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터 한트케 (Peter Handke, 19420-) 는 오스트리아에서 출생하여 1966년 소설『말벌들』로써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여러 편의 희곡 외에도 소설, 시, 산문집들을 발표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독일어권의 작가이다. 우리 관객들에게 그의 이름이 친숙하게 된 것은『관객모독』이 공연되고 난 후부터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 작품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연극 관은 기존의 전통적인 서양연극의 관습에 정면으로 연극에서 우리는 그의 연극 관 및 언어관을 잘 알 수 있다. 비트 켄슈타인의 언어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은 한트케는 언어라는 것이 현실을 두고 동어 반복적인 허구를 구사함으로써 독자(관객)를 현혹시키는 물테라는 생각에 동의한다. 즉, 인간이 언어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을 억압, 조종한다고 생각하게 되며, 언어가 의미를 전달하는 팻말에 불과한 매개체만이 아니라 자율적 기능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런 언어의 숨겨진 살아있는 힘을 파악하고 드러내는 것이 문학의 과제라고 생각하고 언어로 인한 인간의 자동화를 저지하려 한다, 또한 우리 독자(관객) 는 언어를 사실 이해의 도구로 삼되 언어를 조금씩 파괴. 해체함으로써 인식의 순간에 진정한 실상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관객모독』에서 그는 언어를 의미전달, 현실표현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고 동어반복의 문체를 통해서 비논리적이고 무의미한 장식으로서, 청각적 미학으로서 표현하고 있다. 이로써 그는 언어의 체계에 도전한 것이다. 말의 형태로 세상을 나타내어보려 하는〈언어 극〉이라는 형식으로 한트케가 발표한 작품들은 60년대 중반부터 나온『관객모독』, 『예언』,『자기고발』등이다, 그 이후에 그는 언어가 완전히 부재한 침묵 극을 이미 1969년에 발표한 바 있다.『미성년은 성인이 되고자 한다.』라는 제목의 이 연극에서는 두 인물이 반가 면을 쓰고 판토마임을 통해서 일상의 억압적인 상황, 주종관계를 보여준다,

이런 침묵의 모티브를 약 20년만에 다시 사용한 극이 '우리가 서로를 알지 못했던 시간'이다 1992년 5월 비엔나 축제주간의 행사로 초연된 이 작품에 대해서 한트게 자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작품으로 내가 보고 싶었던 극의 형태는 완성했다. 만약 내가 또 다른 하나의 극작품을 쓴다면 그것은 잘못된 작품일 것이다."

60년대에 〈언어 극〉의 형태로 희곡 창작활동을 하던 한트케는 74년 이후 약 18년 동안 희곡은 발표하지 않은 채 다량의 소설들만을 발간해낸다. 드라마를 위한 새로운 공간을 탐색하기 위한 공백기였다고 이 기간을 해명하는 그에게 있어서 이 침묵 극은 하나의 결정체와 같다는 사실을 이 언급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모든 나라, 모든 장소, 모든 시대에서 온 모든 인물들이 다 자신들만의 얘기를 지닌 채 동등한 자격으로 등장하면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이 연극에는 그의 대부분의 다른 연극들에서와 같이 일관된 논리적인 줄거리는 없고 수많은 일화와 스케치들만이 존재한다. 끝없는 윤무로 채워질 이 작품의 무대 위에서 세계가 말없는 환상처럼 표현되고 관객들은 자신의 실존에 관한 연극적인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나는 의미심장하지도 않고 교훈적이지도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는 작가 자신의 언급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의 모든 동작과 상황, 오브제마다 의미를 부여하고 찾아내려는 것은 무의미한 시도라고 하겠다, 또 그는 다른 인터뷰에서 이 작품이 깊이 있는 작품도 아니고 단조로운 작품도 아니라는 점이 내 마음에 든다. 그저 이 작품은 존재할 뿐이다, 작품 뒤에 존재하는 것은 없다. !" 라고 말함으로써 이 작품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동시에 이 작품의 모든 요소에 의미를 과도하게 부여하여 사회성과 연결시키려는 시도를 저지하고 있는 셈이다. 한트케는 물론 사회참여 연극의 대표적 인물인 브레히트의 '소외효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브레히트가 현실의 모순 점을 드러내는 사고모델을 제시한 점을 한트케도 높이 평가하기는 하지만, 그런 입장을 무대예술에서 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조작된 것이며 인위적이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수단인 '소외효과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한트케는 예술이 현실참여 의식의 고취를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미학 상 용납하지 못하고 거부한다. "연극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필요하지는 않다. 연극은 관객 안에 내재해 있는 발견되지 않은 내적 유희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한 공간이다. " 라는 언급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주관주의에 입각한 문학이론 내지는 연극 관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가 침묵 극 『우리가 서로를 알지 못했던 시간』에서 언어를 완전히 배제함으로써 드러낸 자신의 언어관이나, 관객의 수용 자세를 포함한 연극 관은 작품 서두에 쓰여 진 다음과 같은 경구에 집약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네가 본 것을 누설하지 말고 본 그대로 머무르게 하라"

