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낙형 '토란 극'

clint 2016. 9. 28. 11:56

 

 

 

일가족이 국도변을 벗어난 황폐하고 어둑한 장소에 모였다. 아버지와 셋째딸은 이미 죽었고, 어머니와 세 아들, 그리고 넷째 딸은 아직 살아 있다. 하지만 작가 김낙형은 이 일곱 명의 등장인물에게서 특정한 사건과 에피소드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가 더 깊숙하게 앵글을 들이댄 피사체는 그들의 몸속에 갇힌 무의식이다. 그는 그렇게 일가의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오가면서 이야기하기를 벗어난 보여주기의 방식으로 관객과 만난다. 일가는 누구랄 것 없이 서로를 외면하며 겉돈다. 정신은 이미 메마른 낙엽처럼 바스라졌고, 그들의 몸뚱이는 중력에서 벗어난 허깨비처럼 유영하면서 제각기 엇갈린다. 서로에 대한 사랑과 유대를 상실한 채, 각자의 허공을 바라보며 각자의 이야기를 주절거린다.

김낙형의 연극은 어둡고 시적이며 비의적(秘儀的)이다. 일곱 배우의 입에서는 최대한 압축된 대사가 한 줄의 시처럼 흘러나오고, 이들의 몸짓은 하나의 으로 연출되면서 언어를 뛰어넘는 묘한 분위기와 상징성을 드러낸다. 아울러 배우들의 몸과 한 덩어리로 어울리는 오브제들. 이를테면 일렁이는 촛불과 천장에 매달린 철봉, 낡은 놋대야 같은 것들. 일체의 불필요한 소품들을 걷어낸 무대에서, 단지 그 몇 개의 사물들이 생명력을 얻어가는 장면은 분명 김낙형 연극의 묘미로 꼽을 만하다. 긴장감 넘치는 오브제의 미학이 시종일관 펼쳐진다. 그 덕분에 이 연극은 자칫 난해함이라는 수렁에 빠질 수도 있지만, 배우들의 말과 몸에만 의존하는 연극과는 또 다른 맛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가장 시선을 잡아당기는 오브제는 놋대야. 그 불쾌한 금속성의 음향으로 아버지가 겪은 자동차 사고를 상징했던 놋대야가 어머니의 출산 장면에서 아이를 받아내는 둥근 그릇으로 전환되는 장면은 기발하다. 죽은 아버지가 등에 짊어진 커다란 나무판은 죽은 자를 위한 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생전의 아버지가 평생토록 추구했던 돈을 향한 욕망으로 표상되기도 한다. 이처럼 <토란->에 등장하는 오브제들은 둘 이상의 중의적 상징성을 띤 채 극 속으로 녹아든다.

 

 

 

 

 

김낙형은 <토란->이 무슨 뜻이냐는 질문에 흙 토()에 어지러울 난()”이라고 짧게 답한다. 작가의 입을 빌리자면 이 연극의 주제는 자아를 상실한 현대인의 삶에 대한 연극적 보여주기. 좀 더 부연하자면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꿰맞추며 살고 있는 뿌리 뽑힌 인간상, 시간조차도 주체적으로 가질 수 없는 인간, 애통해하는 감정마저도 사회적 요구와 관습에 박탈당한 사람들에 대한 묘사다.

 

우리들의 집, 우리들의 삶의 한 면을 무대에 들어올린다여기 가족을 잃고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 자신의 숨겨진 모습과 대면하는 한 가족의 인물들이 있다. 그들은 점차 가족의 죽음마저도 자신들의 것이 아니며 어쩌면 누군가에게 빼앗겼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게 된다.. 그 죽음에서 오는 자신들의 감정조차.

그들이 모인 곳은 국도변을 벗어난 황량한 벌판, 죽은 이가 사둔 자그만 땅.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족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불특정 시간과 불특정 공간인 셈이다

 

 

 

 

 

이 극은 한 가정의 가족 구성원들 간의 주고받는 대사와 그들이 표현하는 몸짓으로 현대인들의 내면에 감춰진 불안과 공허감을 보여준다꿈속인지 기억속인지 아리송한 어둠과 계속해서 두런거리는 가족들. 관 같은 널빤지를 메고 다니는 아버지와 계속해서 아이를 낳아대는 어 머니는 흙먼지 나는 건조함과 비릴 정도로 축축하게 떠오를 뿐이다. 가족이 모두에게, 언제 따뜻하고 아름답게만 떠오르지는 않는다. 수많은 예술 작품에서 그려내고자 했던 그것들을 무심하게 넘겨버린 <토란극>에서는 거대한 공포도 치 떨리는 사건도 없다. 그저 무의식중에도 움직이는 거대한 사회라는 틀 속의 나사 같은 인간과 가족들이 꿈틀거린다, 그것은 무의식의 억압된 단절로 인해 불안이 무대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며 배우의 몸을 하나의 오브제로 만들어버리는 연기는 왜 곡된 불안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시간조차도 자신이 주체적으로 가질 수 없는 인간. 애통해하는 감정마저도 사회적 요구와 관습에 빼앗긴 인간. 비주체적인 삶이 그대로의 내가 되고 스스로 그러한 상황이라는 인식도 못하게 되는 부속적인 인간. 이러한 현대의 개인들은 계속해서 자신을 속여 가며 불안과 공허감에 시달린다.

우리는 극장에서 연극을 통해서 무엇을 볼 것인가? 또 무엇으로 연극을 볼 것인가? 단지 눈으로, 단지 귀로, 그리고 단지....? 우리는 제목과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연극을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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