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펫 위에 소파와 낮은 테이블이 놓여 있는 거실, 30대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와 친구에게 말을 걸듯, 객석을 향해 떠들기 시작한다. 그는 대뜸 자신의 옛 친구 얘기를 꺼낸다. 기억을 더듬는 그의 얼굴에 잠시 미소가 스친다. 지금 그는 15년 전인 2017년의 어느 날 밤을 회상하고 있다. 다시 말해, 무대 위 시간은 2032년이다. 이 작품은 2017년에 요코하마에서 초연된 작품이므로, 당시 객석에 앉아 있었던 사람들은 지금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시간을 '현재'가 아닌 '과거'로 체험하게 된다. 야마모토 스구루는 무대와 현실 사이에 흐르는 시간을 기묘하게 뒤틀며 이 희곡 전체에 마법을 걸어두었다. 아담하지만 쾌적한 아파트의 거실을 배경으로, 과거에 서로 친구였던 세 사람이 등장해 들려주는 우정 이야기. 이 작품을 단순하게 요약하는 것이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만큼 이야기는 공간, 등장인물, 소재 중 무엇을 중심으로 보나 평범한 설정 안에서 흘러간다. 하지만 이 평범함 속에서 한정할 수 없을 만큼 큰 가능성이 뿜어진다. 원동력은 극의 시작과 동시에 무대에 홀로 나와 '지껄이는' 남자, 다마치 가즈노리(이하 다마치)의 말에서 나온다.
다마치는 '과거'와 '미래'로 명명된 두 시간축 사이를 오가며 시간과 공간, 실제와 허구, 꿈과 현실을 뒤섞어버린다. 그의 말 그리고 그가 말하는 대로 펼쳐지는 '그 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느새 약에 취한 듯, 어지러운 상태가 된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딱 한가지, 그에게 사에구사 밤(이하 밤)이라는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말이다. 독자 혹은 관객이 이 작품에 접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유일한 회로는 '그 밤’이다. 다마치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도 전에 '그날 밤'이자 '밤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그 친구'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두 사람이 아직 대학생이었을 때, 강의가 끝난 후 다마치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밤과 처음으로 말을 섞는다. 하지만 밤은 다마치를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듯, 같이 술을 마시자며 자신의 집으로 그를 부른다. 다마치가 그의 집을 방문한 이후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하지만 2032년 현재 둘은 더 이상 연락도 하지 않는 사이가 돼있다. 다마치는 그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밤이 2032년 어느 날 공원에서 아이들에게 꽃을 나눠주다가 체포됐다는 소식을 전한다. 혐의는 '음란물 유포죄'였다. 그가 나눠준 꽃이 페니스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다마치가 옛 친구와 관련된, 괴이하게 느껴지는 뉴스를 본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그는 2017년에 사귀던 애인인 다키자와 안(이하 안)과 우연히 마주친다. 여기서도 시간의 마법은 여전히 힘을 발휘해, 다마치와 안은 말 한마디로 20대와 30대 사이를 뛰어넘으며 대화를 나눈다. 그들의 화제는 자연스럽게 밤이 체포된 이야기로 흐른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이야기 사이로 2017년의 ‘그 밤’은 불쑥불쑥 나타나거나 현재인지 과거인지, 실제인지 허구인지 모를 모습으로 무대 위에서 두 사람과 같이 존재한다. 하지만 여기까지도 밤이라는 그 친구는 그저 괴짜로 그려진다. 이들의 이야기가 분명한 변곡점을 맞이하는 지점은, 다마치와 밤의 추억 순위 중 제1위가 밝혀지는 순간이다. 밤이 냄비를 가방 삼아 메고, 얘기를 나누다 말고 사라지고, 친구를 불러놓고 책을 읽는 것까지는 한 사람의 개성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대마초를 피운다는 사실까지 듣고 나면 어쩐지 이 인물이 꺼려지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다 마침내 밤이 카즈에게 키스했다는 일화가 무대 위에 폭로되면 그때부터 이야기는 처음과 전혀 다른 결을 그리며 흘러가기 시작한다. 극의 초반과 비교했을 때 가장 다르게 보이는 것은 다마치, 밤 그리고 안이라는 세 인물이다. 이는 세 사람이 '키스 사건'을 겪으며 각각 태도를 바꿨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스무 살이었던 어느 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소식을 끊고 사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서로 달랐고 여전히 다르다. 