이 작품을 만들면서……
-연출 김 아라-
93년 새해에 일기를 쓰면서 소박하게도 나는 극장에서 찾아야 할 것은 기쁨이다, 라고 생각했다. 거의 삶 전체라고 해도 무방할 이 빌어먹을 연극이라는 것에서 기쁨을 환불받고 싶었다. 지금까지 살아 온 것처럼 산다는 이도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연극을 한다는 것도 무료했다. 이 세상사와 무관하게 단지 연극적인 것을 만나고 싶었다. 연극적 유희를 즐기고 싶었다. 응급실 신세를 몇 번지고 나니 생각이 달라진 것이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허무 앞에서 언제까지 말장난을 하고 있을 것인가, 코앞에 둔 사회의 현상에 대한 대응방식? 천만에--- 이 세상은 한 사람의 예술가가 응분으로 분해, 재조립한다 해도 별 수 없는 흐름이 있다. 쓰잘 데 없는 몽상이나 천부적인 게으름 혹은 유희 지향주의 적 사고의 소산이면 어떠랴, 축제의 원형을 찾아가자, 하늘/ 땅의 중심처럼 행세한 선조들의 놀이정신을 찾아가자, 프로시니엄이라는 연극들이 갖는 무게와 서술이 내 감각에 계속 안정제를 투여하고 있는 꼴이다. 나는 새해부터 집안에 틀어 박혀서 내 자신에 대고 계속 투정만 부렸다. 연극의 창의적 욕구를 가진 한 사람이 꿈꾸는 하나의 세계이다. 나름대로 펼치는 현실로부터의 유리, 혹은 접근 방식인 것이다. 그 어느 쪽이라 해서 연극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연극은 연극적 인간의 집단이 함께 꿈꾸는 원초적인 세계이다. 식욕, 성욕, 소유욕, 사랑, 죽음, 두려움, 질투--- 이런 것들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세계, 매우 인간적인 세계에 대한 꿈인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 연극이란 그렇다. 이런 저런 생각, 정리와 정리를 거쳐서 얻은 것이 페터 한트케와의 만남이다. 이 연극은 너무나 밝아서 모든 현실이 발가벗겨지는 듯 투명한 오후, 공원을 무대로 한다. 원본에서는 광장이지만 광장문화가 없는 우리에게는 공원이 어울릴 것 같았다. 모든 사람의 공통인 이상인 "휴식"이 있는 곳 혹은 머물렀다 가는 그곳, 공원이다. 이 연극은 그 곳을 지나치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오랫동안 작가의 눈으로 공원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면서 작가 이상으로 깊숙이, 사실보다 더욱더 사실적이라서 차라리 환상 같은 Reality를 보게 되었다. 사진보다 더 선명한, 내부의 세포조직까지 들여다보이는 그 환상을 나는 이 우주의 떠다니는 섬과 같은 존재인 내가 시적 몽환 속을 헤매면서도 놓치지 않으려는 자의식의 섬광 같은 것이라고 단정했다. 이 연극은 대사가 없다, 말없이 지나가는 사람들 (배우)을 보면서 관객이 스스로 심상에서 이루어지는 언어를 환기한다? 참 어려운 숙제였다, 2년 전부터 장정일과 계획하는 "검은 오이디푸스"라는 작업의 장치를 냅다, 끌어왔다. 연극 공간을 그날, 그 시간의 현장과 함께 이룬 발상, 즉, 관객도 배우 혹은 세트처럼 공연을 이루는 종합적 산물 중 하나로 이해한다는, 그래서 극장을 모두 함께 참여하고 즐기는 유희의 공간으로 대체시킨다는 발상 말이다. 그래서 이 연극은 관객이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된다. 공간은 전체가 공원의 일부로 꾸며져 있고 관객 사이에서 연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연극은 "숨은 물"에서 이미 시도한 바 있는 단순 반복의 구성이다. 그러나 "숨은 물"이 커다랗게 세 장면의 단순반복의 구성이었다면 이 작품은 장면 안에서도 끊임없이 연쇄적으로 단순 반복이 일어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아주 오랫동안 주시하면 일종의 차시현상 같은 것을 일으키는데 이 연극은 일상적인 인간들을 바라봄으로써 일으키는 착시현상 같은 것을 반복과 회전이라는 장치로써 끊임없이 보여준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사실보다 더 사실적이라서 환상이 되어지는 Reality, 일상의 내재율까지 투시되는 관찰자의 눈, 그 망막의 세계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 연극은 인간이 존재 한다, 라는 사실 외에는 의미가 없다, 끊임없는 반복과 회전을 통해서 막연히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행이다. 우리는 걷는다, 걸어서 간다.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걷는다, 걸어서 간다--- 이런류의 느낌. 내가 일련의 작품들 속에서 다가갔던 윤회라든가 원형의 미학 속에서 다시 페터 한트케를 만난 것이다. 내 마음속의 그리고 관객의 마음속에 자리한 유희공간이<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에서 확인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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