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명의 죄수들이 출소한다.... 그들은 빛보다 빠르게 교도소를 벗어난다. 자유에의 갈망이든 환희이든 빠르면 빠를수록 추락은 더욱 끔찍하다. 출소자들은 도시로 뛰어든다. 그러나 튕겨져 나갈 뿐이다. 거리의 인파속에서도 지하철 안에서도 시장에서도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그들을 알아내고 멀어진다. 숨을 곳은 어디에도 없다. 게임 같다. 쫓는 자가 없는 데 쫓기는 게임. 밀어내는 자가 없는 데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게임. 도시는 거대한 게임장이고 출소자들은 표적이 되어 도망 다닌다. 때로는 리얼하게 때로는 환상적으로. 출소자들은 가족을 찾는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기다리지 않았다. 어떤 출소자의 가족은 이미 죽었고, 어떤 출소자의 가족은 이별을 선언하고, 어떤 출소자는 가족을 만나기도 전에 살해당한다. 안개가 자욱한 기차 길 옆에서 울부짖는 기적소리를 들으면서도 기차를 타고 떠날 곳이 없는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가 어둠의 중심에 서있는 주술사 같은 법무부 연구원들의 연구발표로 진행된다. 그들은 암실에서 막 현상된 강렬한 흰색과 검은색의 사진들을 우리 눈앞에 들이민다. 그건 끔찍한 우리 도시의 얼굴이다. 4명의 재소자들이 출소한다.... 그들은 모두 사회에 재적응하는 데 실패한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실패하게 되는지 법무부 소속 연구원들의 논문과 비디오, 영상을 통한 연구발표가 이 연극의 내용이다. 그리고 관객은 그 모든 이야기를 거리의 악사의 노래를 통해 듣는다. 거리의 악사는 예술가들에 대한 은유이고 새로운 삶의 방법을 제시하고자 하는 상상력이다.
극단 동이 선보이는 창작극 ≪샘플 054씨 외 3인≫(강량원 작․연출)이 서울연극제 공식 참가작으로 대학로 예술극장대극장의 무대에 올랐다. 무대는 컸고, 무대에 그려지는 장면들은 대부분 작았다. 섬세하게 계산된 극단 동 배우들의 몸짓은 이발소 장면에서 여러 명의 인물이 등장할 때를 제외하곤 큰 무대 속에서 작고 왜소하게 느껴졌다. 작은 장면이 변할 때마다 무대소품들을 바꿔야 했고, 그것을 위해 암전도 잦았다. 잦은 공간 변화를 수용하기 위해 무대를 분할하여 활용함으로써 황량한 여백이 만들어졌다. 홍시야가 작업한 무대는 버려진 값싼 폐기물들로 만들어져 버려진 인간 샘플들의 처지를 환기시켰고, 이층 발코니 석에 자리 잡은 창작국악그룹 불세출은 극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의 의미심장한 가사를 노래함으로써 배경음이 아닌 적극적인 주제 전달에 한 몫을 했다. 이들의 협력 작업을 통해 탄생한 무대 위에서 속상하도록 생생한 현실적인 이야기와 기발한 만큼 낯선 장면들이 2시간 동안 이어졌다. 3개의 극 테두리로 짜여진 ≪샘플 054씨 외 3인≫에서 관객들은 법무부 연구원들의 연구 발표 현장에 초청되어 연구원들의 친절한 설명과 함께 샘플 재소자들의 현실 적응훈련 녹화 영상을 관찰한다. 인간이 아닌 샘플로 처리되는 4명 재소자들의 이야기, 이들을 감시하고 관찰하는 법무부연구원들의 보고회,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를 모두 알고 있는 거리의 악사의 노래가 그 3개의 극 테두리다. 책자에도 소개되지 않은 거리의 악사가 부르는 노래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구성한다. “고단한 삶 속에서 찬란했던 과거를 추억하지 말고, 가족과 국가를 떠나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자”는 거리의 악사의 외침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기능이 그러하듯이 매우 직설적으로 작품의 주제를 전달한다. 결론적으로 ≪샘플 054씨 외 3인≫은 “배우의 신체를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형식의 연극”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작품이었다. 여기에 더해진 것이 있다면 “지금, 여기”의 사회 현실이 다소 친절하게 문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매우 연극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진 유사 다큐멘터리
