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태수 '지리다도파도파 설공찬전'

clint 2016. 6. 16. 14:42

 

 

 

예전에 순창(淳昌)에 살던 설충란(薛忠蘭)이는 지극한 가문의 사람이었다. 매우 부유하더니 한 딸이 있어 서방을 맞이하였지만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일찍 죽었다.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은 공찬(公瓚)이고 아이 때 이름은 숙동이였다. 어릴 때부터 글 공부하기를 즐겨 한문과 문장 작법을 매우 즐겨 읽고 글쓰기를 아주 잘하였다. 갑자년(甲子年)에 나이 스물인데도 장가를 들지 않고 있더니 병들어 죽었다. 공찬의 아버지가 불쌍히 여겨 신주(神主)를 만들어 두고 조석으로 매일 울면서 제사지내었다. 병인년(丙寅年)에 삼년상이 마치자 아버지 설충란이 조카딸더러 이르되, “죽은 아들이 장가도 들이지 않아서 죽으니 그 신주에게 (제삿밥) 먹일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묻어야겠다”하고 하루는 (신주를) 멀리 싸서 져다가 그 무덤 곁에 묻고 많이 서러워 이레 동안 밥을 먹지 않고 서러워하였다. 설충란 동생의 이름은 설충수(薛忠壽)였다. 그 아들의 이름은 공침(公琛)이고 아이 때 이름은 업종이었는데 서울에서 업살고 있었다. 그 동생의 이름은 업동이니 순창에서 살았다. 공침이는 젊었을 때부터 글을 힘써 배우되 동생의 반만도 못하고 글쓰기도 그만 못하였다. 정덕(正德) 무신년 7월20일에 (공침이) 충수의 집에 올 때였다. 그 집에 있던 아이가 행금가지 잎을 끌더니 고운 계집이 공중에서 내려와 춤을 추는 것이었다. 그 아이가 매우 놀라 제 집에 겨우 들어가니 이윽고 충수의 집에서 지껄이는 소리가 들렸다. 물어보니, “공침이 뒷간에 갔다가 병을 얻어 땅에 엎드려 있다 한참만에야 정신을 차렸으나 기운이 미쳐버리고 다른 사람과 다르더라”고 하였다.

 

 

 

 
설충수는 그때 마침 시골에 가 있었는데 종이 즉시 이 사실을 아뢰자 충수가 울고 올라와 보니, 공침의 병이 더욱 깊어 한없이 서러워하였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느냐?”하고 공침이더러 물으니, 잠잠하고 누워서 대답하지 않았다. 제 아버지가 슬퍼 더 울고 의심하기를, 요사스런 귀신에게 빌미될까 하여 도로 김석산이를 청하였는데, 석산이는 귀신 쫓는 사람이었다. 김석산이 와서 복숭아 나무채로 가리키고 방법하여 부적하니 그 귀신이 이르기를 “나는 계집이므로 이기지 못하지만 내 오라비 공찬이를 데려오겠다”하고는 갔다. 이윽고 공찬이 오니 그 계집은 없어졌다.
공찬이 와서 제 사촌아우 공침이를 붙들어 그 입을 빌어 이르기를 “아주버님이 백방으로 양재(攘災)하시려 하시지만 오직 아주버님의 아들을 상하게 할 뿐입니다. 나는 늘 하늘가로 다니기 때문에 내 몸이야 상할 줄이 있겠습니까?”하였다. 또 이르기를 “왼새끼를 꼬아 집문 밖으로 두르면 내가 어찌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하거늘, 충수가 그 말을 곧이듣고 그렇게 하자 공찬이 웃고 이르기를, “아주버님(숙부님)이 하도 남의 말을 곧이 들으시므로 이렇게 속여보았더니 과연 내 술수에 빠졌습니다”하고 그로부터는 오며 가며 하기를 무상히 하였다.
공찬의 넋이 오면 공침의 마음과 기운이 빼앗기고, 물러가 집 뒤 살구나무 정자에 가서 앉았더니 그 넋이 밥을 하루 세번씩 먹되 왼손으로 먹거늘 충수가 이르기를, “얘가 전에 왔을 때는 오른손으로 먹더니 어찌 왼손으로 먹는가?”하니, 공찬이 이르기를, “저승에서는 다 왼손으로 먹느니라”라고 대답하였다. 공찬의 넋이 내리면 공침의 마음도 제대로 되어 도로 들어와 앉았더니, 그러므로 많이 서러워 밥을 못 먹고 목을 놓아 우니, 옷이 다 젖었다.

