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엘라 힉슨 '오일 Oil'

clint 2023. 7. 15. 09:38

 

160년에 걸친 대 서사 속에 ‘석유 연대기’를 따라 모녀(母女)의 관계를 펼쳐낸다. 
역사적 시간과 지리적 공간을 초월한 연극 ‘오일(Oil)’이다.

 


오일은 영국의 극작가 엘라 힉슨의 작품이다. 
1889년 영국 콘월에서 시작해 1908년 영국의 식민지 페르시아, 1970년 햄스테드, 2020년 바그다드, 2051년의 미래, 그리고 다시 콘월로 되돌아가는 한 세기 반의 여정을 담는다. 시대와 성별을 넘나드는 인물을 그린 버지니아 울프의 환상 소설 ‘올란도’처럼 주인공 메이는 19세기 등유 램프를 발명한 농부의 아내, 1908년 영국이 페르시아의 천연 자원을 착취하려 골몰하던 때 테헤란에서 일하는 하인, 1970년 리비아 자산 국유화 제안으로 위협 받는 국제 석유회사의 CEO 등으로 모습을 바꾼다. 그러나 이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핵심 에너지 ‘석유’의 존재와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부닥치고 변화하는 메이와 그의 딸 에이미의 관계다. 

 


그 모녀 관계만을 보면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던 20세 임신부 메이는 낯선 방문객이 가지고 온 석유 램프에서 기회를 발견하고 사랑을 버리는 홀로서기를 선택한다. 영국 식민지 테헤란에서 딸을 데리고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인다. 다국적 석유회사 대표로 일하며 많은 부를 거두고 안락한 삶을 누리지만 탐욕에 사로잡힌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는 딸 에이미와 거듭 갈등한다. 그리고 엄마를 떠나 바그다드 사막에 머문 에이미를 찾아와 설득하는 메이. 사막에서 비혼주의자로 살아가는 에이미에게 '엄마처럼 외롭게 살지 말라'고 애걸하지만 결국 결혼보다 자유를 원하는 에이미의 뜻을 거르지 못한다. 그리고 석유 고갈로 다시 빛을 잃고 어두워진 싱거 농장(2051년) 이야기가 이어진다. 여기에 다시 신기술이라며 핵융합 원료를 미래의 에너지원으로 판매하는 중국인 세일즈우먼 판왕이 신제품을 소개하는데... 에이미 역시 자신의 기회라 생각하고 집을 나선다. 엄마 메이와 같이... 

 

 

 


동떨어진 듯 보이는 두 축의 서사는 이 연극을 통해 합쳐지며 그 안에 계급주의, 여성주의, 제국주의, 그리고 환경 문제에 이르는 광범위한 개념을 다룬다. 메이가 리비아 유정과 10대 딸의 연애에 대한 통제권을 동시에 유지하려는 장면 등을 통해서는 국가와 기업의 제국주의 본능이 자녀를 향한 부모의 본능과 어떤 점에서 맞아 떨어지는 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2016년 영국 초연 당시 “대담하고 장난기 넘치며 야심찬 작품”(가디언)이라는 평을 받았고, 이후 미국, 호주, 캐나다 등에서 최근까지 공연되며 관객을 만나왔다.

 



<오일>은 석유의 흥망성쇠에 따라 막이 구분된다. 다시 말해, 현대 인류를 풍족하게 해준 '석유'의 발견과 쇠퇴가 연극의 시대적 배경이다. 그것은 석유가 본격적인 에너지원으로 발견된 1889년부터 이제는 고갈되어 지구에서 사라질 것으로 예상되는 2051년까지 보여준다. 메이의 일생이 석유의 160여 년과 묘하게 겹치는데, 20대의 임산부에서 아흔의 노모까지 숫자를 굳이 일치시킬 필요는 없어 보인다. 크게 석유의 흥망성쇠와 석유와 관련된 역사· 환경· 이념, 의식의 변화를 온몸으로 견뎌낸 한 여자의 기구한 일생을 떠올려야 작품 두 축의 서사가 맞물리는 작가의 의도 - 백인 남성의 관점에서 쓰여진 역사를 재해석하고 여성의 시각에서 들려주고 싶었던 엘라 힉슨의 의도를 느낄 수 있기에...

Ella Hick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