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백살에 가까운 노인이 있다. 수전노이다.
늙은하녀가 시중을 든다.
대화를 통해 늙은하녀는 이 노인의 부인이었다.
지금은 포기하고 하녀로 일한다. 무보수로.
늙은하녀가 나가자 노인은 아들을 부른다.
잠시 후, 침대밑에서 칼을 든 아들이 나온다.
아마 노인을 죽일 계획이었는데, 노인은 아들의 성격상
행동을 못하리라는 걸 아는 듯하다.
외아들도 어언 70대 중반이 됐다.
그토록 재산을 물려달라고 했건만 노인은 요지부동이다.
노인의 일과는 매일 수많은 방문자를 만나 그들의 요구를 듣는 것.
오늘도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단다.
천문학자가 들어온다. 그는 평생 연구한 기록을 정리해
책자를 만들고 싶다고 출판비를 지원해달라고 한다.
그러나 노인은 일언지하에 내쫓고 원고도 불태워버린다.
다음은 자선병원 원장. 새로 취임했단다. 4대 전부터 노인이 운명하면
엄청난 재산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전임병원장이 모두 죽어도
이 노인은 생생하다. 다만 몇푼이라도 지금 요청했다가 쫓겨난다.
문 밖에서 이 사후 기부사실을 엿들은 아들이 노인에게 항의한다.
재산 전부를 자신에게 상속해준다고 약속하고 왜 기부하냐고.
그러나 엄마인 늙은하녀가 들어와 아들을 달랜다.
"얘야, 죽은다음 기부한다는 건 아무 효력이 없는 거란다."
다음 방문자 중년 부인과 소녀가 들어온다.
노인은 어디서 본 듯하다고 묻자, 중년 부인이 이 소녀 나이 때 뵀단다.
그때 엄마의 손을 잡고 왔고 애첩이라도 시키려고...
그러나 실패한 후, 30년간 인고의 세월, 딸을 낳아 기르며 예쁜 몸매며
노래, 춤 등을 모두 가르쳤단다. 그러나 소녀는 노인이 불편한듯
제 기량을 보여주지 못한다.
늙은하녀가 아침을 준비한다.
"많은 손님을 맞이하려면 잘 먹어야죠"
노인... 수전노, 변함없는. 그리고 끝난다.
“언제 봐도 변함없군, 내 꼬락서니는! 누렇게 찌든 얼굴, 썩은 생선 눈깔처럼 흐리멍덩한 두 눈, 흐물흐물 늘어진 엿가락 같은 코, 움푹 패인 뺨, 텅 빈 구멍이나 다름없는 입... 그래도 아직 시체는 아니지!” 수전노 노인 아침에 일어나면 내뱉는 말이다.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불변의 이치를 담고 있는 권력과 이데올로기, 우주의 흐름으로 대변되는 수전노 아버지. 이에 매달리고 도전하는 인간들의 몸부림을 빗대어 표현되는 우화적인 이야기이다. 무수히 반복되는 불변의 우주 속에 인간은 한낱 공기 속에 떠도는 먼지에 불과하지만 그 보이지 않는 티끌 속에 담겨진 간절한 인생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이강백의 우화 같은 이 작품은 재미있는 설정에 오가는 대사가 재밌다. 그러면서 세상사를 비꼬는 수전노 노인에게 애정이 가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정식 공연이 안 되고 나중에 부분 개작하여 "사과가 사람을 먹는다"란 제목으로 2018년 극발전소301의 짧은연극전에서 공연됨.
작가의 글 - 이강백
1998년 ‘현대문학’ 9월에 발표한 단막극 「수전노, 변함없는」과 맥락이 같음을 알 것이다.
여섯 번째 희곡집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수전노 시리즈의 단막극 몇 편을 더 써서 함께 공연할 생각이다.
내가 왜 수전노 소재에 집착하는지, 솔직히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1984년 공연했던 「봄날」을 쓰면서 남겨둔 작품메모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 작품에 보면 인색한 인물인 아버지에게 여러 가지 생각들이 적혀있는데, 집착의 이유가 오직 그 메모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아마 나 자신 속에 그런 인색한 인물이 살아있지 않다면 어찌 작품으로 계속해서 나오겠는가. 다만 분명한 것은 「봄날」의 아버지와 수전노 시리즈의 아버지는 인색한 성격 이외에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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