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시라이 케이타 'BIRTH'

clint 2022. 1. 31. 12:55

 

 

2011년 쓰여진 <BIRTH>는 시라이 케이타의 두 번째 곡으로, 이 몇 차례에 걸친 재공연을 통해 중견 남성 배우를 중심으로 결성된 극단 <온천 드래곤>의 대표작이 된다. 당시 배우로 활동하고 있던 시라이는 이 희곡을 처음으로 연출을 시작하여 작가, 배우, 연출로서 다양한 재능을 구사하며 현재 일본 연극계의 중추를 담당하는 중요한 예술가로 성장하게 된다. 특히 이 작품은 2014년 극단 <골목길>의 초대로서 공연을 성공리에 마치고, 이듬해 2015년 부산을 포함한 한국의 3개 도 순회공연을 거쳐, 밀양국제연극제에 참가하여 희곡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이 밀양연극제에서의 수상은 작가인 시라이 케이타에게 있어, 또 극단 배우들에게 있어서도 그 후 작업에 큰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BIRTH>는 중견 남성배우- '불량중년'으로만 등장하는 뜨거운 '남자들의 드라마다. 이 희곡은 야쿠자의 돈을 훔쳐 목숨을 위협받는 처지에 놓인 유지가 암흑세계의 정부인 오자와를 통하여 '보이스피싱'으로 일확천금을 노리게 된다는 에피소드를 축으로 전개된다. 먼저 같은 고아원 출신의 다이고와 그 동거인 마모루를 끌어들여 폐허가 된 극장에 아지트를 꾸리는 4, 보이스피싱 사기의 첫 번째 타깃으로 한 명의 초로의 여성을 선택하게 된다. 그런데 실은 그녀가 다이고와 생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생모였다는

저예산 B급 범죄영화적 설정이지만, 이 이야기가 실제로 무대 위에 올라가는 순간 (혹은 연습장에서 실제로 대사를 입으로 발화하는 순간) 실로 연극적 취향이 희곡 곳곳에 산재하고 있음을 눈치채게 된다.

'보이스 피싱'이란 각자 역할을 맡은 복수의 배우(사기꾼)들이 주어진 '대본'을 면밀하게 수행하면서 교대로 상황을 연출해내어, 그 상황을 관객(=피해자)이 리얼(진실)이라고 믿게 함으로서 성립되는 사기다. 이때 참여자들은 극적인 허구의 상황을 음향과 대사를 이용하여 정확하게 연출해내고, 관객(=피해자)을 그 상황에 몰입시켜 판단력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것은 연극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의도였겠지만 폐허가 된 '소극장'을 아지트로 보이스피싱을 위해 연기연습을 진행하면서, 대사가 능숙하다느니 연기가 자연스럽다느니 서로 코멘트를 주고받는 그들의 모습은, 그 자체가 연극의 제작과정을 보는 것만 같아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게 된다. 그리고 상대방 입에서 흘러나온 '사토시'라는 이름을 연기함으로서 처음으로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다이고라는 인물의 존재는, 연기자의 아이러니를 체현(體現)하고 있는 거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자기 자신과는 다른 누군가(=등장인물)가 되는 것 외에는, 희곡에 쓰인 대사와 역할을 통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심저에 숨어있는 표현 욕구를 표출할 수 없는 '배우'라는 존재의 아이러니.작품의 이런 구조는 시라이 케이타가 작가이기 이전에 배우였다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무대 위 배우들이 얽히면서 발생하는 순간의 즐거움, 연기라는 표현수단이 내포하고 있는 곤란함, 동시에 그 희열을 잘 알고 있는 사람만이 써 내려갈 수 있는 대사들도 그렇다. 허구를 통해 진심을 말하고, '거짓'을 통해 '진실'을 공유하는 '연극'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만의 극작술이 아닐 수 없겠다.

