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커가의 3대에 걸친 이야기를 통해 틸다와 코나의 우정을 그린다. 두 사람이 열두 살에 카렐의 편지를 전해 주지 않고 나무 밑에 묻어 안나 선생님과 카렐의 사이를 ‘비밀에 부친 비밀’ 때문에 비극의 씨앗이 싹텄다. 이처럼 사랑의 역사가 뒤바뀐 카렐의 비극은 ‘백년의 비밀’로 나타난다. 한순간의 선택이 운명을 뒤바꾼다는 점에서 내내 뿌리를 뻗고 있는 느릅나무의 존재와 대를 이어 불리는 나무의 노래는 전설처럼 나타난다. 전설의 주인공들은 죽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하면서 이야기가 된다. 지렁이나 도마뱀 꼬리가 잘려도 양쪽 다 살아남듯이, 틸다와 코나는 떨어져 있으면서도 각각 살아남으며 먼 훗날에 재회해도 우정을 회복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함으로써 우정의 끝을 마무리한다.
케라리노 산드로비치는 프로필에서 볼 수 있듯이 연극뿐 아니라, 영화, 음악, 방송 등 다양한 매체에서 활약하는 작가이자 연출자이자, 뮤지션, 배우이기도 하다. 소위 '상업’ 예술이라고 불리는 영역에서도 활약하면서 각종 (소위 '기초예술’에 주어지는) 연극상까지 휩쓰는, 말하기 힘든 활동 양상을 보이는 일본의 대중적 스타 예술인 중 한 명이다. 원하는 표현활동을 위해서라면 특별한 소속이나 팀을 고집하는 법도 없이 수없이 많은 밴드며 연극팀을 꾸렸다가 해체하면서 어디까지나 활동의 중심을 자기 자신에게 두는 그이지만, 이례적으로 오랫동안 지속하며, 여전히 활동의 중심에 있는 것이 극단 나일론100℃’이다. 늘 새로운 작품을 선보여온 것으로도 입증되는데, 그러한 그의 커리어 중 그의 표현 자체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은 지금까지 재공연 한번 없이 예외적인 작품이 바로 2012년 초연 이후 2018년, 나일론100℃의 창단 25주년 기념 라인업에 오른 <백년의 고독>이다. 2018년 공연의 프로그램북에서 그는 "꼭 재공연을 하고 싶은 작품이, 지금으로서는, 유일하다. 왜냐고 묻는다면, '하고 싶어서'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실은 초연 때부터 프로듀서에게 이 작품은 꼭 재공연하고 싶다고 직접 요청한 바 있다. 초연의 완성도에 만족하지 못해서라거나 평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다. 굳이 말한다면, 작품이 원했기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다.
〈백년의 비밀〉은 두 여성의 우정을 축으로 80년, 4대에 걸친 이야기를 그린다. 유복한 베이커 가의 딸 틸다와 4차원 전학생 코나가 십대 시절에 만나 절친이 되는 데서 시작해, 만남과 헤어짐, 삶의 부침, 집안의 성쇠를 겪고 서로 다른 곳에서 숨을 거두는 것으로 이야기를 맺는다. 그리고, 베이커가 저택 정원에 그녀들보다 오래 살고 있는 느릅나무 한그루와 그 나무 곁으로 그녀들의 가족, 친구, 이웃이 몰려들었다가는 사라지며, 한국어로도 A4 100페이지를 넘기는 긴 대본, 공연 기준으로 3시간 반에 이르는 대하 드라마를 지루할 새 없이 촘촘하게 채운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는 이렇다 할 만한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두 친구 사이의, 요약해서 말하면 막장드라마 못지않을, '비밀'이 몇 가지인가 등장하지만, 비밀이 발생하는 사건 당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거나 전모를 재현하거나 회상하지 않아, 그 사건들은 80년의 시간 중 순간으로 스쳐간다. 또한, 틸다와 코나의 관계가 대본의 중심에 놓이고, 그곳에서 가지를 뻗어가는 방식으로 인간관계와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두 사람의 연대기를 시계열로 서술하는 방식이 아니라 삶의 순간순간을 포착해 구성함으로써, 구조 자체에서 서사의 변주가 발생한다. 이를 따라가다 보면, 두 여성의 일생이, 그녀들이 나눈 우정이, 혹은 우정보다 더 깊은 해석 마저 가능하게 할 감정이, 그럼에도 관계와 삶의 무상함이, 마음속 깊이 간직한 각자 삶의 비밀이 연결되며 독자, 혹은 관객을 압도한다. 두 주인공의 우정의 시작, 그리고 관계의 진실성을 의심할 만한 '비밀'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서사가 끝난 후 삶의 깊은 심연으로 미끄러져 내리는 듯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러한 집필 배경에 기인하는 바가 클 것이다. 예기치 않게 흘러가는 삶에 대한 따뜻한, 옹호의 시선이 대하드라 마에 녹아들어 웅장한 인생찬가처럼, 그러나 결코 화려하거나 큰 음량이 아닌 나지막하고 서정적인 음악처럼 들린다. '넌센스 코메디'를 컨셉으로 내걸었던 극단의 지난 작품들과는 크게 분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작가가 대본 말미에 명기했듯, <백년의 비밀> 안에는, 여러 편의 서구 명작 희곡들이 차용된다. 때로는 단순한 영감, 혹은 장면 구조의 차용, 혹은 대사의 변용으로 교묘하게 녹아있는 이 부분들을 찾아내는 것도 희곡을 읽는, 또는 무대화하는 데 힌트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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