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性)’적으로 ‘총각’인 은행원 철은 여자친구 영과 섹스를 하고 싶어 하지만, 영은 결혼 전에는 절대로 섹스를 할 수 없다고 거부한다. 비 오는 어느 여름 밤, 군에서 휴가 나온 고등학교 동창과 술을 마시고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온 철은 영을 사창가에서 봤다는 휴가병의 전화를 받는다. 그의 전화에 평정심을 잃은 철은 마침내 경비원과 두던 장기판을 때려치우고 영을 찾아 나선다. 술에 취한 채 영을 찾아 친구 군인이 말한 사창가를 찾은 철은 술기운에 다른 여자를 영으로 착각하고 첫 성관계를 갖는다. 모텔방에서 술이 깨어 자신이 영이 아닌 다른 여자와 섹스를 한 사실을 알고 당황한 우준은 모텔방을 나서다가 자신의 친구 휴가병과 섹스하고 나오던 영과 마주친다. 몸을 파는 여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가증스럽게 정숙한 척 굴었던 영에게 분노와 배신감을 느낀 철은 영을 목 졸라 죽인다. 아파트로 돌아온 철, 이때 아파트 경비실로 영의 전화가 걸려온다. 그리고 친구 휴가병이 철이 두고 간 우산을 들고 온다. 마침내 밝혀지는 진실... 무너뜨릴 수 없던 애인 앞에서 무너진 성적욕망. 도대체 넌 누구고 난 누구냐? 영과 철이 펼치는 왁자지껄한 살인극인데.... 막판 반전이 흥미롭다.
영 아닌데는 작가 김흥우의 장난기가 다분히 엿보이는 작품이다. 작가는 주인공 철의 꿈을 통해 인간 내면의 욕망과 진실에 대해 들여다보고 있다. 꿈은 상상의 반영이라고 했던가? 억눌린 성적 욕망과 정숙함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 그리고 소유욕은 비극적 종말을 자아낼 수도 있다는 말씀. 하지만 여대생 윤락녀의 이야기가 공공연한 사실이 되어버린 오늘날, 수십 년 전의 김흥우의 상상력은 예언적이기까지 하다. 씁쓸할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나오는 코미디가 펼쳐진다.
65년 작 "영 아닌데"는 지금과는 달리 아파트 문화가 없던 시절의 아파트 생활이 그려졌으며 결혼과 연애의 다름의 세태를 예상한 듯 이미 무분별한 성관념을 질타했다.
김흥우는 50년이 넘게 연극계에 투신해 왔으나 그 작품 세계는 본인의 열정적인 연극 인생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것이 사실이다. 일찌기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받은 희곡작품을 발표함으로써 시대를 앞서갔던 그의 대표적 단막극을 무대 위에 형상화 시키는 작업은 매우 흥미롭고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수십 년 전 씌어져 아직까지 무대에 오르지 않았던 희곡들을 관객들에게 선보이는 과정은 그의 성품상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수십 년 전의 그의 작품이 2008년의 관객들을 만났다. 그의 연극인생을 따라 찾아가는 이 과정에 많은 후배들과 제자들이 뜻을 모았다. 김흥우라는 극작가 개인에 대한 재조명인 동시에 창작 희곡의 부재에 시달리는 현 연극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 활력소가 된 것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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