 자신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소시민들의 추악상을 희화적으로 그려냈다. 록뮤지컬이라는 그릇에 담겨진 이 공연은 무려 2시간 반 동안 지속된 연기자들의 노래와 그룹 무임승차의 연주로 젊은 관객들의 열띤 호응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또한 이 공연이 많은 관심을 끌 수 있었던 요인 중의 다른 하나는 젊은 연기자들이 혼신을 기울인 연기 덕택일 것이다. 선녀 역의 나윤선을 제외한 방은진, 이두일, 김효숙, 김승욱 등의 연기자는 각장면마다 다른 모습을 효과적으로 나타내는 일인 다역 연기를 무난히 보여주었다. 그들은 눈이 핑핑 도는 듯한 혼란스러운 세태를 재빠르게 보여주기 위해 각장면마다 다른 모습으로 순발력있게 변신하였다. 그들은 각 장면의 각기 다른 배역을 효율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재미있고 개성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선녀(연변에서 온 처녀), 안경(운동권 학생), 걸레(몸을 파는 여자), 철수(사창가를 지키는 깡패) 등의 명명법은 개별 장면의 이해를 손쉽게 해주는 극적 장치를 기능하였다. (<90년대 연극평론자료집3>, 이재명,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서울특별시 보통시민들의 일그러진 자화상') <지하철 1호선>은 원래 청소년을 대상으로 당대 현실의 모순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쓰여진 작품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형식이 록뮤지컬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교화적인 주제를 록뮤지컬이라는 흥겹고 젊은 형식을 통해 전달한다는 것은 그 교육적인 목적을 위해서 더없이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김민기의 <지하철 1호선>의 경우 이러한 흥겨운 록뮤지컬의 형식에 감상적인 노래와 음악을 가미시킴으로써 한국적인 재구성을 시도한다. 이에 따라 김민기의 <지하철 1호선>은 교화적인 주제를 감상적인 노래와 희화화된 몸짓, 그리고 개그스런 장면에 담아 전달함으로써 관객을 청소년의 수준에 머무르게 하고 말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관객이 이러한 교화적인 주제에 동의하지 않거나 혹은 의식하지 못할 경우, 이 작품은 그야말로 그다지 수준이 높지 않은 버라이어티 개그를 보는 것에 그치고 말 위험성을 안고 있다. 이러한 위험성이 오히려 보통의 관객들로 하여금 이 작품을 보고 싶다는 욕구를 자극하게 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90년대 연극평론자료집>, 김광선, '관객은 아직도 계몽의 대상인가')

이 작품은, 연변에서 뱃속에 든 아이 아버지 제비를 찾아 서울 588을 찾아온 천사라는 연변 처녀가 주인공이 되어, 지하철 1호선의 열차 안과 청량리로부터 서울역 부근의 서울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내는 작품이다. 마약중독자, 창녀, 기둥서방인 깡패, 거렁뱅이, 청소부, 포장마차 할매, 가출 소녀, 손가락 잃은 동남아인 등 이곳을 서울역과 청량리를 삶의 근거지로 삼는 사람들이 치고받고 사는 모습은 살벌하고 각박해 보이지만, 차츰 극이 진행될수록 전철 안의 사람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예수쟁이, 아이에게 악다구니 쓰는 아줌마, 소매치기, 퇴락한 중년의 병태와 영자, 주책바가지 노인네, 진보적 여교사와 옛날이 좋았다는 권세가의 사모님들 등 지하철 안 인간 군상들을 보면 볼수록 창녀나 깡패의 삶보다 나을 게 없다는 생각을 자아낸다.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우리들 역시 이들 인간 군상의 일부인 것이다. 전 공연을 록그룹의 깨끗한 생음악 연주로 들려주는 것이나, 록음악의 음색을 어쿠스틱한 연극 대사와 노래들과 조절해내는 음향 콘트롤은 역시 김민기답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김민기다운 것은 번역, 번안, 가사를 놀랍도록 우리말답게 만들어내고, 노래 속에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능력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담은 노래를 바탕으로 장면장면을 깔끔하게 다듬어내고, 그리 크지 않은 극장에서 중극장과 소극장의 효과를 모두 만들어낸 것도 주목할 만한 연출력이다. (<SBS매거진>, 이영미, 19957월호, '극을 담은 노래, 노래를 담은 극')

 

 

1978년 노래굿 -'공장의 불빛'은 불법카세트로만 제작을 했고 정식으로 공연은 올려보지 못했다. 1984년 노래극 '개똥이'는 공연은 커녕 음반심의 과정에서부터 공륜의 제재를 받았다.그래서 1987년의 노래일기 -'아빠얼굴 예쁘네요'는 오디오물로만 출반하는 후퇴를 하고 말았다. 이제 창작 뮤지컬의 본격적인 공연제작에 앞서 조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급할수록 돌아 가랬다고 외국 뮤지컬 1편을 우리의 이야기로 바꾸어서 해 볼 필요를 느낀 것이다, 노래가 나오는 공연물의 문법이 어떤 다양함을 가질 수 있는지를 좀 더 알아보기 위해서. 우선 브로드웨이 뮤지컬들을 검토해보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선 그 내용이 우리의 모습으로 대입될 수 없도록 단단히 포장되어있었으며 구조나 음악형식에 있어서도 우리의 정서나 몸놀림에는 걸맞지 않는 무용음악들이 그 안에 단단하게 포진되어있었다. 그래서 눈을 돌려 찾아본 것이 이번에 공연하게 되는 독일 뮤지컬 line 1 였다. 구조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브로드웨이류의 것과는 달리 열린 구조였으며, 이는 아니리와 창으로 구성되는 판소리ㅡ 또는 전통 가면극의 그것과 흡사했다. 내용 면에서는 분단독일의 고민이 (이 작품은 통독이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날카로운 풍자로 담겨있었는데 이것을 우리의 모습으로 대입시켜 봄직도 했다. 그러나 막상 번안작업에 들어가고 보니 직역해서 모사하는 것보다는 물론 창작하는 것보다도 훨씬 많은 어려움에 부딪쳤다. 제일 큰 벽은 당연히 사물을 대하는 독일인들과 우리의 정서 차이였다. 단순 대입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틀을 바꾸고 내용을 뒤집기를 여러 차례 걸쳐 결국 우리 것도 아니고 독일 것도 아닌 제 3의 앙상한 것으로 멀리 나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알게된 1994년 정도 600년을 맞는 서울특별시와 우리 자신의 뒤틀리고 우스꽝스러운 모습들. 뿌리깊이 박혀있는 분단과 대립의 흔적들 - 온갖 사회문제들은 동시다발로 터져나오고 있었고 이것들을 체계적으로 수습할 전망은 아직 없어 보인다. 하물며 통일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정서상의 이미지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하철 1호선에서 만나게 되는 다소 거칠어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바로 그 통일이라는 잉태된 새 생명이 조심스럽게 출산채비를 갖추고 있다는 심증을 비로소 굳힐 수 있었다. (참고 : <지하철1호선> 초연 프로그램, 김민기, '연출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