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아리엘 도르프만 작 박상현 번안 '추적'

clint 2024. 4. 19. 18:35

 

 

거울을 들여다보면 거기에 내가 있다. 나는 놀란다.
"나와 똑같이 생긴 저 자는 누구인가?" 
그런데 그 또한 나를 보고 놀란다면... 
"나와 똑같이 생긴 저 자는 누구인가?"
거울 속의 그가 나처럼 나와 똑같이 행동한다면,
그것이 쌓여 그의 일생이 나의 일생과 일치한다면?
나는 혹은 그는 그의 (나의) 정체를 추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 앞에 서 있는 그는 누구인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추적(원제: Reader)>은 가까운 과거와 미래의 전체주의적 통제사회를 배경으로 책을 읽는 검열관의 무서운 혼란과 공포를 그리고 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바로 자신의 과거이며, 이제 그 소설의 전개는 자신의 미래가 된다.




'추적'은 칠레의 극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독자(원제: Reader)'를 이 작품의 연출자 박상현이 한국적 환경으로 옮겨 번안한 극이다. 사실 '독자'도 아리엘 도르프만의 단편소설을 희곡화한 것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단편소설 '독자'가 칠레의 군부독재와 이에 맞서는 민주화 세력간의 대립을 배경으로 결과적으로 새로운 현실을 찾는 것이라면, 희곡 '독자'는 표면상으로는 민주주의가 이루어졌으되 새로운 종류의 전체주의 체제가 등장하여 개인의 삶을 속속들이 조종하고 감시하는 악몽 같은 미래의 상황을 다룬다. 그리고 무엇이 진짜 현실이고 진정한 자아 인지에 관해 탐구하고 있다. 이처럼 작가는 단편을 희곡으로 옮기며 보다 근본적인 진실의 문제에 접근하려 한다. 그리고 그 진실에 도달하기 위한 '개인의 용기 있는 선택'이라는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극의 스토리는 얼핏 보면 우리가 흔히 접하기 쉬운 Flash-back 기법이 사용되고, 기승전결의 일반적 희곡의 갈등구조를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구조들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장치는 시간적, 공간적 구조와 등장인물의 관계설정이 교묘하게 연결되어 일치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 점이 극의 주제를 제시한다. '추적'의 시간적 배경은 "가까운 과거'로 설정된 1980년대 군부독재 시절이고 '가까운 미래'로 설정된 2030년 즈음의 전 지구적으로 제국화 된 모습이다.

 


작품은 2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1막 전반에 걸쳐 구분되는 '가까운 과거'와 '가까운 미래의 시점은 각 시점의 인물들의 모습과 환경을 통해 일치점을 많이 지닌다. 1막은 '가까운 과거'와 '가까운 미래의 사건'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반면, 2막에 이르러서는 그 규칙이 파괴된다. '가까운 과거'로 설정된 공간은 문민호라는 검열관의 사무실이다. 그는 자신이 검열하던 책 중에서 자신의 고통스럽던 과거가 그대로 담겨있는 책을 발견한다. 한편 '가까운 미래 속에 살고 있는 사로 민에게도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관객은 그가 읽는 책 전환에는 '가까운 과거'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민호에 관한 이야기가 쓰여 있음을 알게 된다. 사로 민은 그 책을 통해 자신의 과거 자신의 승진을 위해 체제에 불복종하던 부인 하늬를 재활용센터에 감금시키려 위조서명을 한 일이 드러날까 두려워한다. 사로 민이 그 책을 읽는 동안 그의 의식이 무대에 드러나며 '과거의 사실'이 문민호의 과거로 설정되는 '허구의 진실'로 바뀐다. 사로 민이 '전환'을 쓴 작가 제갈마안을 찾아가면서부터 시작되는 2막은, 1막과는 달리 시간적 요소가 혼란에 빠진다. 사로 민이 하늬의 모습과 닮은 황보수우의 모습을 보며 놀라는 장면은 이 극의 다중적인 자아들이 충돌하는 단적인 예이다. 마치 극중의 인물 들뿐 아니라 배우들 사이에서도 서로에 대해 알아보는 듯한 이 장면은 '추적'의 연극적 재미 중 하나이다. 이때 국장이 등장하여 사로 민과 문민호가 속한 두 현실의 경계를 구분하기 위해 그들을 조정하고 통제한다. 하지만 결국 문민호라는 한 차원의 인물이 사로 민이라는 또 다른 차원의 인물과 일치되면서 모든 혼란이 정리되고 복잡하게 엉켜있던 극의 시점은 하나로 통일된다.

