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진흥원 추천 창작희곡으로 선정된 바 있는 작품이 『덫에 걸린 집』이다.
희곡작가 정복근씨의 작품으로 한 중산층 가정에 난데없이 들이닥친 폭력으로 인한 문제에 무기력하게 대처하는 가족 구성원들의 비굴과 회피, 방관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현대의 에고이즘과 무관심을 질타하는 문제작이다.
연극적 인연으로는 잘 맺어지지 않을 듯한 작가 정복근과 연출가 임영웅이 이 작품을 축으로 서로의 세계에 진폭을 더한다. 가정문제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회의식이라고 말하면 거창해지지만 작가는 밖으로 목소리를 높이려 하고 연출가는 안으로 소리를 다져들이려 하는 긴장이 <덫에 걸린 집>의 연극적 재미다. 이 작품에서는 역사의 세 가지 정점에서 성폭행과 도덕이라는 사회적 규범이 어떻게 인간을 타락시키는가를 보여준다. 아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날카롭게 질문한다. 작가는 질문하려 들고 연출은 그저 보여주려 한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우리의 비겁과 교활이 보여지는 것 자체도 괴롭고 부끄러우며 질문 받는다는 사실 자체는 고문처럼 아프다. 우리가 역사 속에 묻어 버렸던 과거의 망상-임진왜란 때 왜놈들의 손에 붙들려 능욕당했던 여인들의 수모와 차단됐던 그녀들의 가정 복귀-사이에 독묻은 칼날을 번뜩인 성모럴이라는 가치체계의 허구성은 일제시대의 이른바 ‘정신대’라는 이름의 희생양이 된 여인의 경우에도 해당되고 급기야 현대사회의 철면피한 가정 파괴범들의 성폭력이라는 구조적 모순 속에도 엄존한다. 당연히 피해를 본 여성들은 역사에 대해서, 사회구조에 대해서 항의해야 하고 그 항의가 부끄럽고 고통스런 기성의 역사와 사회는 여전히 외면하며 없었던 사실로 덮어두려 한다. 없었던 사실로 얼버무리려는 음모가 무대 정면에서 진행될 때마다 극중에서는 한의 가락인 구음(口音)이 역사와 사회의 신음처럼 울려 퍼지고 사막(紗幕) 뒤로 제물인 여인이 일어나 간증을 한다. 그녀가 ‘어머니’라는 사실로 해서 우리 시대의 피해 당사자인 ‘아내’와 ‘남편’ 및 ‘시누이’ 사이가 너무 인위적으로 꾸며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차피 작가에게 있어서 성폭력의 희생자들이 여인뿐이라는 사실이 날카롭게 고발되어야 한다면 그런 희생자의 고통과 소외와 함께 근거 없는 도덕적 규범으로 지탱되어 온 결혼제도라는 남녀의 관계나 사회구조의 모순을 보여주어야 하는 연출가의 의도는 기성 가치관의 도덕률에 얽매인 인간군상을 그저 보여줄 수밖에 없다. 극단 산울림의 앙상블은 믿을 만하고, 작가세계는 치밀하고 연출의 흐름은 절제되어 있다.
회피와 방관의 그늘에서 - 작가 정복근
어떤 것이든 폭력은 항상 사람을 상하게 한다. 분수를 잊고 도를 넘어선 과격한 행동은 물론이지만, 예외를 잊고 삼가지 못하면 무심한 말 한마디 가벼이 던지는 시선 하나도 누군가 마음을 다치게 할 수 있고 잘못 해석되고 학퇴로 이용되면 법이나 제도 사회적 인습 역시 사람의 평생을 겪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해방 후 낡은 관습과 함께 도덕윤리의식마저 대강대강 털어두고 허둥지둥 정신없이 살아오는 동안 우리가 알게 모르게 서로의 가슴에 남겼던 온갖 폭력의 흔적들이 이제 무성한 잡풀처럼 자라나서 또 다른 폭력을 키워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중에서도 특히 여자의 성을 상대로 하는 범죄가 무슨 유행처럼 신문지면을 장식하고 한때 정치적 암흑의 시기에는 또 여자의 수치심을 자극하여 목적을 이루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무서운 논리가 공공연히 거론되기도 했던 것을 생각하면 우리 주위에 항상 도사리고 있는 어떤 끈질긴 폭력의 의지를 향하여 한번 마주서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사회에나 누구도 감히 손대지 못할 도덕적 금기는 있고 그 금기를 기둥 삼아서 내일을 바라보고 오늘 찌푸리는 건전함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우리 사회에 비교적 많이 강하게 남아있던 공기 중의 하나가 바로 여자의 성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했었는데 이즈음은 이 금기마저 무너져서 "가정파괴범" 굳이 이상한 공식명칭까지 생기고 말았다. 굳이 남의 나라의 역사적 사실까지 들춰내지 않더라도 사회의 말기증상으로는 흔히 부음와 나태속에 꽃피는 성도덕의 문란을 첫손가락으로 꼽게 된다. 여성을 모성의 자리에서 끌어내려 단순히 즐거움의 대상으로 바라보려는 의도의 부도덕이 얼마나 무서운 부패력으로 세상을 타락시켜 왔는지 한번쯤 새삼스럽게 생각해보아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문화의 차이를 무시하고 남의 방식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려 애써온 결과의 부작용이 이제 우리주위에서 너무 많은 균열을 드러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한 일을 거론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방관의 그늘에 묻어둔 수많은 사람들의 묵살된 고통에도 귀 기울려 봐야 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안심하고 태평하게 믿기에는 너무 얇고 가벼운 우리 일상의 안락함을 위하여 수지와 보복이 두려운 폭력에 짓밟힌 누군가를 어둠속에 묻어두는 일을 계속한다면 역시 또다른 사회적 집단폭행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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