강량원의 작품에서는 첫 장면이 중요하다. 강량원작, 연출은 자신의 연출 개념을 설명하는 상징적인 장면을 첫 장면으로 선택한다. 이야기의 맥락을 벗어나지 않는 매력적인 첫 장면을 제시하여 작품의 연출개념을 관객들에게 인지시키는 이런 방식을 나는 일종의 실질적 프롤로그로 이해한다. ≪샘플 054씨 외 3인≫ 역시 흥미로운 프롤로그로 시작된다. 한 사내가 나타나 쓸쓸한 음조에 무거운 가사내용을 읊조리고 사라지면, 곧이어 철로가 갈라놓은 이쪽과 저쪽에 등장한 두 남녀는 마주선 채 거리를 유지하며 밀고 당기는 힘든 대화를 이어간다. 여기서 구부정한 등, 두껍고 시커먼 외투 속에 감춰진 작은 체구, 고정된 시선, 장시간의 노동으로 단련된 굵은 종아리를 지닌 여인의 모습은 사회와 당당히 마주하지 못하는 소외계층임을 드러내기에 충분하지만 그녀가 구두를 털어내는 동작, 손으로 우산을 톡톡 치는 동작, 구부정한 0자 다리로 어기적거리며 걷는 동작 등을 통해 여인에 대한 보다 상세한 정보가 제공될 수 있었다. 기찻길 옆에서 오막살이를 할 것 같은 여인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사내는 누구인가. 이들은 어떤 사정을 숨기고 있는가. 첫 장면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의미심장한 물음을 던지며 육중한 철문 너머로 사라진다. 동시에 무대 앞쪽 오케스트라 석에서 6명의 연구원들이 솟아오른다. 6개의 거만한 표정으로 관객들을 훑어보는 6명의 연구원들 뒤로 육중한 철문이 내려진다. 관객들이 재소자 교육 프로그램 개선을 위한 연구 발표를 듣는 청중으로 소환되는 순간이다. 첫 장면에 대한 궁금증은 수석연구원의 설명과 그가 제시하는 장면에 관객들을 집중하게 만들고 장면의 상황 속으로 빨려 들어가 청중이 되도록 한다. 이제 4명의 재소자들의 사연을 청중들은 지켜보게 된다. 4명의 샘플들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보여 지는 방식은 교차 편집된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첫 장면에서 악사의 쓸쓸한 노래에 감정이 흔들렸던 관객들은 갑자기 영화 속 영상을 냉정하게 관찰하도록 종용받는다. 그리고 재소자 샘플들의 현실 적응 훈련의 정황을 거리를 두고 관찰한 청중들은 샘플들의 현실 적응훈련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단언하는 연구원들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거릴 수도 있지만, 그들의 설명에 동의할 수 없는 상황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샘플 054씨 외 3인≫에서 연출이 의도했던 관객들의 참여는 이처럼 이야기가 제시되고 보여 지는 방식의 차이를 통해 관객들의 위치를 변화시킴으로써 가능할 수 있었다. 감정이입보다 낯설게 하기를 통한 이화작용을 통해 무대 위 상황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려 했던 브레히트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샘플 054씨 외 3인≫의 법무부 연구원들은 공연 초반 샘플들의 현실 적응 훈련 과정을 가감 없이 녹화한 영상 곧 일종의 관찰, 기록된 다큐멘터리로 소개한다. 그리고 공연 후반 그것이 객관적 관찰과 실험으로 구성된 다큐멘터리라는 점을 강조하며 거기서 도출된 결과를 사실로 받아들일 것을 청중들에게 종용한다. 그러나 “사실이란 없다, 해석이 있을 뿐이다”라는 니체의 전언처럼 사실이란 만들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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