 

 

 

 
제 아버님에게 말하기를, “나는 매일 공찬이에게 보채여 서럽습니다”하더니 그로부터는 공찬의 넋이 제 무덤에 가서 겨우 □들이더니 충수가 아들의 병앓는 것을 서럽게 여겨 다시 김석산에게 사람을 보내서 오도록 하였다. 김석산이 이르기를, “주사(朱砂) 한냥을 사두고 나를 기다리시오. 내가 가면 영혼이 제 무덤 밖에도 나다니지 못할 것이다”하고, 이 말을 많이 하여 그 영혼에게 들려주라고 하였다. 심부름 간 사람이 와서 그 말을 많이 이르자, 공찬의 넋이 듣고 대로하여 이르기를, “이렇듯이 나를 때리시면 아주버님 얼굴을 변화시키겠습니다”하고 공침의 사지를 비틀고 눈을 뜨니 눈자위가 자지러지고 또 혀도 파서 베어내니, 코 위에 오르며 귀 뒤로 나갔더니, 늙은 종이 곁에서 병구환하다가, 깨우니 그 종도 죽었다가 한참만에야 겨우 기는 것이었다. 공침의 아버님이 몹시 두려워 넋을 잃어 다시 공찬이를 향하여 빌기를, “석산이를 놓아보내고 부르지 않으마”하고 많이 빌자, 한참만에야 얼굴이 본래 모습으로 되었다. 하루는 공찬이가 편지를 보내 사촌 동생 설워와 윤자신이 이 둘을 함께 불렀다. 두 사람이 함께 와 보니, 그때는 공찬의 넋이 오지 않은 때였다. 공침이 그 사람들더러 이르기를, “나는 병들어 죽을 것이다”하고 이윽고 고개를 빼서 눈물을 흘리고 베개에 누웠는데, 그 영혼은 아직 오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공침의 말이 아주 간절하였는데, 제 아버지가 이르기를 “영혼이 또 온다”고 하였다. 공침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앉아 머리를 긁고 그 사람을 보고 이르기를 “내 너희와 이별한 지 다섯해니, 멀리 떨어져 있어 매우 슬픈 뜻이 있다”라고 하였다. 저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매우 기특하게 여겨 저승 기별을 물어보았다. 저승에 대한 말을 이르기를 “저승은 바닷가이로되, 매우 멀어서 여기서 거기 가는 것이 40리인데, 우리 다니는 것은 매우 빨라 여기에서 술시(저녁 8시)에 나서서 자시(자정)에 들어가, 축시(새벽 2시)에 성문이 열려 있으면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우리나라 이름은 단월국이라고 한다. 중국과 모든 나라의 죽은 사람이 다 이 땅에 모이니, 하도 많아 수효를 세지 못한다. 우리 임금의 이름은 비사문천왕이다. 육지의 사람이 죽으면 반드시 이승 생활에 대해 묻는데, ‘네 부모, 동생, 족친들을 말해보라’며 쇠채로 치는데, 많이 맞는 것을 서러워하면 책을 상고(詳考)하여, 명이 다하지 않았으면 그냥 두고, 다하였으면 즉시 연좌(蓮座)로 잡아간다. 나도 죽어 정녕히 잡혀가니, 쇠채로 치며 묻기에 맞기가 매우 서러워 먼저 죽은 어머니와 누님을 대니, 또 치려고 하길래, 증조부 설위(薛緯)로부터 편지를 받아다가 주관하는 관원한테 전하니 놓아주었다. 설위도 이승에서 대사성 벼슬을 하였다시피 저승에 가서도 좋은 벼슬을 하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아래의 말을 여기에 하기를, “이승에 어진 재상이면 죽어서도 재상으로 다니고, 이승에서는 비록 여편네 몸이었어도 약간이라도 글을 잘 하면 저승에서 아무 소임이나 맡으면, 잘 지낸다. 이승에서 비록 비명에 죽었어도 임금께 충성하여 간하다가 죽은 사람이면 저승에 가서도 좋은 벼슬을 하고, 비록 여기에서 임금을 하였더라도 주전충 같은 반역자는 다 지옥에 들어가 있었다. 주전충 임금은 당나라 사람이다. 적선을 많이 한 사람이면 이승에서 비록 천하게 다니다가도 (저승에서) 가장 품계 높이 다닌다. 서럽게 살지 않고 여기에서 비록 존귀히 다니다가도 악을 쌓으면 저승에 가도 수고롭고 불쌍하게 다닌다. 이승에서 존귀히 다니고 남의 원한 살만한 일을 하지 않고 악덕을 베풀지 않았으면 저승에 가서도 귀하게 다니고, 이승에서 사납게 다니고 각별히 공덕 쌓은 게 없으면, 저승에 가서도 그 가지(자손?)도 사납게 다니게 된다. 민후가 비록 이승에서 특별한 행실은 없었어도 청렴하다 하여, 거기 가서는 좋은 벼슬을 하고 있었다. 염라왕 있는 궁궐이 장대하고 위엄이 매우 성하니, 비록 중국 임금이라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염라왕이 시키면 모든 나라 임금과 어진 사람이 나오는데, 앉히고 예악을 썼다.
또 거기에 앉은 사람들을 보니 설위도 허리□□안고 민후는 아래에서 두어 자 쯤에 앉아 있었다.
하루는 성화 황제의 신하 애박이를 염라왕께 보내 “아무개는 나의 가장 어여쁘게 여기는 사람이니 한 해만 잡아오지 마소서”하고 청하자, 염라왕이 이르기를, “이는 천자의 말씀이라 거스리지 못하고 부득이 들을 것이지만, 한해는 너무 많으니 한 달만 주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애박이가 다시 “한 해만 주소서”하고 아뢰자, 염라왕이 대로하여 이르기를, “황제가 비록 천자라고 하지만,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하는 것은 다 내 권한에 다 속하였는데 어찌 거듭 빌어 내게 청할 수가 있단 말인가?”하고 아니 듣는 것이었다. 성화 황제가 들으시고는 즉시 위의를 갖추시고 친히 가신대, 염라왕이 자네는 북벽에 주홍사 금교의 놓고 앉고, 황제는 교상에 앉히고, 황제가 청하던 사람을 즉시 잡아오라 하여 이르기를, “이 사람이 죄가 중하고 말을 내니 그 손을 빨리 삶으라”하였다.
 