달랐음에도 그들은 밤의 집에 모여 맥주를 마시거나, 재미삼아 영화를 찍기도 하며 추억을 쌓았다. 그 시간이 세 친구에게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사실은 해석의 여지가 없다. 특히 밤이 누구보다 행복했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다마치와 함께할 때면 늘 '해바라기처럼 웃는 가죽나무 순이었으니까 말이다. 밤의 미소는 다마치와 관객들에게는 어색하고 경직돼 보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쉽게 만들어진 미소가 아니었다. 인간은 모든 것에 이름을 붙여야만 하고 모든 것을 언어화해야 하는 숙명을 가졌기에 가끔 말할 수 없는 것이 더 아름다울 때가 있다. 타인 더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데 서툰 밤의 미소는 말로 정리될 수 없는, 말보다 먼저 터져나오는 것이었다. 사랑은 원래 숨겨도 전혀 숨겨지지 않는 것임을 누구나 경험으로 알고 있다. 밤이 자신과 달라도 너무 다른 다마치를 사랑할 수 있었던 이유로 몇 가지나 꼽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도 가장 중요하고 큰 이유로 다마치가 기준이 ‘애매한 사람'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기준이 분명하면 그에 따라 판단을 내리기도 쉬워진다. 살면서 무엇을 따를지 무시할지, 누군가를 사랑할지 혐오할지 결정할 수 있게 되고 급기야 결정해야만 하는 사람이 돼버리기도 한다. 기준이 애매해서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다마치는 무엇을 혹은 누군가를 판단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언제나 많은 친구에 둘러싸여 그들로부터 사랑받으며 살아왔을 것이다. 인간관계에 능숙하지 못한 밤에게 다마치는 태양처럼 빛나는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다마치는 친절한 사람으로 살 수 있었다. 그는 사람을 집으로 초대해 놓고 그 앞에서 책을 읽는 누군가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 다정하고 포용력 있는 사람으로서 애인이 자기 방에 히터를 켜놓고 나가거나, 자신의 컴퓨터로 인터넷 상담게시판에 들어가 파트너와의 섹스가 ’덤덤해요'같은 게시물을 읽은 흔적을 남겨도 아무 말 하지 않을 수 있다. 안은 누구보다 이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사랑받는 쪽은 누군가의 사랑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늘 충분한 관심 속에서 살 수 있기에 그렇다. 한 사람에게 큰 기대를 걸지도 않는다. 친구는 많고 그때그때 만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상대에게 기대하는 바가 적었기에 실망도 크지 않다.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상대가 갑자기 미워지는 경우는 드물다. 사랑하지 않기에 혐오하지 않을 수 있다. 다마치의 이런 면은 밤과 키스한 일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밤은 용기를 내 다마치에게 키스를 하지만 다마치는 그날 일을 우스갯소리로 만들어버린다. 이것은 그에게 밤이 흔한 친구 중 하나였기 때문이 아니다. 다마치로서는 오히려 밤이 자신에게 특별한 친구였기에 밤과의 관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그와 불편해지지 않기 위해 웃어넘기는 전략을 택했기 쉽다. 어쩌면 다마치도 밤의 감정을 이성이 아닌 감각으로 눈치챘을 수 있다. 그러했기에 굳이 약 때문이라는 합리화를 하며 그 밤의 일을 별일 아닌 것으로 넘겨버렸을 것이다. 이번에도 다마치는 친구에 대한 사랑이나, 동성애를 향한 혐오 어느 쪽도 확실히 취하거나 버리지 못하고 손에 둘 다 애매하게 쥔 상태가 돼버린다. 이로 인해 그들의 우정에도 금이 가기 시작한다. 다마치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더군다나 밤이 커밍아웃을 하는 순간까지도 모르겠다는 말로 자신의 무심함 뒤에 숨어버린다. 어쩌면 밤에게는 친구가 자기를 싫어하게 될까봐 고민하던 순간보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어 라고 말하는 친구에게 실망한 순간이 더 많지 않았을까.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다마치가 달라지기 시작한 거 그의 애인이었고 지금은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로 살아가는 안이 역할이이 컸다. 이는 내용에서뿐만 아니라 시공을 섞어서 진행하는 이 작품의 구조와도 연관성이 있다.
핵심은 세 인물의 선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선이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혐오할 필요는 없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것을 가장 적극적으로 외치는 인물이 바로 안이다.
