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스와 헬레나의 도주가 촉발한 전쟁은 10년을 이어지다 트로이의 패배로 끝이 난다. 그리스군이 귀향을 준비하는 가운데 포세이돈과 아테네가 이들의 시련을 예고하며 극이 열린다. 전쟁 통에 남편과 자식을 잃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그리스군에 노예로 끌려가게 된 트로이 여인들의 비탄이 주를 이룬다. 특히 트로이의 왕비 헤카베와 그녀의 며느리이자 헥토르의 아내였던 안드로마케의 절망은 더욱 깊다. 살아남은 자식들마저 희생 제물로 바쳐져 죽임을 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헤카베는 헬레네에게 전쟁의 책임을 묻고자 한다. 하지만 헬레네에게도 변명의 여지는 있다. 헬레네를 제외한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트로이여인들은 죄도 없이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 죄가 있다면 전쟁 자체다. 모든 전쟁에 정의는 없다. 전쟁의 황폐성과 잔인성만 있을 뿐이다. 이 작품에서 전쟁에 참여한 인물들의 영웅적 면모는 그 어디에도 없다. 승리에 대한 지나친 열망에 사로잡혀 광기를 드러내는 전사들만 있을 뿐이고, 불경을 범하고 패전국 여인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아 끌고 가는 인간답지 못한 인간들이 있을 뿐이다. 아가멤논은 신조차 범하지 않은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를 첩으로 삼고, 목마를 이용해 승리에 기여한 오디세우스는 일국의 왕비 헤카베를 종으로 끌고 가고,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는 아킬레우스 손에 죽은 헥토르의 아내 안드로마케를 노예로 삼고, 안드로마케의 어린 아들과 트로이의 공주 폴릭세네는 희생 제물로 바쳐진다. 이 비정한 전쟁의 끝에 승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다움’을 포기한 불경한 인간들과 수치스런 욕망과 광기에 희생되어 허망하게 사라진 인간들이 있을 뿐이다.
불확실한 신이 인간에게 강요하는 선택의 자유, 혹은 선택의 결여를 다루고 있는 《트로이의 여인들》은, 사르트르에게 모든 수준에서의 현대 인간의 딜레마에 대한 보다 더 깊은 극적 유추를 제공해 주고 있다. 1965년 2월 「국제서민극장」에서 발간되는 월간지인 브레프의 기사에서 사르트르 자신은 에우리피데스 극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의 목적은 현대 속에서 그 작품을 다시 개작하는 것이었다. 에우리피데스가 《트로이의 여인들》을 썼을 때 이들 신화는 이미 의구성을 갖게 되었다. 비록 그것이 너무 초기에 이루어져서 옛 우상을 정복할 수는 없었다 할지라도, 아테네인들의 비평적 정신은 이미 그것들을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에우리피데스가 선조의 양식을 피상적으로나마 닮은 전통적 형태를 사용했다 할지라도, 그는 관객들이 자신의 개념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그가 인습의 범주 안에서 작품을 쓰고 있을 때 그의 작품은 격조가 높아졌다. 베케트와 이오네스코도 오늘날 같은 일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인습을 파괴하기 위해 인습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관객들이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나, 발드 헤디드, 프리마돈 나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방향으로 아테네인들은 아마도 《트로이의 여인》에게 반응을 나타냈던 것 같다. 즉, 그들은 더이상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는 신념을 가진 등장인물들에 귀 귀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처음으로 흥미를 느낀 이 작품의 주제였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작품은 그것이 최초로 상연되었을 때 확실히 정치적인 중요성을 가졌었다. 일반적으로, 전쟁과 제국 원정을 명백히 비난한 작품이다.