 

1511년(중종 11) 채수 ( 蔡壽 )가 지은 고전소설. ≪ 중종실록 ≫ 에서는 ‘ 설공찬전 ( 薛公瓚傳 ) ’ , 어숙권 ( 魚叔權 )의 ≪ 패관잡기 ≫ 에서는 ‘ 설공찬환혼전(薛公瓚還魂傳) ’ 으로 표기하였고, 국문본에서는 ‘ 설공찬이 ’ 로 표기하고 있다.
한문 원본은 1511년 9월 그 내용이 불교의 윤회화복설을 담고 있어 백성을 미혹한다 하여 왕명으로 모조리 불태워진 이래 전하지 않으며, 그 국문필사본이 이문건(李文楗)의 ≪ 묵재일기 默齋日記 ≫ 제3책의 이면에 〈 왕시전 〉 · 〈 왕시봉전 〉 · 〈 비군전 〉 · 〈 주생전 〉 국문본 등 다른 고전소설과 함께 은밀히 적혀 있다가 1997년 극적으로 발견되었다. 국문본도 후반부가 낙질된 채 13쪽까지만 남아 있다.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순창에 살던 설충란에게는 남매가 있었는데, 딸은 혼인하자마자 바로 죽고, 아들 공찬도 장가들기 전에 병들어 죽는다. 설공찬 누나의 혼령은 설충란의 동생인 설충수의 아들 공침에게 들어가 병들게 만든다. 설충수가 방술사 김석산을 부르자, 혼령은 공찬이를 데려오겠다며 물러간다. 곧 설공찬의 혼령이 사촌동생 공침에게 들어가 왕래하기 시작한다.