 

 


이 통일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본인은 바로 신성애이다. 그녀는 2막에서 국장이 휘두르는 권력에 매이지 않고 스스로 규칙을 어긴다. 용기 있는 여성의 이미지는 신성애 뿐 아니라, 영혼의 존재로 등장하는 환희- 하늬- 황보 수우의 이미지에서도 드러난다. 그들은 체제에 굴복하지 않고 강력하게 항의하는 존재다. 결국 무력에 억압당해도 문민호-사로 민에게 진실에 관해 의구심을 일으키고 신뢰와 배반의 이미지를 한꺼번에 심어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사내라는 인물은 극 속의 '경계선'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관념의 형상 또는 심판관, 나아가서는 신의 역할을 내포한다. 작게는 공연을 진행하는 무대감독의 역할도 맡고 있다. 그는 육체가 없는 존재이며 인간이 아니다. 경계를 관리하는 것은 인간이 아닌 보이지 않는 존재다. 국장이 경계를 만들고 나머지 인물들을 분리하려 노력하지만 결국 문민호가 경계를 넘었을 때 아무 힘을 쓸 수가 없는 것이 그 예이다. 국장은 지배체제의 상징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역시 그도 더 큰 권력에 지배당한다. 극중 인물의 관계를 통해서도 이 극의 주제는 드러난다. 배우들은 사내와 국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인다역(一人多役)이다. 흥미로운 예로 문혁- 솔민-제갈마안으로 연결되는 배우를 보자. '전환'의 무명작가와 검열관의 아들이 극전반을 통해 동일인이라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 때문에 배우는 거의 같은 감성과 행동방식을 지닌 한 인물을 설정해 놓고, 상황만 바꿀 뿐이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것처럼. 하지만 이 작품 마지막 부분에 문민호가 사로 민이 되고, 솔 민이 소설을 완성하는 부분에서, 앞에 보여졌던 다역의 연기자들은 진정한 하나의 역을 연기하며 무대를 떠난다. 인간의 진실된 정체성을 표현하고 싶어했던 작가의 의도가 무대 위에서 표현된 것이다. 극 전반에 걸쳐 등장인물들이 수동적으로 끌려 다니며 형식상 분리되어 왔던 정체성은 마침내 한 사람의 '선택'이라는 결정 에 의해 진실된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다. 허구의 인물인 문민호가 그의 의지로 극중 현실의 인물인 사로 민으로 전환하여 문민호를 허구의 인물로 만들어 버리고, 더 이상 현실과의 충돌을 막는다. 결국 하나의 인간으로 탄생한 사로민은 전환의 출판을 허락하고 그 대가로 징벌을 받을 것이다.

 

 

아리엘 도르프만의 인터뷰 발췌
-<독자>는 소설로 처음 쓰여진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것을 다시 희곡으로 각색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 나는 각색을 한다는 느낌보다 새로운 창작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만큼의 기쁨과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늘 여러 가지 방식으로 상상하고 구성하고자 노력하는데, 소설을 희곡으로 다시 쓴 것이 <독자> 뿐만은 아니다. 이 작품을 희곡으로 쓴 것은 나의 선택이다. 누군가의 권고나 부탁이 있지는 않았다. 사실 이 작품은 인간의 상상력과 언어가 갖는 힘에 대한 관심이다. 이것은 극적인 동시에 문학적이다. 소설적이란 의미이다. 이 작품은 기승전결을 갖춘 고전적 스토리였다. 하지만 나는 이런 고전적 스토리라인 위에 억압의 의미나 개념을 무대화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을 집필하게 된 동인은 무엇인가?
 - 사실 나는 언제나 억압하는 자들의 머리속에 들어가 보고 싶었다. 무대 위에서 희생자가 가해자를 응징하고 처벌하는 상황을 표현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나를 포함한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검열한 그 검열관을 조롱하고 싶었던 욕구도 있었다. 그러나 칠레의 상황을 그대로 묘사하고 싶지는 않았다. 검열관은 진실을 모르고, 알고싶어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진실과 대면하게된다. 자신도 모른 채 자신의 진실을 추적하는 오이디프스처럼 파멸에 이를지라도 진실을 찾아가게 되는 검열관을 표현하고 싶었다. 나는 자문했다. 검열관이 금지하려는 그 책이 만약 자기자신에 관한 것으로 밝혀 진다면, 그가 감추고 싶어하는 과거이며 동시에 그가 피할 수 없는 미래를 담고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만약 그 책의 내용이 눈앞의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만약 그가 자기 상상력을 억제할 수 없다면? 만약 그의 과거에 파울리나나 소피아 같은 여자가 있었고, 그 여자가 더 이상 침묵하지 않을 것이라면?

- 혹시 <독자>를 보고 '뭐가 뭔지 모를 만큼 혼란스러웠다고 말하는 비평가나 관객은 없었는지, 후반부의 반전, 혹은 혼란이 있기 전까지 이 작품은 정교하게 논리를 끌어가고 있다. 그에 비하면 후반부는 정말 거칠게 몰아부치는 느낌이 든다.
 - 반반이다. 무척 재미있어 하기도 하고 골치 아프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내가 왜 내 입으로 내 작품의 부정적인 측면을 시인하겠는가? (웃음) 후반부의 처리는 전반부의 논리적 구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의 현실에서도 그런 말도 안 되는 반칙이 흔하지 않은가. 이 작품이 정교하다거나 골치 아프다거나, 혹은 황당한 느낌이 드는데는 문학적인 추론이나 감수성으로 접해야 하는 이 작품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답이 될지 모르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숨겨져 있지만 주인공은 '문학'이다. '독자'가 아니다.

 

Ariel Dorf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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