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최초의 여성서양화가 나혜석의 못 다한 이야기!
'이혼고백 장’ ‘정조유린청구소송’등 끊임없는 스캔들을 몰고 다닌 비운의 천재여류화가 나혜석! 그녀는 천재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길 원했다. 그녀 가슴 깊이 원했던 하나의 이상은 그냥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평범한 가정에서, 아이들과 함께, 투명한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 미학교수 장민호가 나혜석 기념사업회의 초청을 받아 나혜석 그림의 미학적 가치를 연구하게 된다. 그 와중에 나혜석이 작사한 <인형의 家>를 발견한다. 그런데, 그 노래는 장민호의 어린 시절, 엄마가 집을 떠나기 전에 끊임없이 부르곤 했던 바로 그 노래였다. 장민호는 그때부터 단지 그림뿐만 아니라 나혜석의 모든 것에 집착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버린 엄마를 찾는 길이라 생각했으니까.
‘인형의 家’는 역사 속의 인물을 등장시키되 화석화된 인물 그대로 등장시키진 않는다. 소통부재의 시대인 현대에 소통 받지 못했던 실존했던 인물과 현재를 살아가고 있을 법한 인물이 만나 소통하고자 하는 열망을 그린 작품이다. 따라서 비록 역사 속에 실존했던 인물이라 할지라도 사실에 입각해서 성실하게 재현하진 못했다. 지나친 왜곡도 없었으나 다큐멘터리로 그리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나혜석은 이전에도 작품의 소재로 다루어졌다. 기존의 작품에서 나혜석을 다루는 방법은 나혜석과 남자들 간의 스캔들이 중심이었다. 하지만 ‘인형의 歌’는 무엇보다도 한 인간이자 어머니이며 예술가로서의 나혜석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 작품이다. 따라서 나혜석을 다룬 기존의 작품들과도 분명히 차별화된 작품이다.
이 연극은 1921년 입센의 <인형의 집>을 읽고, 나혜석이 쓴 <인형의 家>라는 노랫말대로 노래 가(歌)자를 제목으로 붙여 <인형의 歌>라고 제목을 정하고, 나혜석의 그림과 사랑,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자식에 대한 모성애를 가상의 인물인 장민호라는 기자를 등장시켜, 그의 눈을 통해 들어난 나혜석의 모습을 하나하나 엮어나갔다. 나혜석의 일대기를 공연하기위해 작가와 연출가가 만나 나혜석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이국에서의 사랑을 두고, 두 사람의 견해가 다름으로 해서 벌이는 갈등도 나혜석의 일대기에 복선으로 깔고, 거기에 음악과 무용을 곁들여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공연이었다.
무대에는 배경 막에 커다란 나혜석의 초상화가 부착되어 있다. 무대 좌우에는 역동적인 소조 상(像)이 있는데, 실은 마임이스트처럼 4인의 남녀 무용가가 정지 상태로 서있는 모습이다. 소조상의 4각 받침대는 천정에서 내려온 수많은 가는 비닐선과 연결되어있어, 무용가들의 몸짓에 따라 소조상은 변형을 이룬다. 정면의 초상화는 좌우로 갈라져 나혜석의 등장 로로 사용이 되고, 무대바닥은 왼쪽이 한단 높이로 되어있어, 장면변화에 따라 바닥이 좌우로 갈라져 짙은 농무 속에서 무용가들이 틈새사이를 상여를 메고 통과하기도 한다. 무대에는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이젤과 화필이 그리고 펜싱 검 등이 무대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배경 막 오른쪽에 신디사이저와 대금과 소금, 그리고 해금 연주자의 모습이 간간히 불빛에 드러나기도 한다. 연극은 도입에 백색분장과 백색의 간편한 의상차림의 무용가들이 소조대 위에 조각상처럼 서 있다가, 신호음이 울릴 때마다 춤추듯 신체를 움직여, 변형된 모습의 소조상을 창출해 내기도 한다.