 

 

 이 작품의 내용에 대해 좀 더 파고 들어가 보면, 이 이야기가 '모성의 '부재'라는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연극의 등장인물들은 오자와를 제외하고 세 명 모두 고아원 출신으로 그 성장 과정에서 '모성'을 전혀 모르거나 혹은 모성에 의해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입은 자들이다. 희곡에서 다이고라는 인물은 보이스피싱을 통해 자신을 낳아 준 생모를 만나 비로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맘을 털어놓는다'고는 하지만, 애당초 사기행위의 안에서의 소통인지라 '어떻게 상대를 속여 거액의 돈을 입금받을까'를 목적으로 한 '母子 대화다. 더구나 다이고에게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사토시'(형의 이름)라는 이름을 통해 대화하고 있다는 이중 삼중의 제약이 따른다. 이 와중에 다이고는 입금 되어지는 금액이 늘어가는 것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확인하고 실감한다. 속인다는 행위, 아니 사기꾼이라는 가면을 쓰고서야 비로소 아들은 '어머니'를 향해 자신의 마음을 표출하고, 사랑을 구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모성'에 대한 끝없는 갈망과 함께, 두려움과 주저함을 엿본다.

이 희곡에는 다이고의 심정 변화에도 불구하고 강압적으로 사기행위를 강요하는 유지와 격렬하게 대립하는 마모루라는 인물이 있다. 다이고를 곁에서 지켜 봐온 마모루는 사실, 호모섹슈얼로 다이고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다. 마모루의 간절한 사랑을 알면서도 생리적으로 그를 받아들일 수 없는 다이고는 그 사랑에 감사하면서도 그의 구애는 격렬하게 거부한다. 두 사람의 그로테스크한 '러브신'은 관객의 폭소를 자아내는 한편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거리와 단절감을 연상시켜 어딘가 애달프다. 자신을 필요할 때만이라도 편리하게 이용해 달라고 간절하게 말하는 마모루의 모습은 남성이라는 설정만 눈감으면 그야말로 오래된 멜로드라마의 히로인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모성넘치는 포용력의 그(그녀)를 연기한 남성배우의 애절한 대사는 그로테스크한 연기에 의해 배신당한다. 이 작품에 있어 유일한 여주인공적 존재인 마모루의 말들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모성'과는 상반된 신체적 남성성 때문에 그로테스크한 코미디로 폄하된다. 이 왜곡된 모습 역시, 좀처럼 건널 수 없는 단층의 저편에 갇혀 있는 '모성적인 것'에 대한 태도가 읽혀진다.

 

 

이러한 '모성의 부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가부장적 아버지상 의 붕괴, 즉부성의 부재가 인구에 회자된지는 오래다. 일본 지식인들의 눈에는 현대사회에 있어서 '부성의 부재는 전후 일본 천황제의 붕괴(=절대적 통치자의 부재)와 중첩된다. 그러나 '부성'이란 애초에 이데올로기적 환상에 가까운 것이다. 이와 달리 '모성'이란 좀 더 근원적인 것, 즉 사람이 태어나 자라는 과정에서 거의 무조건적으로 그 사람을 감싸 안는 것으로, 말하자면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근원적인 신뢰와 안심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작가는 이런 '모성이 근본적으로 결핍된 세계를 굳이 선택했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은 이 모성부재의 불모지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성적인 무엇인가를 추구하며 갈등한다. 유지의 경우처럼 '모성'을 완전히 거부하고 니힐리즘의 포로로 살다 죽던지, 아니면 오자와처럼 타자의 폭력에 의해 파괴된 '모성'을 그리워하며 복수에 자신의 인생 전부를 바치던지, 아니면 다이고처럼 그것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가공된 허구의 세계에 몸을 맡기고, 잃어버린 '모성'의 흔적에 매달리던지하지만 작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이 '모성'부재의 저주받은 대지를 부유하는 남자들에게, 짧지만 달콤한 숙면과 안식을 선사한다. 뱃속 태아의 모습으로 잠이 드는 남자들은 과연 지금 여기에 없는 '어머니'의 어떤 모습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이미 다시 이 땅에 태어나 살벌한 대지를 고독하게 부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BIRTH〉…그리고 이 이야기는 다시 시작의 순간으로 회귀한다.

 

시라이 케이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