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사랑을 하는 의사와 아픈 사랑을 했던 사라가 있다. 의사는 끊임없이 사라의 아픔을 치료하려한다. 사라는 알고 있다. 그녀의 사랑은 어떤 약물로도 어떤 말로도 치료받을 수 없다는 것을. 초점 없는 눈으로 사라는 허공을 응시한다. 의사는 사라의 몸에 주사한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녀의 몸에 화학 약품을 주입하는 것뿐이다. 사라는 말할 수 없다. 이미 온몸의 세포들은 그녀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눈이 멈춘 바로 그곳에 사라의 사랑이 아직도 존재한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사랑은 그녀의 공간들을 메우며 압박하는데...
사라 케인(Kane)은 영국의 요절 극작가다. 1999년 28세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첫 희곡인 '파괴된(Blasted)'을 비롯한 그의 작품들은 그리 편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이야기 구조 보다는 한 장면, 한 장면의 이미지가 강렬하다. 그가 즐겨 사용한 극작 소재는 사랑의 상처와 고통, 성적 욕구, 고문, 죽음 등 어두운 것들. '정화된 자들(Cleansed)'에서는 그레이스가 죽은 마약중독자 오빠 그레이엄의 영혼과 성행위를 한다. 관객에 따라서는 메스꺼움이나 혐오감을 느낄 수 있는 소지도 충분히 있다.
제32회 서울연극제의 공식참가작으로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무대 위에 오른 '사라-0(제로)' 에는 사라 케인 작품의 특징이 묻어 있다. 자연스러운 결과다. 이 작품의 구상 초기 단계에서 황진주 작가와 이성구 연출은 사라 케인의 삶과 작품 속에서 나타난 도발적이고 잔혹한 사랑의 얘기를 추적해 무대 위에서 구현해 보자는 얘기를 했었다. 헌데, 작품이 완성돼 가는 과정에서 사라 케인 작품 속의 인물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인물이 만들어졌다. '사라-0'는 두 개 축으로 장면이 전개된다. 한 축은 의사와 그의 정신세계 속 여인이다. 의사는 여인을 사랑했으나 여인은 자살했고 의사는 그녀를 잊지 못한다. 여인이 죽은 시점을 기준으로 의사의 시간은 정지되어 있다. 다른 한 축은 그 의사의 여자 환자와 그녀의 내면세계다. 이 환자는 어렸을 적 아버지를 사랑했다. 아버지를 잊으려 한 남성을 사랑했으나 실패하고, 다시 동성을 사랑했으나 그마저 이뤄지지 않았다. 현실세계에서 의사는 여자 환자를 치료하는 존재이지만 의사 역시 상처가 깊은 환자다. 두 사람 모두가 각자의 비현실세계를 통해 아픈 기억과 상처를 끄집어낸다.
이 작품의 무대는 독특하다. 객석 쪽은 의사와 환자 그리고 남자 간호사가 있는 현실의 세계다. 날카롭고 아주 찬 느낌의 은색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현실세계는 커다란, 역시 알루미늄 문을 사이에 두고 무대 안쪽 의사의 정신세계 또는 환자의 내면세계와 공간이 분리되어 있다. 극이 진행되면서 의사는 문 열림과 함께 자신의 기억 또는 비현실적 정신세계로 빠져들어 가고, 환자 역시 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내면세계로 진입한다. 현실세계와 비현실세계에는 모두 제목에 있는 '제로'를 상징하는 원형 틀이 있다. 말 그대로 '없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고 무한대 또는 굴레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무대 깊은 곳의 정신세계에서는 사랑을 갈구하며 말로써 사랑을 확인하려는 의사가 여인의 목을 조르는 장면이나 자위하는 몸짓 등이 있다. 내면세계는 아버지를 사랑하거나 이성을 사랑하는데 실패한 환자의 자해 행위 같은 이미지들의 몸짓을 통해 뚜렷하게 부각된다. 병렬 구조의 장면들만 있고 기승전결이 없는 작품이며 그만큼 난해하다. 대신 극 속에는 사랑, 고통, 욕망과 결핍의 이미지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강한 시각적, 또 그 너머 심적 느낌을 자극한다. 이해에 어려움이 있지만 극의 마지막에 가면 의사와 환자가 서로 사랑에 관한 상대방의 아픔을 깨닫게 되면서 자신 속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게 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작품의 성격상 배우들의 연기가 뚜렷이 부각되는 연극은 아니다. 무대는 인상적이다. 다만, 첫날의 경우 현실세계와 비현실세계를 오가는 장면에서, 열리고 닫히면서 이미지 각인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문의 작동이 제대로 되지 않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
20세기 마지막 천재로 불리는 추상적· 초현실주의적 극작가 사라 케인의 삶과 이야기를 모티브로 했다는, 2011 서울연극제 공식참가작 황진주 작 <사라-0>. 머리 아픈 연극일 거라는 선입견대로 수많은 오브제와 상징으로 이루어진 이 연극은 분명 쉽지만은 않았지만, 무척이나 깔끔하고 명쾌했다.
"그 여자는 자기 가슴을 수십 번 난도질했어......."
쉼 없이 환풍기가 돌아가는 가운데,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문 의사의 읊조림으로 극은 시작된다. 극의 시작을 알리는 의사의 내레이션은 소름끼칠 정도로 멋있다. 친아버지를 집착적으로 사랑하여 다른 남자를 사랑하지 못하는 여인과, 사랑하는 여인의 자살 이후 시간이 멈춰버린 의사의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나열된다. 그들은 멈춘 과거의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절규하고, 자신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는다.
차세대 연출가 인큐베이팅을 통해 선정되어 서울연극제에 참가하게 된 작품인 <사라-0>는, 그만큼 연출력에 집중해서 감상할 수 있는 연극이다. 구석구석 치밀하게 배치된 차가운 오브제, 흰색과 붉은색의 눈부신 대조, 쉴틈 없이 쏟아지는 상징의 언어들. 고통 받는 두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묘사하는 장면은 '(섬뜩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떠올리게 했다. 주인공의 내면의식을 반영하는 서로 다른 자아들의 모습이 기괴하리만큼 아름답고 섬뜩하게 표현된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장면들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상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것이 무척 직접적이다. 짧은 시간 내에, 이 극의 궁극적인 주제인 '사랑의 고통'에 아주 깊숙하게 가 닿는 느낌이다. 한 번도 에둘러 말하는 법 없이 이 극은 정통으로 고통의 본질을 뚫는다. 몹시 거칠고 음습하기 때문에 극이 끝난 후에도 마음이 불편하지만, 결코 지저분한 잔상으로 남지는 않는다. 도시적 깔끔함으로 최악으로 추악할 수 있는 사랑의 고통을 '묘사'해 낸, 무척 인상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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