안은 다마치보다 밤과 더 비슷한 캐릭터로 보인다. 안은 다마치를 만나자마자 "나 페미니스트예요."라며 자신의 가치관을 분명하고 직설적으로 밝힌다. 그만큼 주관이 뚜렷하다. 그러나 주관이 뚜렷하다는 점만으로 안이라는 인물을 다 설명할 수 없는데, 안이 자기 생각이 분명한 와중에도 '굳이 말을 하지 않는' 모습을 작품 곳곳에서 드러내기 때문이다. 안은 생각과 기준이 분명하다. 따라서 판단도 빠르다. 하지만 때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마음속에 담아둘 줄도 안다. 다마치가 밤에게 키스당했다는 사실을 말했을 때, 그는 단순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나에게 가장 친밀한 상대'에게 알렸을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하면 아웃팅'에 해당한다. 안은 '밤한테 키스 당했다'는 말을 다마치에게서 들은 순간, 밤이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눈치챈 것처럼 보인다. 다마치와는 정반대이다. 그는 밤과 자신의 관계를 깨는 결단을 내리지도 못하고, 반대로 지키려 노력하지도 않는다. '약 때문'이라는 핑계를 억지로 찾아 자신에게 난감한 상황을 피해갔을 뿐이다. 안이라면 이 상황을 다마치에게 충분히 설명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자신이 알아낸 것을 굳이 말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한다. 그러는 와중에 애인의 기분에 성심껏 반응해주는 세심함은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 또한 안은 밤이 동성에게 키스했다는 이유로, 그를 꺼림칙한 사람이라 단정 짓지도 않는다. 그에 비해 다마치는 동성애에 대한 혐오를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그는 언뜻 아무것도, 누구도 혐오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은 그에게도 호오를 판단하는 기준이 분명히 있다. 다만 그는 타인과 자신의 기준이 무엇이고 어떻게 다른지, 혹은 자신에게도 기준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뿐이다. 누군가는 물리적인 폭력보다 무심한 태도에서 상처를 더 깊이 받기도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다마치가 모르는 것을 안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밤이 동성애 관련 시위에 대해 물었을 때, 그녀는 해당 사건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그래서 밤에게 즉시 대답을 해낸다. 밤은 '앞으로 날 죽이고 말 둔감한 인간들'이라는 분노를 다마치와 안, 두 사람 앞에서 드러낸다. 하지만 그는 아마 그 말을 다마치에게 들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다마치는 밤과 2년 넘게 친구로 지내면서도 밤이 성소수자라는 것을 몰랐다. 밤이 마음을 열어보이려고 시도하던 날 밤에도 다마치는 졸았다. 둘도 없는 절친이라고 믿었던 밤에게 키스를 당하고 난 뒤에도, 다마치는 자신의 불쾌함에만 집중할 뿐 친구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헤아리지 못한다. 급기야 밤이 여장하고 나타나지만, 다마치는 친구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
안은 다마치와는 참 다른 모습을 보인다. 밤이 다마치 앞에서 처음으로 속마음을 꺼내려 할 때, 밤과 같은 시공간에 있는 다마치보다 더 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눈치 없게 졸고 마는 다마치를 깨우기까지 한다. 밤이 "커밍아웃을 했을 때는 '밤의 새로운 탄생을 위하여'라는 말로 축하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촌스럽게 마음도 열지 못하는' 밤을 좋아한다고 솔직하게 말하기도 한다. 그녀가 한 사람의 아내, 한 아이의 엄마가 될 수 있었던 바탕에는 그녀의 섬세함 그리고 자신의 경계를 충분히 이해하고 지켜나가는 노력이 깔려 있음이 분명하다. ‘반드시 헤어질 거야 우리는' 이라는 안의 예언은 여러 가지 맥락에서 들어맞았다. 세 사람은 모두 헤어져 각자의 경계선에 맞춰, 그럼으로써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다소 쓸쓸한 결말이 될 수도 있었는데, 여기서 작가가 걸어둔 마법이 힘을 발휘한다. 다마치는 어느 술 취한 밤에 급하게 받아 적은 밤의 전화번호를 들고, 밤이 살던 집 앞으로 간다. 그 술 취한 밤이 과거인지 현재인지도 불분명한 상태로, 15년 만에 걸어본 전화에 친구의 응답은 없지만 그 친구가 아직 거기 살고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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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스구루(山本卓卓) 극작가, 연출가
1987년생. 야마나시(山梨)현 출신.
2007년에 극단 ‘한추유에이(範宙遊泳)’를 창단, 모든 상연작을 직접 쓰고 연출하고 있다.
평이하고 일상적인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보는 사람의 윤리관을 흔들어 놓는 작풍, 무대 위 배우의 움직임과 문자·사진·색·빛·그림자 등의 요소를 조합하는 연출이 특징이다. 일본 내에서는 물론 아시아권의 여러 나라로부터 주목을 받아, 해외 공연이나 공동 제작 등을 활발하게 이어가고 있다. 2014년에 <유녀 X>로 방콕 시어터 페스티벌(Bangkok Theatre Festival 2014) 최우수 각본상과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으며, 2015년에는 희곡 <태어나지 않아서 아직 못 죽어>가, 2018년에 희곡 <그 밤과 친구들>이 각각 제59회, 제62회 기시다 구니오 희곡상 최종 후보에 오르는 등 국내외 공연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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