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연극배우였던 고일봉은 현재 아들을 잃고 병든 아내 화수를 수발하며 살고 있다. 변두리 지역 룸살롱 반주자로 일하는 그는 성실하게 아내를 보살피지만 사실 그 자신조차도 몸이 좋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일봉은 꿋꿋이 긍정적인 모습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 친구 만수와 친구의 아들 병만이에게서 누에를 받았던 일봉은 누에 두 마리를 키우며 병든 아내와 함께 누에를 바라보며 자신들을 투영시킨다. 날지 못할 걸 알면서도 날개를 만드는, 자신의 몸을 축내며 실을 짓는 누에의 모습을 보며.
이 작품은 결국 '사랑'을 이야기한다. "삶은 그것이 왜 우리에게 주어졌는가 할 만큼 쉽지 않은 사태의 연속이다"라는 말은 정말 가슴 아프게 슬픈 진실이다. 이렇게 '주어져 버린' 인생에서, 이 작품은 그러한 삶을 살아나갈 원동력이 사랑이고, 그 사랑은 맹목적인 것이라 말하고 있다. 실로 그러한 내용이었다. 배우로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았을 일봉, 그가 자신도 몸이 힘들면서 투병 중인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보듬었던 것은 결국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 사랑이 맹목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장의 일자리가 사라져도, 겨우 버티던 단칸방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도 살아나가야 하는 이유는 일봉이 화수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쓰레기로 몸 뉘일 틈조차 여의치 않아 보이는 그 방에서 아내를 항상 보살폈고, 아내 화수가 죽은 후에는 자신도 명이 다한 것을 예감하여 집을 깨끗이 치우고 아내를 만나러 갈 준비를 미리 했을 것이다. 일봉과 화수가 죽은 뒤 그 집에 들어온 새로운 세입자 부부의 입을 통해서 나타난 '실상'은 일봉과 화수가 살아온 삶의 전 과정의 모순과 고난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살아오고 견뎌낼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본질이 무엇인지를 재확인시킨다. 바로 사랑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극 중에서 일봉은 실제 나이처럼 지긋이 나이든 모습으로 분했지만 화수는 젊은 여성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비록 관객들이 연극을 감상하는 시점은 전지적 시점이지만, 본질적으로 이 극은 말미에 세입자 신혼부부가 나타나 실상을 드러내는 그 장면 이전까지 일봉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 화수는, 일봉이 "우리 이쁜이"라고 부르는 그 예쁜 모습으로 관객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일봉에게 화수의 모습은 나이가 들어도, 병이 들어도 항상 그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비단 남녀 간의 사랑만을 그리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극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사랑하는 대상이 있다. 일봉에게는 아내 화수가 있고, 일봉의 친구 만수에게는 아들 병만이 있다. 그러나 유일하게 일봉과 함께 룸살롱에서 일하는 미스홍은 사랑하는 대상이 없는데, 그녀는 결국 자신의 손으로 삶을 마감하는 선택을 내린다. 이 작품은 어떠한 형태로든, 삶을 움직이고 버티게 하고 위기를 뛰어넘는 힘을 발휘하게 하는 원동력이 사랑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사랑에 더하여, <우주의 물방울>은 그 이상의 의미를 이끌어내려는 모습을 보였다. 누에는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실을 짓고, 날지 못하고 입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변태한다. 이로써 누에는 유한한 삶을 마감하게 되지만 그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의 의미는 무한한 것이다. 마치 일봉과 화수의 삶이 유한했지만, 그들의 삶과 사랑이 무한하게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확장되는 것과 같다. 비록 개개인은 우주의 물방울처럼 아주 미미한 존재지만 그것은 이전에도 존재해왔고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유한한 생명을 품고 있지만 개인은 생명이 다하더라도 이 땅에 존재했다는 것을 남길 수 있고 그로부터 무한한 가치를 발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아름답고 고결한 것이지만 마냥 그렇기만 한 것도 아니다. 사랑은 질척일 수 있고 또 아주 모난 형상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사랑의 여러 단면들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희생하는 것, 고결한 것을 그리면서도 맹목적이고 누군가(신혼부부 중 아내)에게는 무섭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어떤 것.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 드러난 사랑을 한 단어로 묘사할 수는 없지만, 값싼 사랑을 그리지 않고 그 이상의 함의를 담아냈다는 점만으로도 이 작품은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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