설충수가 다시 김석산을 부르자 공찬은 공침을 극도로 괴롭게 하는데, 설충수가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빌자 공침의 모습을 회복시켜 준다. 공찬은 사촌동생 설워와 윤자신을 불러오게 하는데, 이들이 저승 소식을 묻자 다음과 같이 전해 준다. 저승의 위치는 바닷가이고 이름은 단월국, 임금의 이름은 비사문천왕이다. 저승에서는 심판할 때 책을 살펴 하는데, 공찬은 저승에 먼저 와 있던 증조부 설위의 덕으로 풀려났다. 이승에서 선하게 산 사람은 저승에서도 잘 지내나, 악한 사람은 고생하거나 지옥으로 떨어진다. 이승에서 왕이었더라도 반역해서 집권하였으면 지옥에 떨어지며, 간언하다 죽은 충신은 저승에서 높은 벼슬을 하고, 여성도 글만 할 줄 알면 관직을 맡을 수 있다. 하루는 성화황제가 사람을 시켜 자기가 총애하는 신하의 저승행을 1년만 연기해 달라고 염라왕에게 요청하는데, 염라왕은 고유 권한의 침해라고 화를 내며 허락하지 않는다. 당황한 성화황제가 친히 염라국을 방문하자, 염라왕은 그 신하를 잡아오게 해 손을 삶으라고 한다.

이 작품에서는 귀신 또는 저승을 주요 소재로 활용하고 있다. 채수는 어렸을 때 귀신이 출현하는 현장을 목격한 경험이 있는데 이것이 작품 창작에 강력한 동인으로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남염부주지같은 여타 유사계열의 전기(傳奇)소설이나 설화에서와는 달리 주인공이 살아나지도, 그 일을 꿈속의 일로 돌리지도 않으며, 다만 주인공의 영혼이 잠시 지상에 나와 자신의 경험을 진술한다는 점에서 매우 개성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순창이라는 실제 지명을 배경공간으로 삼아 이곳을 관향으로 하는 설씨 집안의 이야기인 것처럼 위장하고, 등장인물도 실존 인물과 허구적 인물을 교묘히 배합해 설정하는 한편,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친숙한 원귀 관념 및 무속에서의 공수현상 등을 활용함으로써 대중의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과 채수의 행적을 고려하면 이 작품이 어떠한 주제를 지향하고 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강직한 언관의 길을 걷던 채수는 중종반정 직후 관직을 버리고 처가인 함창(지금의 상주)에 은거하였는데, 여기에서 쾌재정을 짓고 소일하는 동안(1508년에서 1511년 사이) 평소 발언하고 싶었던 바를 이 소설을 빌어 피력한 것으로 보인다.

작품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주인공 공찬의 혼령이 전하는 저승 소식인데, 이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반역으로 정권을 잡은 사람은 지옥에 떨어진다고 한 대목이다. 이는 연산군을 축출하고 집권한 중종 정권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폭군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보필하여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하는 것이 신하의 바른 도리라는 평소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다. 아울러 여성이라도 글만 할 줄 알면 얼마든지 관직을 받아 잘 지내더라는 대목도 주목되는데, 이는 여성을 차별하는 조선의 사회체제를 꼬집은 것이라 하겠다. 한마디로 말해 이 작품은 유교 이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혼과 사후세계의 문제를 끌어와 당대의 정치와 사회 및 유교 이념의 한계를 비판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이 지니는 국문학사적 가치는 지대하다. 이 작품은 〈 금오신화 〉 를 이어 두 번째로 나온 소설로서, 〈 금오신화) 〉 (1465 ∼ 1470년)와 ≪ 기재기이 企齋記異 ≫ (1553년) 사이의 공백을 메꾸어 주는 작품이다. 특히 그 국문본은 한글로 표기된 최초의 소설(최초의 국문번역소설)로서, 이후 본격적인 국문소설(창작국문소설)이 출현하게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된다. 그 동안 학계에서는 최초의 국문소설로 알려진 〈 홍길동전 〉 이 장편인 데다 완벽한 구조를 지니고 있어, 필시 그 이전에 어떤 형태로든 국문표기 소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왔다. 그러나 그 중간 작품으로 제시된 〈 안락국태자전 〉 · 〈 왕랑반혼전 〉 등이 모두 소설이 아닌 불경의 번역이라 안타까워했는데, 〈 설공찬전 〉 의 국문본이 발견됨으로써 이 가설이 물증으로 증명되었다. 이 작품은 조선 최초의 금서로 규정되어 탄압받았을 만큼, 각지 각층의 독자에게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인기를 끌어 조정에서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 나라 소설로는 유일하게 조선왕조실록에도 올랐으니, 소설의 대중화를 이룬 첫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국문으로 번역되어 표기된 것은 이러한 인기와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이며, 이 작품의 국문본은 우리 소설 연구에서 번역체 국문소설(광의의 국문소설)의 가치를 적극 평가할 필요성을 강하게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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