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시아버지와 남편의 뒤를 따라 상해로 망명한 이후, 해방까지 임시정부와 함께 25주년을 함께한 여인, 정정화! 일반인의 귀에 다소 생소한 그 이름, 그녀의 발자취를 조용히 추억해 본다. 일본이 침략야욕을 서서히 드러낼 즈음인 1900년, 수원 유수를 지낸 정주영의 셋째 딸로 그녀는 서울에서 태어난다. 할아버지의 성화로 그녀는 열 한 살이 되던해, 대한협회회장 김가진의 장남 김의한과 혼인한다. 스무살 되던 해, 삼일운동이 일어나고 첫 딸을 낳자마자 잃고 만다. 그 충격에서 헤어나기도 전에, 우연히 시어머니가 건네 준 신문을 통해 시아버지와 남편의 망명 소식을 접한다. 그녀는 시대에서는 친정에 다녀오겠다고 집을 나서, 무작정 시아버지를 뒷바라지 하겠다는 생각으로 상해로 간다. 상해에 도착해 시아버지로부터 환대를 받은 그녀지만, 그곳 생활은 말도 못하게 궁핍하다. 결국 국대로 들어가 돈이라도 좀 구해오겠다는 생각이, 임정 법무총장 신규식의 지시를 받으면서, 독립자금 모금이라는 공적인 임무로 바뀐다. 하지만 그 길은 쉽지가 않다. 국내에서의 호응도 생각했던 것 만큼 좋지 않을뿐더러 비밀리에 오가는 국경도 위험천만이다. 신의주 비밀거점인 이세창 오라버니는 짧은 사이 오라버니로 지낼 만큼 친근했고 그녀에게 독립은 남이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며 그 독립이 누구를 위한것인가를 생각하게 해준다. 세 번째 잠입시 그녀는 결국 체포되고 김태식이라는 악질 형사를 만나지만 명문가라는 이유로 다행이 풀려난다. 석방 후, 그녀는 시아버지의 訃告를 전해듣는다. 그녀는 그 이후 유학도 생각했지만, 연이은 친정아버지의 별세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다시 상해로 돌아온 그녀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인해, 임정이 가흥으로 피신하게 되고 가흥에선 백범김구의 어머니 곽여사를 만나, 아들을 구국의 열사로 키운 참 어머니의 위대함을 배운다. 임정이 이합집산의 침체기를 빠지자, 남편은 중국관청에 취직해 이후 4년간의 은거생활을 한다. 그때 국내에서 온 시누이 영원은 그런둘의 생활을 질타하고 망명생활에 대한 회의에 빠진다. 이윽고 중일정쟁이 일어나며 정정화일가의 잠시 안락한 생활도 끝 이난다.
다시 임정 일행과 합류하여 피난길에 오른다.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일본군에 쫓기어 중경아래 기강현에 정착할 때까지 장장 오천 킬로에 이르는 대장정을 한다. 그 피난길의 여정 속에서 나라 잃은 백석의 설움을 곱씹는다. 중경에 도착한 이후로는 국민당에 가입하고, 애국부인회 활동 등 뒷바라지뿐 아니라 공적인 임무에도 바쁘게 된다. 해방을 앞두고 학병으로 징집된 이후, 탈출하여 광복군이 되려 오천킬로를 행군하여 임정을 찾아온 천년들을 보며 조국이 무엇인가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해방을 맞는다. 하지만 그건 강대국으로 선물 받듯이 찾아든 것 일뿐 우리손 으로 되찾은 해방이 아니었다. 그녀는 난민선을 타고 부산 앞 바다에 도착했으나 방역을 이유로 삼일간을 물위에 떠있으며, 그 해방의 의미를 실감케 된다. 가족과의 상봉, 그 기쁨도 잠시, 6.25를 맞게 되고 남편은 납북당한다. 남편의 소식을 알려고 만난 옛 동료가 이북사람이라는 이유로 그녀는 체포된다. 부역죄 라는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요시찰인으로 지목하여 한참을 그녀는 경찰들로부터 감시 받게 된다. 그녀는 해방이후 근대의 우리나라를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원칙이 없다고... 그리고 1991년, 아흔 둘의 나이로 이미 돌아가신 임정의 어른들 곁으로 간다. 그녀는 이제 자신을 보지 못했으나 분단된 민족의 통일을 자손들이 하루빨리 보아주기를 소원한다.
정정화(鄭靖和, 1900년 8월 3일~1991년 12월 2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한성부에서 태어나 1910년 어린 나이에 김의한과 결혼했다. 남편은 구한말 고위 관료로 조선귀족 작위를 갖고 있던 김가진의 장남이었다. 김가진은 1919년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전격 망명했고, 정정화는 시아버지와 남편을 따라 1920년 역시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는 감시가 덜한 여성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역할을 맡아서 중국과 국내를 오가며 10여년간 자금 모금책, 연락책으로 활동했다. 1940년 한국혁명여성동맹 (韓國革命女性同盟)을 조직하여 간부를 맡았고 충칭의 3·1 유치원 교사로도 근무했다. 1943년 대한애국부인회 훈련부장이 되는 등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여성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았다면 패망 조선의 판 서 며느리라는 기득권을 인정받아 식민지 땅 에서나마 영화를 누렸을 여인.
그러나 상해임 시정부로 망명한 시아버지와 남편의 뒤를 좇아 「마님」대신「후동어멈」이라는 필부(匹婦)의 이름을 얻어 치마폭에 군자금을 숨기고 국 경을 넘던 여장부, 정정화(1900~91). 건국 50 주년 광복절을 즈음해 그의 삶이 「아! 정정 화」라는 제목의 연극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있다. 이런 분들의 삶을 제대로 기리는 게 건국 50주년에 해야 할 일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정정화(190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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