우리는, 오늘날의 전쟁은 승리자도 패배자도 없는 핵전쟁을 야기시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작품은 확실히 이런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전쟁은 인간성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트로이 전쟁에서 이겼지만, 그들은 승리의 보답도 받지 못했다. 신은 그들 자신을 멸망하게 만듬으로써 그들의 호전성을 벌하였다. 그 전언은 인간이 전쟁을 피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카산드라의 확언이며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포세이돈이 남긴 마지막 말 「당신은 전쟁이 당신과 모두를 죽일 거라는 것을 왜 모르는 거요?」로서 충분하다. 이 극은 허무주의로 끝난다. 그리스인들이 불투명한 신과 함께 살아야만 하는 것에 반하여, 외부로부터 나타나는 그들의 상태를 볼 때, 우리들은 그들에 의해 거절당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강조하려고 애써왔다. 그리고 헤쿠바 최후의 자포자기는, 인간이 포세이돈의 끔찍스런 최후의 말에 대답하는 것이다. 신은 마침내 인간과 관계를 종식하고 인간에게 죽음을 남겨놓는다. 이것이 최후의 비극적 통고이다. 사르트르 작품을 새롭게 정의하는 문제는 그것이 영원한 것처럼 불가사의한 것이다.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의 여인들과 비교하여 볼 때 사르트르는 원작의 플롯에 상관없이 전 12장으로 구성하고 있다. 즉 신화극의 기본적 구조를 따르지 않고 현대극의 중단막극 형식으로 변경하고 있다. 원작의 프롤로그는 12장으로 나누었으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원작에 없는 장면으로서 포세이돈의 경고 장면을 설정하였다. 그런데 위의 해당 부분들은 사실상 원작의 에피소드 내용의 전개와 일치하지 않는다. 각 장의 설정은 사르트르 나름대로 위기 국면을 조성하거나 장면을 전환시키기 위해서 이루어진다. 무엇보다도 주제를 제시하는 프롤로그 그리고 입장문인 파로도이를 통과하며 코러스가 등장하는 신화적 분위기의 설정이 없는 채 사르트르의 극은 현대의 상황극처럼 시작된다. 물론 사르트르는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을 개작한 이유를 에우리피데스 시대의 사람들이 당연히 이해하고 있는 것을 현대인들이 이해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사르트르의 개작이 그리스 신화 혹은 신화극의 현대화이기보다는 신화 자체를 소멸시키는 구조를 통하여 신의 구도하에서의 인간의 삶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내는 구도에서의 인간의 삶을 대비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의도는 에우리피데스의 원작의 프롤로그에서 성스러움 혹은 신의 질서에 도전하는 인간이 벌을 받으리라는 의미가 짙은 포세이돈의 말이, 사르트르의 작품에서는 인간 세상에서의 죄악으로 인간 모두 망하리라는 의미로 변화하면서 그 말의 위치설 정도 작품의 말미에 두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또한 사르트르는 고전극에서 필수적 요소인 코러스 양식의 운문들을 삭제하거나, 대사로 하는 ’말’로 변형시킨 것은 고전극의 플롯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사르트르는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나타나는 신들의 존재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인간적인 면을 지니던 그리스 신들은 사르트르의 작품에서는 주로 인간의 단점, 약점을 지닌, 인간과 다름없는 존재로 설정된다. 신은 더 이상 정의의 주재자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요컨대 신들은 죽고 인간은 역사로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결국 신들이 주재하는 운명 혹은 전쟁의 숙명성은 사르트르의 작품에서 그 중요성을 상실한다. 즉 전쟁의 의미는 인간의 몫이 된다.
실제로 양차대전 이후의 냉전체제, 알제리 전쟁, 베트남 전쟁 등은 그가 개인적으로 혹은 단체를 조직하여 일관되게 비판한 현대판 식민주의의 소산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르트르의 트로이의 여인들이 현대의 제국주의를 비판하기 위하여 신화를 차용했다는 주장이 옳다고 하겠다.
사르트르가 에우리피데스 원작의 내용을 확대하고 심화한 것은 바로 인류의 정의 상실과 반인류적 범죄행위에 내한 규탄과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에우리피데스가 전쟁의 고통 참상의 제시에 치중했다면 사르트르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인류 스스로를 파괴하는 전쟁을 경고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트로이의 여인들 개작에서 플롯의 변경, 신성성의 부정, 표현의 세속화, 사건의 현대화를 통하여 이 작품이 지니는 탈신화적 특징을 살펴보았다. 신화구조의 파괴와 함께 신의 부정에 이르는 이 작품은 탈신화적 성격으로는 파리떼의 연장선상에 있고 탈종교적 성격으로는 악마와 선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이 사르트르 희곡이 보이는 탈신화적, 탈종교적 성격은 사르트르가 인간존재의 문제를 인간 자원에서 탐색하자는 전략이라고도 볼 수 있다. 형식은 신화극을 차용하되 신과 신화의 개입은 사실상 배제하면서 내용은 현대의 상황극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고전 비극을 토대로 『파리떼』를 쓰게 된 동기를 말하면서 사르트르는 운명의 비극이 아니라 ‘자유의 비극’을 쓰려 했다고 말한 바 있다. 독일의 점령하에서 제약을 받던 상황에서 쓰여지고 공연된 파리떼와 종전 후 사르트르가 정치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1960년대에 쓰여진 트로이의 여인들은 분명 차이가 있다 파리떼 에서 개인의 도덕이 문제 제기가 되었다면 트로이의 여인들에서는 인류 공동사회의 도덕이 문제제기 된다. 그런 점 에서 트로이의 여인들 은 세계의 블록화가 가속되는 현금에 있어서 인류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도덕적 계시록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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