훤칠한 미남인 작가가 등장해 나혜석의 일대기를 연극으로 공연하려 했으나 극의 내용을 두고 작가와 연출가의 의견충돌로 결국 희곡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해설과 함께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저는 연출가가 등장하고, 연출가와 작가의 대면은 펜싱 검의 눈부신 결투장면으로 시작된다. 작가에게 연출가는 나혜석에 관한 사실이 아니라 진실한 희곡을 쓰라며 알듯 모를 듯한 주문을 한다. 곧이어 배경 막에 부착된 나혜석의 초상이 좌우로 갈라져 열리면 절세의 미녀이자 천혜의 예술가 나혜석이 모습을 드러낸다. 향후 나혜석은 객석을 매혹시키고, 남성관객의 시선을 자신에게 고정시킨다. 장면변화나 주인공들의 심리변화에 따라 무용가들이 동조하듯 벌이는 마임과 춤사위는 연극을 환상의 세계로 이끌어 가고, 2인의 남성연기자가 나혜석의 남편 역과 애인 역 그리고 기자 역 등 나혜석 일대기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역을 번갈아 해가며 호연을 펼치니, 관객은 시종일관 극에 몰입하게 되고, 관객자신도 동시대의 인물인양 공감대가 형성되기도 한다. 나혜석의 사랑과 이별이 극중 내용으로 펼쳐지고, 나혜석의 아들의 상여가 무용가들에 의해 운반되고, 짙은 농무 속에서 비장 침울한 음악과 함께 상여가 갈라진 무대의 틈새 한가운데로 내려설 때에는 지구의 중심부로 내려가는 듯한 강렬한 느낌이 들었고, 도입부 소조대의 움직이는 조각상과 후반부의 가옥의 방화 장면은 명장면으로 기억에 남는다. 나혜석의 화려했던 데뷔시절 그녀를 취재했던 장민호라는 기자가 나혜석이 말년에 사람들에게 도외시되고,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쭈그리고 앉아 작업을 펼치는 그녀에게 다가가, 어찌 가정과 자식을 버리고, 예술을 빙자한 향락을 쫓아 떠날 수 있었는가를 묻자, 나혜석은 분노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니, 기자는 그녀가 사라진 방향으로 등잔불을 던지고, 그 결과 방화가 일어나 나혜석의 작품은 집과 함께 소실되고 만다. 대단원에서 아들 같은 기자의 품에서 애처롭게 숨을 거둔 나혜석의 모습 주위로 무용가들의 춤사위가 펼쳐지고, 그들이 연극의 도입에서처럼 소조대로 들어가 정지 상태의 조각상이 되면 연극은 마무리를 하게 된다.
나혜석(羅蕙錫, 1896~1948) 경기도 수원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진명여고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오빠 나경석은 자신의 친구 최승구를 나혜석에게 소개하였다. 조혼해 아내가 있었으나, 최승구와 나혜석은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그러나 최승구는 폐병으로 사망하니, 나혜석은 그림그리기에 전념했다. 1919년 나혜석은 3.1운동에 가담하고 이화학당 학생 만세 사건에 앞장섬으로써 5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석방이후 나혜석은 모순된 현실과 타협하는 길을 선택하게 되고, 일본 유학생 김우영의 구애를 받아들여 1920년에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1921년에는 경성일보사 내청각(來靑閣)에서 조선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유화 개인전을 해 대성공을 거두었다. 1926년 남편 김우영과 함께 한 3년간의 유럽여행 중 천도교 선도자 최린을 만나게 되고, 나혜석은 남편 김우영의 친구인 최린에게 유혹되어 불륜을 맺고, 이혼을 당하게 된다. 그 후 화가로서의 삶에 더욱 매진한 나혜석은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정원'으로 특선하고 이 작품으로 일본에서도 제국미전에서 입선한다. 1935년 나혜석은 서울 진고개(충무로) 조선관에서의 개인전 실패와 아들 선이 폐렴으로 죽자, 불교에 심취한다. 승려생활을 매력을 느껴 수덕사 아래 환희대에서 오랜 동안 머물었으나 불교에 귀의하지는 않았다. 이후 상경해 한때 청운양로원에 수용되기도 했고, 1948년 시립 자제원(慈濟院)에서 생을 마감했다. 1918년 <경희> <정순> 등의 단편소설을 발표해 소설가로 활약하기도 했으며 대표적인 회화작품으로는 <나부1928>, <선죽교 1933>가 있다.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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