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年 第17回 韓國戱曲文學賞 受賞作
작가 의도
<탕평 전야, 蕩平前夜>는 원제(原題)가<사도세자(思悼世子)>인데 1986년 한국희곡작가협회 연간 선집 청소년극집 《동맹, 動脈》에 게재되고 2001년 2월 20일 상재된 제2희곡집 《까마귀와 부엉이》에 재수록된 작품으로 1998년 제17회 한국희곡문학상 수상작이다. 3막 5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조선조 영조조인 1762년 여름에 있었던 부왕인 영조가 어쩔 수 없이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굶겨 죽인 비극을 다룬 작품이다. 조선조 21대 영조왕의 둘째아들인 장헌세자(莊獻世子)는 이복형인 효령세자(孝寧世子)가 요절하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1749년 영조 25년 왕명으로 그는 15세에 대리기무(代理機務)를 보게 되었고 1762년 김한구와 그의 일파인 홍계희, 윤급 등은 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이 영의정에 오르는 등 크게 세력을 떨치게 되자 홍봉한 일파를 몰아내고 세자를 폐위시키고자 윤급의 종 나경언을 시켜 세자의 비행 열 가지를 들어 고변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영조는 크게 화가 나 나경언을 참형하고 세자에게 마침내 자결을 강요하였지만 듣지 않자 뒤주 속에 가둬 죽게 하였다. 영조는 세자가 죽자 뉘우쳐 사도(思悼)란 시호를 내리게 되고 1777년(정조 1년) 그의 아들 정조가 장헌으로 상시(上諡)하였으나 1899년(광무 3년)에 다시 장조(莊祖)로 추존하였다. 이러한 실록을 바탕으로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과 아버지 영조의 고육지책을 심층 분석, 당쟁과 왕권의 갈등을 추적해 보았다. 이 극을 구상하면서 서사극형식이나 기록극형식으로 끌고 가려 하였으나 역사극의 본래의 장점을 살려 리얼리즘연극으로 극화했다. 등장인물 남 10·여 8 , 기타 남녀 다수(총 18 명 외 다수) 영조임금(68세) -남 사도세자(28세) -남 세자빈(28세) - 여 세 손(11세) - 남 화완옹주(25세 가량) 영조의 9녀 - 여 선희궁(25세 가량) 영조의 후궁.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 - 여 홍봉한(50세) 세자빈 홍씨의 사친, 시임 영의정 및 좌의정 - 남 홍인한(40세) 홍봉한의 아우, 시임 이조판서 - 남 신 만(60세 가량) 시임 영의정 - 남 류내관(35세 가량) 세자궁의 장번 내시 - 남 박내관(25세 가량) 세자궁의 입직 내시 - 남 하상궁(35세 가량) 세자궁의 제조 상궁 - 여 궁녀 칠복(25세 가량) 세자궁의 상궁 - 여 궁녀 복례(20세 가량) 세자궁의 상궁 - 여 노복 선돌(30세 가량) 홍봉한의 집 하인 - 남 삼군대장 및 삼군 시위 군사들 다수 - 남 조정 중신들(세자쪽 시파와 영조쪽 벽파) 다수 - 남 대전 내시들 다수 - 남 궁녀(무수리들), 대전 상궁들 다수 - 여 시립궁녀(일산 담당) 두 사람 - 여 작품연보 1986년 -2003년 근로자연극제 대상
줄거리
3막 5장중 1막은 2장으로 되어 있는데 1장은 창경궁 후원 환취정이 펼쳐진다. 한 여름의 천둥과 번개가 일면서 비극적 조짐을 예고한다. 세자(동궁)가 천둥소리에 놀라 쓰러진다. 세자가 쓰러지자 류내관은 동궁이나 된 듯 큰 소리로 하상궁을 잡인으로 몰아세운다. 하상궁은 궁녀들을 이끌고 사라진다. 이 때 박내관은 세자가 깨어났음을 전한다. 이윽고 세자가 나타나자 류내관은 부왕 영조의 입시하라는 분부를 전갈하자 동궁은 류내관의 전갈을 무시한 채 불씨를 만들라는 명을 내린다. 불씨가 마련되자 동궁은 자기의 용포를 갈기갈기 찢어 버린다. 그리고 어려서 천둥병에 시달려 대우받지 못하고 자란 것과 얼굴조차 보기 싫어하는 영조에게 저항이라도 하듯 용포를 불태우고 류내관의 옷도 벗어 태우게 한다. 이 때 대전 상궁이 나타나 입궐하라고 전갈하나 동궁은 상궁의 옷마저 벗게 하여 태운다. 화완옹주가 나타나 이 광경을 보고 당황하자 동궁은 화완옹주를 염탐꾼으로 몰아세우며 태우는 일에 열중한다. 제2장이 되면 류내관과 궁녀 칠복의 연애 중이다. 이 광경을 목격한 세자는 궁녀 칠복을 처치하고 류내관은 내시라는 이유로 살려 두고 칠복의 시체를 치우도록 한다. 이 때 홍봉한과 세자빈이 들어와 세자에게 칼쓰기와 무술연습 등을 하지 말라고 이른다. 그 소리에 세자는 더욱 분개한다. 그러자 그들은 세자에게 세자가 평양 갔을 때 동궁 행세를 한 류내관을 죽이라고 하나 세자는 안 된다고 거부한다. 세자는 오히려 그걸 시킨 게 세자빈과 영상이었던 홍봉한이라 하여 칼로 해치려고 한다. 이 때 그의 생모 선희궁 영빈과 화완옹주가 나타나 만류하자 세자는 칼을 거두고 선희궁에게 안기며 운다. 작가는 뒤주에 넣기 위해 많은 픽션을 동원하여 정당화, 구체화시키고 있음을 1막에선 볼 수 있다. 2막은 1762년 영조 38년 음력 5월 13일, 세자는 부왕 영조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굶어 죽는 참극이 벌어진다. 휘령전 정성 왕후 재실 앞이다. 영의정 신만이 대전 내시에게 중신·입시 하였음을 주상께 전갈토록 명하자 이에 영조 나타나 삼군 대장 구선행을 찾자 구선행은 창경궁 휘령전을 군사 3백으로 하여 철통같이 경계토록 하였음을 알린다. 영조는 영의정 신만 정승만 남게 하고 모두 물러나게 한다. 화완옹주도 남는다. 이 때 세자의 생모 영빈이 영조를 만나러 온다. 영조는 영빈을 들게 하지만 화완옹주가 방해한다. 끝내 영조가 영빈을 들게 하여 만나자 생모는 세자가 왕위를 노렸다는 사실을 발설, 오히려 세자를 죽여야 된다고 아뢴다. 기가 막힌 영조는 선희궁을 나가게 하고 세자를 대령토록 별감들에게 명한다. 별감들은 덕성합쪽 세자, 세자빈, 세손이 있는 곳으로 가서 세자를 호종해 온다. 세자가 영조 앞에서 엎디어 사죄하지만 영조 앞에서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 이 때 세손이 뛰어들어 영조에게 세자를 살려 달라고 애원하나 영조는 세손을 쫓아내고 덕성합 쪽 문을 닫아걸고 통행을 막아 버린다. 세자는 어쩔 수 없이 자진하려고 칼을 빼어 들지만 삶의 애착 때문에 감행치 못한다. 홍봉한을 비롯한 세자궁 춘방사부 여럿이 들어와 영조에게 세자의 구명을 간청하나 영조는 거부하고 오히려 군사들에게 이들을 내쫓도록 한다. 영조가 세자에게 다시 즉각 자진하라 다그치자 세자는 칼을 뽑아 호흡을 가누나 역시 결행치 못한다. 이 때 조정 중신들 나와 읍한다. 왼쪽에 벽파, 오른쪽에 시파로 갈라서서 자진하라는 명을 거두기를 간청한다. 그리고 시파와 벽파가 대립하듯 이런 역모를 꾸민 자를 처단하라고 상주한다. 시파들은 비위를 숨기려고 하고, 벽파는 세자의 비위를 모조리 일러바치던 이들이 이제 세자의 용서를 빌고 있으니 영조는 스스로 폭군이 된 듯 버럭 화가 치밀어 이들을 모조리 내쫓도록 군사에게 명령하자 조정중신들은 모두 군사에게 끌려나간다. 영조는 마음을 가다듬어 세자가 즐겨 들어가 있던 토굴 속에서 뒤주를 가져오도록 별감들에게 명한다. 그리고 세자에게 칼로 자진하겠는가 뒤주 속에 들어가 아사하겠는가를 택하도록 명한다. 이 때 화완옹주가 뒤주를 권하자 영조는 그녀를 오라비의 허물을 벽파 놈들과 같이 낱낱이 고해 바쳤다고 군사들에게 끌어내도록 명령한다. 뒤주가 들어오자 영조는 세자에게 뒤주에 들라 명한다. 3막 1장이 되면 장면은 홍봉한의 집으로 바뀐다. 세자빈의 교전비 복례가 무수리 복색을 하고 뛰어들어 아직 세자가 뒤주 속에 살아 있음을 알려준다. 세자빈과 홍봉한은 세자구제책을 강구하나 어떤 대책이 서질 않는다. 생모 영빈도 식음을 전폐한 상태라는 것 외에 대책을 못세우고 있는 것이다. 벽파들이 계속 물고 늘어져 영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하상궁이 헐레벌떡 뛰어들어 세손이 세자의 용체에 이상이 생기면 자기도 죽는다고 눈물흘린다는 것이다. 이 이야길 듣고 세자빈이 급히 나가면 이조판서 홍인한이 나타나지만 홍봉한은 왕의 결단을 당연지사로 받아들이는 홍인한의 태도에서도 방책을 찾지 못한다. 3막 2장이 되면 오동나무 고목아래 소반에 정안수를 받혀놓고 세자빈이 천지신명께 세자의 무사를 빈다. 이 때 하상궁 세손을 데리고 들어온다. 뒤주에 8일이나 갇혀 있는데 아직 살아 있는 것은 누가 물을 넣어 준 것으로 여기게 된다. 세손은 세자빈에게 영조에게 세자를 살려달라고 할테니 데려다 달라고 애원한다. 홍봉한이 좌의정 벼슬을 제수받고 막 들어서자 세손은 홍봉한에게 뒤주를 보고 왔느냐고 묻고 영조에게 데려다 달라 간청한다. 세자빈과 홍봉한의 반응이 없자 세손은 내일 아침 스스로 찾아가기로 하고 퇴장한다. 복례가 울면서 뛰어들며 세자의 최후를 알린다. 이어 대전별감이 어명을 받고 와서<생각할 사><슬퍼할 도>《사도세자》라는 시호가 내렷음을 알린다. 그리고 세자빈에게도 혜빈이라는 작호가 내렸다고 전한다. 그리고 장례도 옛법에 따라 엄숙하게 치루라는 어명이 내렸다고 전하고 아울러 내일 날이 밝는대로 모두 입궐하라는 영조의 당부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 소리를 들은 세자빈은 허우적 허우적 울먹이며 세자를 부르는 가운데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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